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일기

세 치 혀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24. 1. 24. 22:12

<세 치 혀/ 한소>
말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찌른다는 걸 알면서도 내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걸 몰랐다
아침에 아내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랬었군요 참 힘들었겠네요’라고 말했으면 좋았을 것을 나 같으면 이렇게 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잊어버렸다
그 말이 아내에게 비수가 되었나 보다 아내는 다시는 내게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잘한다고 한 말이 칼이 되어 아내를 찌른 것이다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던 말이 오히려 상처를 주고 아프게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살아오는 동안 나는 세 치 혀로 얼마나 얼마나 많은 사람을 찔렀을까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이사야 50:4>


<구도/이성선>
세상에 대하여 할 말이 줄어들면서 그는 차츰 자신을 줄여갔다
꽃이 떨어진 후의 꽃나무처럼 침묵으로 몸을 줄였다
하나의 빈 그릇으로 세상을 흘러갔다
빈 등잔에는 하늘의 기름만 고였다
하늘에 달이 가듯 세상에 선연히 떠서 그는 홀로 걸어갔다

<구름과 바람의 길/이성선>
실수는 삶을 쓸쓸하게 한다 실패는 생生 전부를 외롭게 한다 구름은 늘 실수하고 바람은 언제나 실패한다 나는 구름과 바람의 길을 걷는다 물속을 들여다보면 구름은 항상 쓸쓸히 아름답고 바람은 온 밤을 갈대와 울며 지샌다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길 구름과 바람의 길이 나의 길이다

<깨끗한 영혼/이성선>
영혼이 깨끗한 사람은 눈동자가 따뜻하다
늦은 별이 혼자서 풀밭에 자듯 그의 발은 외롭지만 가슴은 보석으로 세상을 찬란히 껴안는다
저녁엔 아득히 말씀에 젖고 새벽녘엔 동터오는 언덕에 다시 서성이는 나무
때로 무너지는 허공 앞에서 번뇌는 절망보다 깊지만 목소리는 숲 속에 천둥처럼 맑다
찾으면 담 밑에 작은 꽃으로 곁에서 겸허하게 웃어주는 눈동자가 따뜻한 사람은 가장 단순한 사랑으로 깨어 있다

<나무/이성선>
나무는 몰랐다 자신이 나무인 줄을 더구나 자기가 하늘의 우주의 아름다운 악기라는 것을 그러나 늦은 가을날 그는 보았다 고인 빗물에 비치는 제 모습을 떨고 있는 사람 하나 가지가 모두 현이 되어 온종일 그렇게 조용히 하늘 아래 울고 있는 자신을

<나무 안의 절/이성선>
나무야 너는 하나의 절이다 네 안에서 목탁소리가 난다 비 갠 후 물속 네 그림자를 바라보면 거꾸로 서서 또 한 세계를 열어 놓고 가고 있는 너에게서 꽃 피는 소리 들린다 새 알 낳는 고통이 비친다 네 가지에 피어난 구름 꽃 별꽃 뜯어먹으며 노니는 물고기들 떨리는 우주의 속삭임 네 안에서 나는 듣는다 산이 걸어가는 소리 너를 보며 나는 또 본다 물속을 거꾸로 염불 외고 가는 한 스님 모습

<가을/최승자>
세월만 가라, 가라 그랬죠 그런데 세월이 내게로 왔습니다. 내 문간에 낙엽 한 잎 떨어뜨립디다 가을입니다
그리고 일진광풍처럼 몰아칩디다 오래 사모했던 그대 이름 오늘 내 문간에 기어이 휘몰아칩디다

<그대 영혼의 살림집에/최승자>
그대 영혼의 살림집에 아직도 불기가 남아 있는지 그대의 아궁이와 굴뚝에 아직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지
잡탕 찌개백반이며 꿀꿀이죽인 나의 사랑 한 사발 들고서, 그대 아직 연명하고 계신지 그대 문간을 조심히 두드려봅니다

<근황/최승자>
못 살겠습니다 (실은 이만하면 잘 살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원한다면, 죽여주십시오
생각해 보면,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게 내 죄이며 업입니다 그 죄와 그 업 때문에 지금 살아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잘 살아 있습니다

<기억하는가/최승자>
기억하는가 우리가 만났던 그날 환희처럼 슬픔처럼 오래 큰 물 내리던 그날
내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 뒤척였다

<나는 그대의 벽을 핥는다>
나는 그대의 벽을 핥는다 달디단 내 혀의 입맞춤에 녹아 무너져라고 무너져라고 나는 그대의 벽을 핥는다
그러나 결코 사랑은 아니라고 깨달아지는 이 나이는 무슨 나이인가? 결코, 사랑만이 아니다 결코 사랑만으로는 태부족이다 이런, 호 혹시 테러리스트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오 꼬집어다오, 형제여, 내가 호 혹시 깡패의 순정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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