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에 머무는 시간이 좋다. 올해도 농사를 시작하기 전 뒤뜰에 나가 땅을 뒤집기 시작했다. 모종을 내다 심으려면 한 달 이상 기다려야 하지만 미리 땅을 일구어 주어야 한다. 흙을 뒤집으며 옛 추억을 떠올려본다.
문고리를 잡으면 손끝이 쩍쩍 달라붙던 맹렬한 추위는 지나갔지만 볼에 와닿는 바람은 여전히 매서울 때 아버지는 밭으로 나가셨다. 마스크를 끼고 옷을 두껍게 입은 동네 어른 몇 분과 나무를 옮겨 다니며 사나흘에 걸쳐 전지를 하셨다. 사과밭 전지가 끝나면 밭 끝 쪽 복숭아 밭으로 건너가 작업을 마무리했다. 붉게 물 오른 새 순과 함께 잘린 가지는 나무 밑에 나뒹굴다 다발로 묶여 부엌 뒤쪽에 쌓였다. 겨우내 땔감으로 요긴하게 쓰일 것들이었다.
일하시는 분 중에는 둘째 큰아버지도 계셨다. 나를 보면 늘 웃으시며 반가워하셨는데 나는 큰아버지가 무서웠다.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고 머뭇거리면 어색하게 웃으시며 바라보곤 하셨다. 큰아버지는 말씀을 못하셨다. 수화로 소통하셨던 그분을 대할 때 나는 늘 몇 발자국 떨어져 서 있곤 했다. 환갑 전 돌아가셨는데 더 살갑게 대해 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전지가 끝나면 과수원에 퇴비를 주었다. 밭에 퇴비를 뿌리는 일은 어머니와 태자 누나의 몫이었다. 누나는 어머니의 먼 친척뻘이라 했다. 어머니와 누나는 두엄더미에서 퇴비를 퍼 리어카에 싣고 먼데 나무로부터 가까운 나무로 옮겼다. 누나가 리어카를 끌면 어머니는 뒤에서 밀었고 어머니가 끌면 누나가 밀었다. 리어카를 세워 거름을 부리고 나면 쇠스랑으로 평평하게 펼친 후 괭이로 땅을 뒤집었다. 과수원에 퇴비를 주고 흙을 뒤집는 일은 일주일 이상 계속되었다.
가지치기와 거름 주기가 끝나고 달포쯤 지나면 붉게 물든 가지마다 터질 듯 꽃망울이 부풀어 올랐다. 하루이틀 더 자고 나면 이쪽저쪽에서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복송아 가지가 먼저 꽃망울을 터트렸고 질세라 사과나무 가지가 꽃망울을 터트렸다.
꽃이 필 무렵이면 과수원은 온통 꽃 향기로 진동했다. 벌들은 윙윙거리며 꽃사이를 넘나들었는데 어린 나는 천국이 있다면 반드시 꽃으로 뒤덮인 과수원 같을 것이라 생각했다.
꽃이 지고 얼마 지나고 나면 앙증맞은 열매가 맺혔다. 구슬만 해졌을 때 솎아내는 일을 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따내기도 하고 가지 아래 서서 따내기도 하였다. 사과가 더 크게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에 몇 개씩만 남겨두고 솎아주어야 했다. 아깝다고 솎아 주지 않으면 볼품없는 사과가 달리기 마련이었다.
흙을 뒤집으니 필요 없는 잔뿌리가 세력을 키워가고 있다. 골라내 주지 않으면 모종을 심어도 제대로 자라지 못할 듯하다. 하나씩 추려내어 통에 담는다. 허리를 굽혔다 폈다 되풀이하니 찢어질 듯 아프다. 쉬기를 반복하며 엉키고 설킨 잔뿌리를 하나하나 골라낸다.
어쩌면 내 마음에도 잔뿌리가 엉켜있지나 않을까. 상처의 잔뿌리, 후회의 잔뿌리, 원망의 잔뿌리, 미움의 잔뿌리, 두려움의 잔뿌리 등.
뒤집기 전에는 땅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듯 마음 밭 또한 파헤쳐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것들이다. 땅을 뒤집으며 필요 없는 잔뿌리를 골라내듯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해로운 뿌리도 하나씩 골라낼 일이다. 겨울 끝자락 가지 자르듯 삶의 습관도 종종 가지치기와 솎아내기를 할 일이다.
한 달 후면 모종을 내다 심을 수 있을 터이다. 구멍을 만들어 연약한 줄기를 눕히고 흙으로 부드럽게 감싸 주리라. 물을 주고 말을 걸며 햇살의 방향도 헤아리리라. 여린 생명이 뿌리 내리고 잎새를 하나씩 피워 올릴 때마다 내 마음도 푸른 잎 덩달아 피워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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