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맞아 디모데 시니어 대학과 본 시니어 대학 두 곳에서 글쓰기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디모데 시니어 대학의 글쓰기 반에 참여하시는 최고령자는 96세이시고 본 시니어 대학의 최고령자는 92세이시다. 이런 분들께 당신의 생각을 글로 옮길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일은 무척이나 보람된 일이다. 살아오신 삶의 이력들을 글로 써오실 때는 절로 머리가 숙어진다. 이분들 앞에서 신변잡기 운운하기란 낯부끄러운 일이다. 촘촘히 적은 글을 부끄러운 듯 꺼내 놓으실 때는 황송하기까지 하다.
삼 년여 글쓰기 강의를 진행해 오고 있다. 강좌에 참여한 이후로 우울증이 나았다고 하시는 분이 계신가 하면 부부관계가 좋아졌다고 하는 분도 계신다. 지난주 새로이 참여한 한 어르신은 이렇듯 좋은 강좌가 있는 줄 몰랐다시며 내년에도 계속하는지 물으신다. 크고 작은 삶의 굴곡을 견뎌낸 한 분 한 분이 내겐 어버이요 스승이시다. 한 학생(?)의 글을 올려둔다.
1950년 어느 초가을 날
정효기
전세는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쳐내려 왔다가 유엔군의 반격으로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되어 풍비박산된 인민군이 패잔병이 되어 북으로 가는 국도로 퇴각하는 상태였다.
두 외삼촌(당시 두 분은 중앙대학에 재학 중이었다)을 포함한 우리 가족은 남쪽으로 피난을 가지 못하였다. 당시 우리 가족은 초등학교 5학년과 4살 된 남동생 그리고 어머니였다.
아버님은 의사셨고 사정상 혼자 먼저 부산으로 가셨기에 결혼한 큰 외삼촌 내외와 5살 아들과 모두 7명이 친척의 권유로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에서 조금 떨어진 농촌 마을의 한 가옥을 빌려 피난하게 되었다. 국도가 지나고 그 옆으로는 시냇물이 흘렀다. 안으로 들어오면 농가 몇 채가 있었는데 그 농촌 마을에 우리 가족이 살았다.
두 삼촌은 집에서 오백 미터 떨어진 숲 속에 움막을 짓고 낮에는 거기서 공부도 하고 쉬다가 어떤 때는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오곤 했다. 그러다 만약 인민군에 잡히면 징병 불응자로 총살을 당할 수 있었기에 지극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오쯤이었을 것이다. 이웃집의 한 아이가 밖에서 “여기가 의사 집이에요.”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 뒤에는 인민군 몇 명이 따라오고 있었다. 집엔 두 삼촌이 막 식사를 끝낸 즈음이었다. 급한 나머지 어머니가 두 삼촌에게 얼른 벽장에 숨으라고 하셨다. 삼촌들을 피신시킨 후 밖으로 나가 5~6명의 부상한 인민군 병사들을 맞이했다. 그중 중대장급인 장교는 눈이 퉁퉁 부어 앞을 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장교는 마루에 걸터앉더니 “누가 의사요?”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의사는 아니고 간호전문학교를 나와서 응급조치는 할 수 있어요. 약은 없으나 도울 방법이 있으니 우선 마루에 누워보세요.”라고 대답하셨다.
그때 두 삼촌은 벽장 속에서 밖에서 하는 소리를 모두 듣고 공포에 떨며 숨어있었다. 문제는 철모르는 네다섯 살짜리 아이들이었다. 헛소리를 할까 봐 숙모는 황급히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당시 나는 사리를 분별할 나이가 된 지라 숨을 들이켜며 그 상황을 낱낱이 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찬 샘물을 떠다가 소금을 조금 넣어 저은 후 장교의 눈에 조금씩 부으며 닦아 내렸다. “아이고 더 쑤시고 아파요.” 장교는 마다하지는 않았지만, 통증을 호소했다. 어머니는 급성 안질로 우선 병균을 세척하는 중이니 조금 있으면 좋아질 것이라고 했다. 그 와중에 무릎을 다친 병사에게 빨간 약을 바르고, 옆구리에 총상을 입은 환자, 손과 머리에 찰과상을 입은 환자를 치료해 주셨다. 종합병원 응급실 역할을 한 셈이었다.
지옥 같은 공포의 시간이 약 다섯 시간이나 지났다. 장교의 부은 눈은 가라앉았고 병사들에겐 찐 감자로 허기도 달래 주었다. 장교는 부하들에게 말했다. “야, 이젠 살 것 같으니 모두 출발해서 고향으로 가자.”
떠나면서 어머니에게 몇 번이고 감사의 표시를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목에 매인 스카프를 어머니에게 풀어주며 내 군번이 박힌 것이니 혹시 뒤에 어떤 군인들이 해하려 하면 이 목도리를 보여주며 사정해 보라고 하였다. 장교만 사용하는 스카프였다. 대여섯 명의 인민군들은 집을 나서 총총히 북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벽장에 숨었던 두 삼촌이 나오는데 보니 바지가 흥건히 젖어있었다. 민망해하는 두 삼촌에게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이젠 살았다. 그까짓 오줌 싼 것이 대수냐 정말 하나님이 우릴 살려주셨다.” 철모르는 동생과 조카는 “군인들 갔어?”라고 말하며 좋다고 했다.
허공을 외치는 매미가 힘차게 맴맴 울어대고, 가을 하늘은 드높고, 벼는 누렇게 익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6.25 전쟁통 기억속에 저장된 한 토막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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