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일기

매화를 찾아서, 미시령 노을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24. 1. 30. 23:21

<매화를 찾아서/신경림>
구름 떼처럼 모인 사람들만 보고 돌아온다
광양 매화밭으로 매화를 보러 갔다가
매화는 덜 피어 보지 못하고.
그래도 섬진강 거슬러 올라오는 밤차는 좋아
산허리와 들판에 묻은 달빛에 취해 조는데.
차 안을 가득 메우는 짙은 매화향기 있어
둘러보니 차 안에는 반쯤 잠든 사람들뿐.
살면서 사람들이 만드는 소음과 악취가
꿈과 달빛에 섞여 때로 만개한 매화보다도
더 짙은 향내가 되기도 하는 건지.
내년 봄에도 다시 한번 매화 찾아 나섰다가
매화는 그만두고 밤차나 타고 올라올까.
-신경림(1935~)


<미시령 노을/이성선>

나뭇잎 하나가
아무 기척도 없이
어깨에
툭 내려앉는다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너무 가볍다


<운동/ 한소>

자전거를 타고
스텝퍼 위를 걷는다

소금기가 베어져 나와
등판을 적신다

그렇게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지나니

몸이 깃털처럼
가볍다

한 마리
새가 되어

창공을
가른다


<문답법을 버리다/이성선>
산에 와서 문답법을
버리다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
구름을 조용히 쳐다보는 것

그렇게 길을 가는 것

이제는 이것뿐
여기 들면

말은 똥이다


<바다를 잃어버리고/이성선>
바다를 바라보다가 바다를 잃어버렸습니다
바닷가를 거닐며 바다를 찾고 있습니다
당신이 너무 가까이 있다는 것은 당신을 잃는 것입니다
당신을 다 안다는 것은 눈을 감는 일입니다
사랑도 그러합니다 이 가을에 이젠 떠나야겠습니다 멀리서 더 깊이 당신에 젖고 싶습니다
당신의 눈동자와 흔들리는 가슴 물새들은 반짝임도 울음소리도 가슴 깊은 곳에 묻어 두고 들어야겠습니다
당신이 보내신 편지를 읽듯이 떨리는 손으로 등불 아래서 펴 보아야겠습니다

<밤 부엉이/최승자>
밤부엉이 한 마리가 창가에서 나를 꼬나보기 시작했어 나는 허둥거리며 내 몸의 모든 기관들을 닫아 버렸지만 부엉이의 눈빛이 오토머신처럼 내 몸 구석구석을 헤집어 열고 노란 방사선을 쏘아 부었어 나는 사지를 늘어뜨린 채 천천히 , 차갑게 융해되어 갔어
이윽고 잠, 닫혀진 회색 강철 바다, 속으로 한 사내의 그림자가 숨어들어 내 꿈의 뒷전을 어지러이 배회하고 환각처럼 들리는 창가에서, 누구시죠? 내게 희미한 두통과 고통을 흘러 붓는, 누구시죠? 내 死産의 참상에 낮게 가라앉아, 누구시죠? 누구 누구 누구…?
밤부엉이가 밤새 내 지붕을 파먹었어 아침엔 날이 흐렸고 벌어진 큰골 속으로 빗물이 흘러들었어 이미 죽은 내 몸뚱이 위에 누군가 줄기차게 오줌을 깔기고, 휘파람을 불며 유유히 떠나갔어

<비극/최송자>
죽고 싶음의 절정에서 죽지 못한다, 혹은 죽지 않는다 드라마가 되지 않고 비극이 되지 않고 클라이막스가 되지 않는다 되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견뎌내야 할 비극이다 시시하고 미미하고 지지하고 데데한 비극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 물을 건너갈 수밖에 없다 맞은편에서 병신 같은 죽음이 날 기라리고 있다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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