아버지는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했던 6.25의 경험을 자주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전쟁 이야기는 실화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먼 나라 이야기로 들렸다. 어제 일처럼 느껴졌을 생생한 경험을 토대로 말씀하셨지만 철없던 자녀들은 그저 제삼자에 불과했고 열 번도 더 들었을 이야기에 지겨워만 했다. 지금은 아버님의 그 이야기가 다시 그립다.
15년 전 여행을 다녀온 후 썼던 글 한 편 올려둔다. 아버지와 함께 한 처음이자 마지막 장사해수욕장 여행이었다.
<노병께 드리는 경례>
열아홉 나이에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한 젊은이는 일주일간의 짧은 훈련을 받았다. 교육을 받던 중 총기오발 사고로 죽어나가는 동료 학도병을 보면서 전장이 어떤 곳일지 짐작할 수 있었다.
훈련을 마친 후 북한군으로부터 노획한 총과 배낭 등 장비와 인민군복을 지급받았다. 적의 후방에 침투하므로 인민군으로 위장하려는 의도였다.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포항 위쪽 영덕지역으로 침투하여 적진을 교란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작전을 수행을 위해 상륙지점으로 항해하던 배는 강구 인근 장사 앞바다에서 암초에 부딪히며 좌초했다. 특수요원들이 육지와 상륙함 사이에 밧줄을 연결하였다. 미리 포진한 인민군들은 육지로 상륙하는 아군을 향해 미친 듯이 총을 쏘아댔다. 전투기들은 고도를 낮추어 적진을 향하여 폭격을 하고 바다에서는 함포 사격으로 적의 공격을 누그러뜨렸다.
처음으로 전장을 경험하는 어린 유격대원은 배에서 뛰어내리기를 주저하였다. 총탄이 빗발치는 곳을 바라보니 두려움이 앞섰다. 대대장은 권총을 쏘아대며 배에서 내리지 않으면 사살하겠노라고 소리를 질렀다. 눈을 꾹 감고 바다로 뛰어내렸다. 배와 육지 사이에 연결된 밧줄에 의지해 육지로 향했다.
적들이 쏘아대는 총알이 '슈웅쑤융' 소리를 내며 물거품을 일으켰다. 총에 맞은 전우들이 물 위로 떠올랐다. 하지만 정신을 놓을 겨를이 없었다. 사력을 다해 육지에 올라 길게 이어진 모래사장에 엎드렸다. 피를 흘리며 나뒹구는 전우도 보였다. 돌격 앞으로라는 명령에 따라 앞에 보이는 산을 향해 냅다 뛰었다.
대원들은 산속에 집결하여 전열을 정비하였다. 많은 수의 전우들이 죽어갔지만 산 사람은 계속 싸워야만 했다. 육지에 상륙한 후 며칠 동안 적군과 대치했다. 비가 끊임없이 내려 군복이 홀딱 젖은 채 긴 시간을 견뎌야 할 때면 바지를 입은 채 오줌을 쌌고 잠시나마 따뜻한 체온을 즐길 수 있었다.
유격대원들을 태우러 새로운 상륙함이 도착했다. 미군은 들고 있는 총과 배낭 등 장비를 던져 버리고 알몸으로 바다에 뛰어들라고 했다. 아까운 마음에 버리기를 주저하자 개머리판을 휘두르며 버리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장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머뭇거리는 사이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생명을 귀히 여기는 그들이 우러러 보였다. 사력을 다해 헤엄쳐 배에 올랐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목숨을 부지한 전우들은 육군본부가 있는 부산으로 귀환하였다. 부산항에는 수많은 시민이 모여 살아 돌아온 이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신문은 적 후방을 교란하고 보급로를 차단하는 등 적의 전의를 상실케 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게 하는데 이바지하였다며 그들의 전공을 대문짝만 하게 썼고 호외도 뿌려댔다.
여행을 떠나기 전날 설레는 마음 때문에 잠을 설치는 건 어린 시절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건 내일 있을 가족 여행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길지도 않은 단 하루의 휴가. 어디로 가겠느냐는 물음에 부친은 망설임 없이 바다로 가자고 하셨다. 매년 여름이면 바닷물에 몸을 담그며 더위를 잊곤 했는데 지난 두 해 동안은 바다에 다녀오지 못해 아쉬우셨단다.
어쩌면 6.25 동란 때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죽을 고비를 넘겼던 장사상륙작전의 현장을 가고 싶은 마음이 더 많으셨는지도 모르겠다. 목숨을 걸고 싸웠던 장소에서 자신이 경험한 전쟁과 조국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말해주고 싶으셨으리라.
출발부터 아이처럼 들뜬 기분을 숨기지 않으신다. 대구 포항 간 고속도로를 타고 포항에서 내려 칠 번 국도를 타고 영덕 방향으로 올라가니 바다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본격적인 피서철을 맞지 않아서인지 해수욕장은 조용한 편이다. 해송 군락이 지나가는 여행객을 반갑게 맞아준다. 외로움을 이기려 서로 마주 보며 바다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나 보다.
장사해수욕장에 도착하자 무엇인가 할 일이 있는 사람처럼 바쁘게 걸으신다. 장사상륙작전 전몰용사 위령탑 앞에 서셨다. 말없이 주위를 한 바퀴 도신다. 전장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한 친구들을 생각하셨을까. 죽을 고비를 넘기며 지켜온 조국의 안녕을 비셨을까.
사선을 넘나들던 당시의 기억을 되새기는 듯 눈빛이 흐려있다. 반려자와 함께 기념비에 새겨진 글씨를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가는 노병의 모습을 보니 속에서 뜨거운 무엇이 울컥 솟아오른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하루가 노병에겐 작은 선물이 될지도 모르겠다. 피와 땀으로 지켜낸 조국이 건재하고 자녀들이 장성하여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책임과 역할을 다하고 있는 지금 더 바랄 게 무엇이랴. 지난 두 해 동안 힘든 병마와 싸워 이기고 병석에서 일어난 후 유명을 달리한 친구와 전우들의 혼이 깃든 이곳을 다시 와보고 싶으셨으리라. 어느새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물속으로 첨벙 뛰어드는 노병의 등 뒤로 거수경례를 올린다.
아래의 글은 동아일보 홈페이지에 실린 것(2023년 8월 2일 입력)으로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하였다.
"<군번 계급 없는 영웅! 학도의 용병[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포항에서 7번 국도를 따라 20여 km를 올라가면 영덕군 남정면 장사해수욕장 앞바다에 커다란 배 한 척이 정박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대형 태극기가 갑판에 걸려있고 배의 옆면에 ‘작전명 174호…잊혀진 영웅들!’이란 커다란 구호와 함께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이 흰색으로 쓰여있다. 인천상륙작전 전날 양동작전을 위해 장사상륙작전에 동원됐다 좌초했던 ‘LST 문산호’다. 1997년 3월 6일 해안을 수색하던 해병대 1사단 대원들이 바닷속 갯벌에서 발견했다.
문산호에 오르기 전 해변에 조성된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에는 ‘장사상륙작전 전몰용사 위령비’, 상륙작전 하는 병사들 조형물 등이 있다. 공원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커다란 고등학생 모자 조형물. 모자 앞에 ‘高’ 자가 선명하다. 상륙작전에 참여한 부대원 대부분이 학생들이었음을 상징한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가 한창이던 1950년 8월 27일 대구와 밀양에서 모집한 772명으로 육군본부 직할의 ‘독립 제1 유격 대대’가 편성됐는데 대부분 학생들이었다. ‘독립 제1 유격 대대’는 이명흠 대위가 직접 대구역 광장 등에서 모병해 ‘명부대’란 별명이 생겼다. 명부대에 내려진 ‘174호 작전’ 명령은 ‘장사해안에 상륙해 김무정 중장 휘하 북한군 제2군단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아울러 적의 후방을 교란하라’는 것이었다.
문산호 기념관 내부에는 학도병으로 참가하게 된 다양한 증언들이 소개됐다. 나라 없는 학교가 무슨 소용인가, 의무감과 사명감으로 왔다. 자원입대하려고 모병소에 갔더니 나이가 어려 학교장 추천서를 받아오라고 해서 추천서를 받아서 왔다 등 자원입대 진술이 있다. 반면 밀양교를 건너 부산으로 가고 있는데 군인이 오라 하더니 다른 군인에게 인계했다. ‘아저씨 저 17살이에요’ 했지만 ‘잔소리 말고 따라와’ 해서 교복을 입은 채로 미군 트럭에 실려 창녕군의 낙동강으로 갔다는 사연도 있다. 당시 모병 상황을 가감 없이 보여주어 긴박함과 함께 안타까움이 더했다.
174호 작전’은 적을 속이기 위해 대대급임에도 불구하고 ‘사단’으로 위장했다. 중대를 연대로 부르고, 지휘관들도 그에 맞는 임시 계급을 부여했다. 북한 방송이 ‘2개 연대가 상륙했다’고 한 것은 이런 기만책이 효과를 본 것이었다. 부대는 출항하기 전 명부대원과 미군이 번갈아가며 승선과 하선을 수차례 반복해 마치 미군도 상륙작전에 참여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나무위키’)
‘명부대’ 대원 772명을 실은 문산호가 하루 전 부산항을 출발한 뒤 9월 15일 오후 2시경 장사해안에 도착했을 때 한반도로 접근하던 태풍 케지아는 동해로 올라오고 있었다. 태풍으로 출항 및 해안 도착이 계획보다 하루 늦어졌다. 서해에서 인천상륙을 준비하던 맥아더는 태풍이 동해로 비껴가 한숨을 돌렸으나 명작전 주함이었던 2700t급 문산호는 좌초됐다.
태풍으로 상륙지점을 찾지 못해 표류하던 문산호가 상륙지점 해안에서 300m 떨어진 해역에서 좌초되자 특공대는 문산호와 해안에 밧줄을 연결해 상륙을 시도했다. ‘밧줄 상륙’ 과정에서 학도병들은 적의 총격에 일개 중대가 거의 몰살됐다고 한다.(최상진, 60쪽) ‘72시간 임무 수행 후 전원 철수’라는 상륙작전은 문산호 좌초와 함께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그럼에도 적의 포화 속에 물로 뛰어들어 상륙한 대원들은 해안의 200 고지를 점령하고 5일간 북한군의 후방을 교란하며 전투를 벌이다 구조선 LST 조치원호로 귀환했다. 철수할 때도 해안에서 200m가량 떨어진 해상에 조치원호가 정박해 ‘밧줄 철수’를 했다. 양측이 전투를 벌이면서 긴박하게 철수하면서 39명의 대원은 미처 승선하지 못했다. 이들은 최후의 1인까지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포항전투사’, 31쪽)
이명흠 대위를 포함해 ‘명작전’에 참가한 누구도 이 작전이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연막작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당초 사흘에서 1주일로 길어진 작전을 마치고 돌아온 부산 부두에서 신문 호외를 보고 자신들이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양동작전에 동원됐음을 알게 됐다.(‘학도의용군 연구’, 163쪽)
<장사상륙작전 일지>
출처 :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
8월 27일 ‘독립 제1 유격 대대’ 편성(772명)
9월 12일 ‘작전 명령 174호’ 전달
9월 14일 LST 문산호 승선, 부산항 출발
9월 15일 장사 앞바다 도착, 태풍으로 좌초
9월 15일 ‘밧줄’ 상륙, 200 고지 점령
9월 16〜8일 북한군과 교전. 적 2군단 후방 보급로 차단 작전
9월 19일 구조선 LST 조치원호로 ‘밧줄’ 귀환
아군 피해 : 139명 전사, 92명 부상, 39명 미승선 포로
북한군 피해 : 270명 사살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 평화연구소장"
올봄(2023) 한국을 방문했을 때 아내와 나는 동생들과 함께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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