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crifice·시니어

분무기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04. 8. 11. 13:43
 <분무기>

 

출근 길에 어제 저녁 구입한 분무기를 들고 나왔다. 분무기라고 거창하게 말하였지만 실은 다림질 할 때 물을 뿌리는 플라스틱통이다. 여느 집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조잡한 물건에 불과하다. 분무기를 들고 회사까지 오는 동안 마음 속에 새록새록 기쁨이 넘친다. 물을 뿌려주면 기뻐할 분재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년 전에 책상 위에 두고 벗삼아 즐길 화분이나 분재가 없겠는가 살펴보았다. 화원에 나갔더니 적당한 크기의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어 값을 치렀다. 어디에둘까 궁리하다 사무실 책상 오른편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이 식물이 참 귀하고 예쁘다. 업무 때문에 정신없이 바쁘게 지나다가도 분재만 보면 마음이 편안해 진다. 서운한일, 억울한 일을 당하여 마음이 싸늘할 때 분재에서 돋아난 파아란 이파리를 보면 금방 마음이 누그러진다. 출근하자마자 안녕, 간밤에도 잘 잤니? 하고 말을 걸면 물론이지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고 반가이 대답하는 듯 하다분재는 어느덧 나의 좋은 친구이자, 분신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이 분재를 볼 때마다 잘 키웠다고 한마디씩 한다. 어제는 후배 김주백이 다녀갔다. 주백이 말하기를 "난이나 분재를 살까 하고 가게에 갔다가 내 책상 위에 놓인 것과 같은 종류의 분재를 보았다"고 한다. 식물원 주인이 '키우기가 까다롭고, 신경을 쓰지 않으면 잘 자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단다 "그런데도 형은 아주 잘 키웠다"고 부러워한다. 마음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것 외에는 특별히 해준 것도 없는데 말이다.  

 

 평소에 나는 물건 들고 다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나뿐 아니라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러하리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손에 주렁주렁 무엇을 들고 다니지 않는다. 책만은 제외하고. 평소 같으면 당연히 거추장스러워야 할 값싼 분무기 하나를 손에 들었는데 마음이 여간 흐뭇하고 기쁘지 않다. 여름철에 시원한 물을 맞고 좋아할 분재를 생각을 하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어쩌면 자식 키우는 심정과도 같다.

 

옛날 선비의 마음도 그러했을 것이다.  언제나 책을 가까이 하며, 난이나 소나무,대나무를 보는 것 만으로도 기뻐하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벼루에 먹을 갈아 난을 치기도 했으리.

 

한양대 정민교수가 쓴 책 미쳐야 미친다’  68-84 페이지에 보면 조선의 가난한 선비 이덕무(李德楙,1741-1793)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덕무는 추운 겨울 홑이불만 덥고 잠을 자다얼어죽을 것 같아서 논어(論語)를 병풍처럼 늘어 세워 웃풍을 막고 한서(漢書)를 이불 위로 물고기 비늘처럼 잇대어 덮고서야 겨우 얼어죽기를 면할 수 있었다적고 있다. 이토록 가난한 삶을 살면서도 그는 책을 놓은 적이 없었다. 

 

또한 선비는 많은 책을 썼다. 바른 몸가짐을 적은 사소절(士小節), 명인들의 시화(詩畵)를 수록한 청비록(靑脾錄), 역사서인 기년아람(紀年兒覽) 일본 풍토지라 할 수 있는 청령국지(蜻蛉國志)등 자신의 키만큼 많은 책을 남겼다.

 

이런 선비정신을 배우고 싶다. 돈 버는 일이 중요하고, 출세하는 일 또한 못지않게 중요하다. 돈버는 일, 출세하는 일을 위해 열심히 노력은 하되 마음은 언제나 가난한 선비로 살고 싶다. 환경을 탓하며 현재 나의 처지를 불평하거나 불만하지 않고 선비의 마음으로 깨끗하고 단아하게 살고 싶다. 분재를 가꾸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연을 벗하며, 책을 벗하며 살고 싶다.

 

분재에 물을 뿌려주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2004/8/11이택희>

'Sacrifice·시니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하철에서 PC이용/관능  (0) 2004.08.23
여자는 혼자 여행할 때 강해진다(따온 글)  (0) 2004.08.21
산책2  (0) 2004.08.09
만일 내가 한 마음의 상처를...  (0) 2004.08.06
수영장에서  (0) 2004.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