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고 싶은 이야기

시니어 대학 글쓰기 강좌 2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13. 4. 27. 21:48

  시니어 대학에서 글쓰기 반을 운영하며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참석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칠십이 넘으셨습니다. 올해 아흔이신 분도 계십니다. 연로하심에도 불구하고 삶의 열정을 불태우시는 큰 형님, 큰 누님들에게 작은 도움이나마 드릴 수 있다는 사실이 저를 행복하게 합니다. 이웃을 기쁘게 하는 일이 큰 보람임을 섬김을 통하여 깨닫습니다.

 

어르신들은 자신이 쓴 글을 읽으시며 눈시울을 붉히십니다. 울음을 멈추지 못 하시어 옆에 앉은 분이 대신 읽기도 합니다. 열심히 살아오셨다는 방증이자 그리움과 회한의 표출입니다. 어르신들의 삶을 읽고 들으며 옷깃을 여밉니다. 열심히 살아오신 세월 앞에 엄숙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글쓰기를 통하여 마음에 새겨진 아픔과 회한이 조금이나마 치유되고 해소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싹을 틔우기 위해 심은 방울 토마토와 비프 토마토(beef tomato)에서 싹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고추와 로즈메리, 파슬리, 호박은 감감무소식입니다. 싹을 틔운 어린 녀석들은 햇살 비치는 쪽으로 빼곡히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살아남겠다는 본능이 아닐까 싶습니다. 막 태어난 어린 강아지들처럼 귀엽습니다. 아직 싹을 틔우지 못하는 녀석들을 안타깝게 바라봅니다. 제가 무얼 잘못 심지는 않았나 조바심이 납니다. 아침저녁으로 다가가 바라만 봅니다.

 

어르신들께서 쓰신 글 몇 편을 올립니다.       

 

대목산아 잘 있느냐

고승만(1923년생)

강남 갔던 제비도 양춘가절(陽春佳節) 춘삼월이 되면 돌아와 자기 집을 찾는데 나는 어쩌다 실향민(失鄕民)이 되어, 가고 싶은 고향에도 못 가고 10년이면 강산(江山)도 변한다는데 고향 떠난 지 66. 강산도 일곱 번 변하였으면 아주 폐허가 되었을 거다.

자의(自意)로 고향을 떠났으면 모르지만 큰 권력(權力)에 못 이겨 추방당하여 실향하였으니 더욱 억울하고 고향이 그리워진다. 자식이 부모를 잘못 만나면 여러 모양으로 고생하고 국민은 통치자를 잘못 만나면 잘 못산다는 말이 옳은 말이다. 일제(日帝) 36년의 사슬에서 해방되어 온 국민이 기쁨으로 춤을 춘 것도 잠시 공산 독재자의 본을 받은 자는 그 이상이었다고 생각된다.

꿈에라도 우리 고향 대목산(大睦山)에 올라가 시가지를 한 번 내려다보고 서해를 봤으면 한()이 없겠다. 우리 고향은 원래(元來) 기독교 도시이고 일찍부터 선교사들이 와서 초급학교, 남자 중학교, 여자 중학교를 세우고 큰 종합병원도 세웠다. 그리고 양로원, 고아원도 세웠다. 교회로는 동 교회, 남 교회, 북 교회, 중앙 교회가 있었고 남 교회는 그 당시 한국에서 제일 큰 교회였다.

주일 날이면 가계(商店)를 철시하다시피 했다. 교육도시이면서 조용하고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 종교를 싫어하는 독재자는 기독교를 탄압하였고 5정보(町步) 이상 되는 지주(地主)는 전부 타지방으로 추방하였다. 추방당하여 타지방으로 가면 그곳에서도 살아남기 어려우니까 대부분 사람들은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도망 온 것이다. 갈 수 없는 고향이니까 더욱더 그리워진다.

우리 고향은 홍경래의 출생지이고 반정부 투쟁을 시작한 곳이다. 1600년 당시 유명한 방랑시인 김삿갓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홍경래에게 항복하여 역적으로 몰렸던 곳이다. 1600년대 초에 불운의 용장(勇將)으로 유명한 임경업 장군이 의주 부윤으로 계실 때 정묘년과 병자년에 오랑캐들이 쳐들어왔다. 백마산성(白馬山城)과 우리 고향 검산산성(劍山山城)을 연결하는 방위선을 공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장군은 모함으로 요절하였다. 용장도 때를 잘못 만나면 성공하지 못한다.

고향은 그저 그립다. 무슨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어린아이에게 고향이 왜 그리우냐고 물어봤더니 대답이 우리 고향에는 개천이 있는데 그곳에는 버들치(작은 물고기)가 놀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단다.

우리 고향은 대목산(大睦山) 주봉(主峯)으로 한 부드러운 야산을 주봉이 두 팔 벌려 시가지(市街地)를 감싸고 있는 분지(盆地)이다. 대목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시가 중심을 서(西)에서 동으로 관통(貫通)하여 남북으로 양분(兩分)된다.

대목산(해발 418미터)은 주민의 안식처였다. 봄철에는 산나물이 많았는데 싱아, 개싱아, 소리채가 그것이다. 싱아와 개싱아는 새콤달콤한 맛이 났고 소리채는 단맛이 났다. 이 셋은 어린이들이 즐기는 것이었다. 대목산은 봄 가을 학생들이 소풍을 가는 곳이기도 했다. 산 중턱에는 덕수라는 곳이 있었다. 인공(人工)으로 5.6미터 높이에서 물이 떨어지게 한 곳이다. 여름철이면 떨어지는 물을 맞으며 더위를 식혔다. 건강에도 좋다고 하여 어른들도 즐겨 이용하였다. 매미가 많아 매미 잡기도 재미있었다.

나로서는 초급학교 시절 학과나 운동에서 선생님들은 물론 학생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았다. 선생님들과 같이 야구를 하면서 야구천재라는 얘기도 들었다. 등하굣길에 하급생들을 만나면 고쇼망 고쇼망하고 따라붙는다. 이 말은 일본말로 고승만이라는 말이다.

초급학교 졸업하고 서울공업에 진학 1942 3월에 졸업하였다. 강원도 삼척 삼화리에 있는 삼화 철산에 취직하였다가 3개월 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사직한 이유는 일제(日帝) 말기라 하루 배급량이 두 합()반으로 배가 고파서 일할 수가 없어서다.

집에 돌아와서 약 일 개월 정도 휴식하고 아버지, 형님과 같이 형석(螢石)광산을 시작했다. 사업에 성공하여 재미를 많이 보았다. ()에서나 민간(民間) 모든 곳에서 인정해주니 행복하였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중국 단동에서 신의주 쪽 사진이 방영되었는데 마치 사막지대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신의주에서 남쪽으로 70km면 우리 고향인데 대목산을 비롯한 시가지가 황폐하지 않았나 염려스럽고 고향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오늘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하늘에서 내 마음을 알아주는 듯 온 종일 비만 내린다.

일제(日帝)가 망하고 해방될 줄은 아무도 몰랐는데 하나님께서 해방시켜 주신 것으로 믿는다. 알 수 없는 남북통행도 이루어 주실 줄 믿고 큰 희망을 가져본다.

 

 

보고 싶은 선생님

봉춘자(1940년생)

60년이 지난 지금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서 공부하던 때를 떠올린다. 나는 우리 집 맏딸로 남동생 둘과 여동생 둘인 5남매의 맏이였다.

해방 후 중국에서 양자강을 중심으로 북의 중공군과 남의 장개석 군과의 전쟁이 있었다. 아버지도 북군으로 전쟁에 참가하였다. 남과 북이 통일되었다. 아버지께서 집으로 돌아오신 후 상이군인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우리 집은 아이들이 어리고 일할 사람이 없어 매우 가난하였다. 학교에서는 짓궂은 친구들의 시기와 질투로 나를 괴롭히므로 항상 기를 못 펴고 수심에 잠기곤 하였다. 왕따 당하는 일이 생기면 학교 온실 안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울곤 하였다.

나는 우리 반에서 어문과 식물과 대표로 선생님의 일을 도왔다. 어문과 선생님은 50대였고 식물과 선생님은 30대 후반이셨다. 알게 모르게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다. 한번은 온실 구석에서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하시고 나의 고민을 어떻게 아시는지 조용히 부르셨다.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는 인생사에 대해 일깨워 주셨다. 네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너는 그만큼 작아진단다. 행복은 초라한 누더기를 입고 추운 벌판에서도 희망의 꽃을 피울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다. 힘들어도 참고 견디면 새날이 밝아 올 것이라 하시며 토닥거려 주셨다.

지금도 선생님의 그 말씀이 귓전에서 맴돈다. 힘들 때마다,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작아지지 않고 크게 되려고 내 힘껏 노력해왔다. 희로애락의 인생을 살아오다 보니 어느덧 칠십 고개를 넘었다.

1957년 고등학교 재학 당시 선생님께서는 중국 공산당 반 우파 투쟁이란 정치음모에 휩쓸렸다. 노동개조 대상으로 산골 벽촌으로 귀양살이를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을 듣고 학교 기숙사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선생님을 아는 신안초중에서 온 학생들은 모두가 넋이 나간 사람들처럼 멍해 있었다.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신 교훈들이 떠오른다, 대 자연 속의 식물의 성장, 인간의 도리, 육체노동이 인간을 고상하게 만드는 법, 가난이 정신세계를 굳세게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일을 싫어하는 것은 죄악이며 놀고먹는 자는 사기꾼이라 말씀하셨다.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충실히 해 나가는 사람은 길이 열리며 그것은 한 알의 씨앗이라 일러주셨다.

선생님께서 수년간 고생하시다 복직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신안초중에서 온 모든 친구는 환호하였다. 선생님은 아버지가 상이용사 증명서를 발급받는 일에도 도움을 주셨다. 내가 중앙정부에 보낸 편지로 사실이 밝혀지고, 선생님이 증명인으로 보증을 서 주셨다.

선생님 가르쳐 주신 말씀 하나하나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항상 마음에 남아 있었다. 선생님의 제자로 사회에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해왔다. 아이들에게도 선생님의 고마움과 선생님께서 남기신 교훈을 전해주고 싶다.

보고 싶은 선생님과 재회의 그날을 기다린다.

고마우신 선생님 부디 안녕하세요.”    

 

 

토끼 눈

윤석환

차창 넘어 이어는 굽이치는 푸른 강물 옆 때로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 같은 산에 연녹색 나뭇잎들이 수줍은 새색시처럼 고개를 내밀고 새로운 생을 속삭이는듯한 봄, 84년 경춘가도를 달리는 버스 속에서 철모르는 아내에게 나는 이렇게 속삭였다.

우리가 캐나다로 이민을 가면 비행기 자가용 날리며 식구들을 호강시키겠다고

그것이 내가 캐나다로 이민 오게 된 꿈 같은 희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81년 봄, 1개월간 토론토를 방문할 기회가 있어 동생이 운영하는 가게에 와보니 손님이 많아 10명씩 끊어 가게 안으로 입장시켜가며 하는 장사를 본 터라 나도 그렇게 되기라 믿었기 때문이다.

28년이 지난 지금 지나간 세월을 회상해보면 허황된 꿈은 하나도 이루어진 것이 없고 가슴 아린 쓰라린 기억만이 못난 나의 자화상을 만들어 지금도 나를 구천 지하로 끌어내린다.

이민 온 지 일 년 반이 지난 토론토의 85년 가을 어느 날 오후, 토끼 눈처럼 빨갛게 변해 집으로 돌아온 아내의 눈을 본 순간, 나의 마음은 쓰나미에 휩쓸려 내려가는 물결같이 마구 요동쳤다.

평생 처음 다녀본 귀걸이 생산공장의 첫 출근, 8시간 노동이 아내에겐 그처럼 중요했다고 이유를 묻는 나에게 대답했다. “잘릴까 봐.”

이민 오기 전 고국에선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으로 부족함이 없었고 무엇이든 다 잘하고, 알고, 의지할 수 있는 남편이었는데

더는 그렇게 못 함에 기죽어 있는 나에게 아내를 고생시키는 일은 그칠 줄 모른다. 그것이 나의 이민 역사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고생만큼 큰 축복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그렇듯이 고생을 통과해보지 못한 인생은 낙을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은 나에게 행복을 알게 하려고 고생이라는 이민을 허락하셨다고 오늘도 믿는다.

어떠한 섭섭한 말과 행동을 아내가 내게 하더라도 신뢰와 믿음으로 나를 택한 아내의 토끼 눈을 생각하면 내 마음은 스르르 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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