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고 싶은 이야기

본 시니어대학 2013년 봄학기를 끝내며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13. 6. 15. 03:29

   본 시니어 대학 2013년 봄학기 글쓰기 강좌가 끝이 났습니다. 4 11일부터 11주 동안의 과정이었습니다. 이론 강의와 예문 읽기, 각자 쓴 글 나누기 등의 시간으로 채워졌습니다.

   모든 분이 적극 수업에 임하셨습니다. 알고자 하는 열정이 대단하셨습니다. 학생이 선생에게 배운다기보다 선생이 학생분들께 배운 게 더 많습니다.

   수업을 끝내며 개인적으로 더 많이 배웠다고 말씀을 드리니 무슨 말을 그리하느냐며 황감해하십니다. 구십 세 할아버지, 칠십이 넘으신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부족한 사람을 선생으로 인정해주시니 한편 부끄럽고 한편 자랑스럽습니다.

   120명의 수강생 전체를 대상으로 한 문학특강 시간도 있었습니다. 매학기 문학특강 시간이 있었으면 한다는 건의도 주셨습니다. 어르신들께 작은 도움, 적은 기쁨이나마 드릴 수 있었던 건 큰 영광이자 보람이었습니다.

   글로 삶을 나누어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호국의 달을 맞아 김관수 어르신께서 쓰신 글을 올립니다.

 

 

내가 격은 6.25

 김관수

      6.25사변 63년째를 맞으면서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북한 인민군이 불법 남침을 해, 전쟁이 치열할 때 나는 후방에서 헌병으로 치안유지의 사명을 가지고 마산 통영에서 비교적 편안한 군 복무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군 복무를 끝냈다면 별로 기억할 만한 사건도 없었을 것인데, 52 3월에 전, 후방 교체라는 명목으로 전방 6사단으로 전속 명령을 받았다. 서울보충대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전속 받은 우리 5명이 춘천에 도착했는데, 포소리가 들려오기 시작을 했다.

    화천에 도착하니 포소리, 총소리가 더 요란하게 들려왔다. 군인들의 행동은 민첩했고, 공포 분위기였다. 6사단 본부는 화천에서도 걸어서 1시간 거리의 북쪽으로 백암산 밑이었다.

    오후 6시경에 사단본부에 도착하여 본부 중대장에게 전입신고를 하고 중대선임하사의 인도로 천막 침소에 배정을 받았다. 저녁 식사 후 침소에 돌아와 안전무장을 풀고, 편안하게 누울까 눈치를 보는데, 아니나다를까 선임하사가 나타나 '이 자식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완전무장을 해제하고 있느냐?'  라고 소리를 지른다.

    다시 완전무장을 하고 있자니 '하며, 왁자지껄한 소리에 놀라 있는데, 방공호로 대피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방공호가 어딘지 모르니 그저 선임자들을 좇아 정신없이 따라가다가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 간신히 방공호까지 가서야 소매가 피에 젖은 줄 알았고, 소지하고 있던 카빈총의 총대가 부러져 있었음을 알았다.

    새벽이 되어 후퇴명령이 내려져 10 Km 정도를 후퇴하고 보니 아군 포진지였다. 다시 부대 정비를 하고 이튿날부터 진격하여 3일 만에 전 진지까지 탈환하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에는 또 후퇴, 다시 전진, 그렇게 몇 번이고 반복하다 보니 그동안의 공포심은 사라지고 금방 죽을 줄 만 알았었는데, 살아있으니 전선에서 익숙한 군인이 된 것 같았다.

    선임자들이 그때야 말을 해 준다. 후방에서 전방으로 와서 죽지 않고 한 달만 버티면 산다고. 그러니까 후방에서 오는 병사들은 거의가 1개월 안에 전사를 한다는 통계라도 있는 듯 같이 전속 받았던 5명 중 3명은 그렇게 한 달 안에 전사했단다.

    처음에는 공포심으로 언제 죽을는지 모르고 전투생활을 했는데 시일이 지날수록 전투에 익숙해지고 마음에 여유마저 생기는 것 같았다. 늘 잠이 부족하여, 전진 또는 후퇴하는 행렬 속에서 걸으면서 2~3시간씩 자는 그때가 그래도 가장 편안하게 쉬는 때였다.

    매일의 전투는 치열하여 쌍방의 전사자는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는 중에 중공군 수십 명을 생포하기도 했는데, 20세 미만의 아이들이었고, 무기도 소지하지 않았으며, 군복도 남루하고, 영양실조의 모습이어서 참혹하기만 했다.

    그렇게 매일 전투를 하고 있는데, 휴전된다는 소문이 들렸다. 휴전이 되면 이제는 살 수 있겠구나! 기대하고 있는데, 후방에서는 휴전반대 데모를 연일 한다는 소문도 같이 들리니 야속한 생각마저 들었었다.

    소문대로 그 해 7 28일 자정을 기해 휴전이라며, 소지하고 있던 실탄을 전부 발사하라는 명령을 받아 밤12시까지 쌍방이 다 그렇게 쏘아 댔으니 그 당시의 광경은 볼만하였을 것이다.

    12시가 지나니 전선은 일시에 고요하여지고 적막감마저 찾아왔었다. 휴전선은 현 전선에서 쌍방이 2Km 완충지대로 설정하고 휴전 기간은 불투명하였다.

    이튿날이 되어 우리 헌병들에게 부여된 임무는 싸우다 희생된 전사된 동료를 찾아오라는 명령이었다. 우리 조원 4명이 2일간 찾아낸 숲 속에서 부패되어 있는 시체들, 북한강 상류에서 물에 떠 있는 시체 등 이삼십 시신을 사단 후방에 설치된 화장장까지 운반하는 일이었다.

    휴전 4일 후에 우리는 휴전선 분계 지점 16호 초소에 배치되었는데, 우리 초소 200m 전방에는 북한군 초소가 있는데, 중공군이 그곳에 있었다. 우리 초소는 평지에, 그쪽은 우리보다 언덕에 있어서 우리는 올려보고 그들은 내려다보는 위치여서 항상 불안하였다.

    휴전선 근무 시 12가지 규칙이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몇 가지는 총 발사 하지 마라, 가까이 가지 마라, 대화도 하지 마라, 그런 것이었다.

    처음에는 불안하고 서먹서먹하고 두려웠는데, 시일이 경과되면서 그들과 멀리서나마 표정으로 손짓으로 인사를 하면서 지내게 되었었다. 그래도 위치적으로 그들은 내려다보고, 우리는 올려다봐야 하기에 기분은 좋지 않았었다.

    휴전이 언제 끝날지 몰라서였던가? 생각지도 못했던 반가운 2주간의 휴가 명령을 받았다. 다시 못 볼 줄 알았던 고향, 그리고 식구들 휴전이 되어 2년 만에 만나게 된다니 감개무량하였다.

    내 고향, 강원도 원주군 귀래면 용암리에 닿아보니 동네 30여 집들이 하나도 남은 것이 없이 전소되어 있었다. 그래도 가족들이 피난길에서 돌아와 복구 작업들을 하고 있었다. 2주간 가족들을 도와 그 복구 일을 하고는 귀대하는 중에 급성맹장염에 걸려 춘천 야전병원에서 수술하고 검사결과 신장과 폐에 이상이 있어서 서울 수도 육군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고 1954 1 18일 자로 2 4개월의 군 복무를 하고 제대를 했다.

   휴전되어 내 목숨은 지금까지 살아 있지만, 60여 년이 되도록 남북통일이 되지 못하고 천만 명의 이산가족들의 슬픔과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같은 민족끼리 남북으로 대치되어 항시 불안한 상태로 있는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그때 휴전을 하지 말고 북진해서 통일을 이루었어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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