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ition

팔공산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04. 8. 17. 17:51
       2004년 실질적인 여름휴가의 첫날. 팔공산에 오르기로 하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 가만이 않아 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르는 폭염 속에서 산을 오른다는 게 이상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산에서는 쉽게 더위를 잊을 수 있다. 산을 오를라치면 올라야 한다는 목표가 주어진다. 도달해야 할 정상이 새로운 목표가 되는 것이다. 목표를 향하여 한발한발 걸음을 옮기다 보면 더위는 저절로 잊혀진다.

 

폴 트루니에어떤 사람이 모험으로 뛰어들기로 작정하자마자, 그는 전에는 몰랐던 새 힘을 느끼게 되며, 이 힘이 그를 모든 당혹감에서 건져낸다. 모험에 이르는 길을 막는 것은 당혹감이지만, 이 당혹감을 쓸어 없애 버리는 것은 바로 모험인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모험으로 사는 인생 64page, 폴트루니에 저, 정동섭/박영민 옮김)

 

배낭 속에 두 권의 책(미셀트루니에의 짧은 글 긴 침묵, 최순우 선생의 나는 내것이 아름답다’) 과 친구가 직접 만든 카스테라를 넣었다. 물통에 얼음을 얼려 친구와 하나씩 나누어 들었다. 산을 오르는 중간중간 한 모금씩 마시는 물맛이 기가 막힌다. 꿀맛이다. 얼음이 서서히 녹아 한번에 많은 물을 마실 수가 없다. 타는 목을 추길 수 있을 정도의 물만 주어진다.

 

    산 중턱에 이르러 물 마시기를 중지했다. 정상에 오를 때까지 기쁨을 잠시 미루어두기로 했다. 정상에 가면 정상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만족과 기쁨이 있고, 이에 더하여 시원한 얼음물을 마실 수 있다. 정상에서의 기쁨이 배가 되는 것이다. 기대되는 기쁨이 더하므로 새 힘이 솟는다.

 

정상에 오르는 길은 험하다. 인생이 그렇듯이 산에도 깔딱고개(정상을 오르기 전 만나는 가파른 언덕)가 있다깔딱고개를 오를 때면 늘 숨이 차고 목이 마르다. 하지만 이 고개만 넘으면 정상이 있다

 

정상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 보는 기쁨, 그 절정! 시원한 얼음물 한 모금에 세상이 모두 내 것 같다. 친구가 시원한 맥주 한 캔을 사 주었다. 보통 때 같으면 터벅터벅하게 느껴질 카스테라 맛도 그만이다. 몸에서 빠져나간 칼로리를 당분이 보충해 주는듯 하다. 시원하게 목을 추길 수 있는 물도 있으니 금상첨화.

 

내려오는 길에 아늑한 휴식공간을 발견헀다. 맑은 물이 가득 고인 웅덩이가 있고 바위와 나무가 웅덩이를 둘러 쌌다. 여인의 자궁 같은 모습이다.(왠지 그렇게 느꼈다. 감각이 태아였을 때를 기억하는 걸까?) 먼저 자리를 잡았던 두 청년이 좋은 곳이니 쉬었다 가시라고 말을 건넨다. 자연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던 청년들이 자리를 뜨며 오이 하나를 건네준다. 한번 드셔보세요, 싱싱합니다. 요즈음 세상에 보기 드물게 마음이 따뜻한 청년들이다.

 

친구의 도움으로 등목을 했다. 오랜만에 해보는 등목. 등에 물을 끼얹으니 숨이 막혀온다. '어푸어푸'. 윗옷을 벗어 던진 채 평평한 바위에 몸을 뉘었다. 온 몸에 찬기운이 -악 퍼진다. 고목나무가지에서 뻗어나온 무성한 잎이 바람에 나부낀다. -아아, 쏴-아아. 나뭇잎 사이로 파아란 하늘, 하이얀 뭉게구름이 보인다. 차가운 기운만 없다면 더 누워있고 싶다.

 

       노오란 아카시아 이파리가 웅덩이를 떠다닌다. 일엽편주로 보인다.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고 미셀 트루니에짧은 글 긴 침묵을 읽었다. 다람쥐 한마리가 사람이 있는 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푸른 나뭇잎을 오물오물 갉아 먹는다. 

     <2004/8/12 이택희>

'Posit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에서 가져보는 상념  (0) 2004.08.25
마음 모습에 따라 보이는 모습이 다르다  (0) 2004.08.23
영천  (0) 2004.08.13
세계로 연결된 통로  (0) 2004.08.13
밭작물이 있는 길  (0) 2004.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