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일기

성숙으로 가는 길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24. 1. 22. 23:23

<성숙으로 가는 길/한소>
너 때문이야
난 잘못이 없어
뭐가 문제야
네가 제대로 하는 게 뭐야

그렇군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잘못했어요
제가 실수했어요

아이 같이 까르르 웃을 것
하늘을  자주 바라볼 것
들풀과 숲을 사랑할 것
귀 기울여 들을 것

기다릴 줄 알 것
꾸준히 운동 할 것
자주 걸을 것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기꺼이 할 것

아는 만큼
느낀 만큼
배운 만큼
기어코 살아낼 것

<사랑/이성선>
더러운 내 발을 당신은
꽃 잎 받듯 받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흙자국을 남기지만
당신 가슴에는 꽃이 피어납니다

나는 당신을 눈물과 번뇌로 지나가고
당신은 나를 사랑으로 건넙니다

당신을 만난 후 나는 어려지는데
나를 만난 당신은 자꾸 늙어만 갑니다.

<별똥/이성선>
별과 별 사이
하늘과 땅 사이
노오란 장다리 꽃 밭 위로
밤에 큰 별똥 지나간다
소풍 가는 시골 초등학교 아이처럼

<가을 편지/이성선>
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원고지처럼 하늘이 한 칸씩
비어가고 있습니다
그 빈 곳에 맑은 영혼의 잉크 물로
편지를 써서
당신에게 보냅니다
사랑함으로 오히려
아무런 말 못 하고 돌려보낸 어제
다시 이르려 해도
그르칠까 차마 또 말 못 한 오늘
가슴에 고인 말을
이 깊은 시간
한 칸씩 비어 가는 하늘 백지에 적어
당신에게 전해달라
나무에게 줍니다

<고요하다/이성선>
나뭇잎을 갉아먹던
벌레가

가지에 걸린 달도
잎으로 잘못 알고
물었다

세상이 고요하다

달 속의 벌레만 고개를 돌린다

<고향의 천정/이성선>
밭둑에서 나는 바람과 놀고
할머니는 메밀밭에서
메밀을 꺾고 계셨습니다

늦여름의 하늘빛이 메밀꽃 위에 빛나고
메밀꽃 사이사이로 할머니는 가끔
나와 바람의 장난을 살피시었습니다

해마다 밭둑에서 자라고
아주 커서도 덜 자란 나는
늘 그러했습니다만

할머니는 저승으로 가버리시고
나는 벌써 몇 년인가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후

오늘 저녁 멍석을 펴고
마당에 누우니

온 하늘 가득 별로 피어 있는
어릴 적 메밀꽃

할머니는 나를 두고 메밀밭만 저승까지 가져가시어
날마다 저녁이면 메밀밭을 매시며
매밀밭 사이사이로 나를 살피고 계셨습니다

<이제 가야만 한다/최승자>
때론 낭만주의적 지진아의 고백은 눈물겹기도 하지만, 이제 가야만 한다 몹쓸 고통은 버려야 한다
한때는 한없는 고통의 가속도, 가속도의 취기에 실려 나 폭풍처럼 세상 끝을 헤매었지만 나 고통이라는 말을 이제 결코 발음하고 싶지 않다
파악할 수 없는 이 세계 위에서 나는 너무 오래 뒤뚱거리고만 있었다
목구멍과 숨구멍을 위해서는 동사만으로 충분하고, 내 몸보다 그림자가 먼저 허덕일지라도 오냐 온몸 온 정신을 이 세상을 관통해 보자
내가 더 이상 나를 죽일 수 없을 때 내가 더 이상 나를 죽일 수 없는 곳에서 혹 내가 피어나리라

<외롭지 않기 위하여/최승자>
외롭지 않기 위하여 밥을 많이 먹습니다 괴롭지 않기 위하여 술을 조금 마십니다 꿈꾸지 않기 위하여 수면제를 삼킵니다 마지막으로 내 두뇌의 스위치를 끕니다
그러면 온밤 내 시계 소리만이 빈 방을 걸어다니죠 그러나 잘 들어 보세요 무심한 부재를 슬퍼하며 내 신발들이 쓰러져 웁니다

<여성에 관하여/최승자>
여자들은 저마다의 몸속에 하나씩의 무덤을 갖고 있다 죽음과 탄생이 땀 흘리는 곳, 어디로 인지 떠나기 위하여 모든 인간들이 몸부림치는 영원한 눈먼 항구, 알타미라 도굴처럼 거대한 사원의 폐허처럼 굳어진 죽은 바다처럼 여자들은 누워있다 새들의 고향은 거기, 모래바람 부는 여자들의 내부엔 새들이 최초의 알을 까고 나온 탄생의 껍질과 죽음의 잔해가 탄피처럼 가득 쌓여 있다 모든 것들이 태어나고 또 죽기 위해선 그 폐혀의 사원과 굳어진 죽은 바다를 거쳐야만 한다

<언젠가 다시 한번/최승자>
언젠가 다시 한번 너를 만나러 가마 언젠가 다시 한번 내 몸이 무덤에 닫기 전에
나는 언제나 너이고 싶지만 너의 고통이고 싶었지만 우리가 지나쳐온, 아직도 어느 갈피에선가 흔들리고 있을 아득한 그 거리들
나는 언제나 너이고 싶었고 너의 고통이고 싶었지만 그러나 나는 다만 들이키고 들이키는 흉내를 내었을 뿐이다. 그 치욕의 잔 끝없는 나날 죽음 앞에서 한 발 앞으로 한 발 뒤로 끝없는 그 삶의 무도를 다만 흉내내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너를 피해 달아나고 달아나는 흉내를 내고 있다 어디도 없는 너를 피해
언젠가 다시 한번 너를 만나러 가마 언젠가 다시 한번 내 몸이 무덤에 닿기 전에
(이 세계의 어느 낯선 모퉁이에서 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어떤 풍경/최승자>
고요한 서편 하늘 해가 지고 있습니다 건널 수 없는 한 세계를 건넜던 한 사람이 책상 앞에서 시집들을 뒤적이고 있습니다
그가 읽는 시의 행간들 속에서 고요가 피어오릅니다 그 속에 담겨 있는 시간의 무상함
어떤 사람이 시간의 시를 읽고 있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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