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ition

마음 모습에 따라 보이는 모습이 다르다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04. 8. 23. 10:11

8월 21일, 6시 30분 관악산. 계곡을 따라 연주대에 오르다. 걷는 동안 물 흐르는 소리가 끊이질 않고,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도 이어진다. 연주암에 다다랐을 무렵 도토리 줍은 할머니를 만났다. 짊어진 배낭이 뒤로 축쳐져 있다. 도토리 묵 씹을 때의 물컹하고 씁쓸한 맛을 상상한다. 가을의 초입을 온 몸으로 느낀다. 모래가 처서(處暑)다.

 

연주암에서 절밥을 먹으려는데 주위를 돌아보니 절에서 나오는 밥만 먹고 있는 경우는 나뿐이다. 다음부터는 배낭 속에 일회용 김이라도 몇 개 넣어 다녀야 겠다.

 

가까운 탁자에 앉은 여인이 아저씨 이리 와서 함께 드셔요 라고 말한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혼자서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이 딱해 보였나? 순간적으로 망설이다 자리를 옮겼다. 절에서 남의 호의를 무시하는 건 도리가 아니다. 자리를 옮기긴 했는데 생판 모르는 두 여인네가 앞에 앉아 있으니 밥 먹기가 영 어색하다. 생각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한번 잡숴보셔요. 보기에는 그렇지만 맛있어요라고 권한다. 뻣뻣한 김을 간장에 찍어 먹는데 간장 맛이 괜찮다. 알고 보니 간장이 아니고 멸치액젖이다. 지난 오월 부산 기장에 내려가 직접 사왔다고 한다.

 

얼굴 모습이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데 50이 넘었다고 한다. 분홍색 모자를 쓴 이 아주머니는 30년 동안 산을 다녔고 최근 10년 동안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산을 오른다’고 했다. 백두산은 열번이나 다녀왔다고아마추어 치고는 거의 산신 수준이다. 산에 다녀서 인지 얼굴에 주름도 없고, 몸에 군살도 없다. 산이 젊음도, 건강도 지켜주니 보약, 명약이 따로 없다. 사과와 녹차를 꺼내 놓길래 얼른 잘 먹었다고 인사를 하고 일어났다. 더 이상 앉아서 주절거리면 서로에게 실례다. 매사에 깔끔해야 한다.

 

절집 툇마루에 신발을 벗고 올라 앉아 자판기에서 뽑은 인스턴트 커피를 천천히 음미하며 마셨다. 자판기 커피를 좋아하진 않지만 오늘 만큼은 나쁘지 않다. 풍경에 취해 마시는데 무얼 마신들 좋지 않으리!

 

늘 마루 끝에 걸터 앉는데 한발 안쪽으로 들어와 벽에 기대니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 아름드리 기둥들이 든든하게 절 집 지붕을 떠받들고 있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과는 다른 모습이지만 한국의 자연에서 보고 느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두 개의 기둥사이로 바라보이는 지붕의 곡선과 푸른 숲은 고즈넉함이 느껴진다. 넉넉함도 있다. 멀리 아스라한 곳에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산들이 겹겹이 펼쳐진다. 마음 모습에 따라, 보는 위치에 따라 보이는 모습과 느낌이 다르다.

 

눈 앞에 가지만 앙상히 남은 고목이 세월의 무상함 말해준다. 아쉽게도 고목나무는 죽어 가지만 앙상하게 남았다. 푸른 이끼가 살 곳을 제공하고 있다. 나무 위에는 까치집이 덩그러니 얹혀있고. 산 비둘기 한 마리가 가지에 앉아 이쪽 저쪽 두리번거린다. 앙상한 가지에 앉은 산비둘기에서 외로움을 느낀다. 이 녀석은  오래 전에(태어날 때부터) 혼자 사는 기술을 터득했을 것이다.  

 

시간에 쫓기지 않으니 여유롭다. 한 주일 전만 해도 30도가 넘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는데 오늘 아침은 서늘한 바람에 추위마저 느껴진다. 갑자기 주위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제약회사에서 단체로 몰려온 떼거리들 때문이다. 사유의 즐거움을 한꺼번에 앗아가 버렸다. 사람들에겐 여유와 사색이 늘 부족하다.

 

길이 좀 험하긴 하지만 인적이라고는 없는  다소 생경한 길을 택하여 과천쪽으로 하산했다. 떨어지는 물소리가 아름다운 숲 속에 걸음을 멈추었다. 물 흐르는 소리,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가 귀를 즐겁게 한다. 눈으로 감상하는 즐거움도 크지만 귀, 즉 청각으로 즐기는 기쁨도 크다. 떨어진 도토리를 주워 껍질을 벗기고 하얀 속살을 씹어본다. 비릿하면서도 떫은 맛이다. 다람쥐가 좋아할 만 하다. 감각기관을 통하여 자연과의 합일을 경험한다. 삼십여분동안 지나는 사람이라고는 없다.  

 

<국기봉>

8월 22일. 국기봉 정상의 시원한 바람이 온 몸에 흐른 땀을 식혀준다. 어제 올랐던 연주대가 저 멀리 보이고 사계가 뚜렷하다. 사방에 높고 낮은 산들이 겹겹이 펼쳐져 있다. 아파트 단지와 빌딩이 구릉마다 빽빽이 들어서 있다. 숨이 막혀온다. 하지만 국기봉정상은 사람이 많지 않고 시원한 바람과 바위 그리고 푸르름만 있다.

 

정상의 바위틈사이로 나무들이 몇 그루 서있다. 식물의 생명력과 강인함을 인간들이 배워야 한다.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었다. 다녀온 코스는 서울대 입구-서울시계-국기봉-능선-제2광장-서울대 입구, 걸린 시간은 2시간 30분, 정상에서 사과 두개를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높은 곳에서 푸르름을 보며 웅비의 기상을 가슴에 담아 내려오다.

<2004/8/21-22이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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