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셀러니

2019 봄학기 본 시니어대학 글쓰기 강좌 6 (5월 23일)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19. 5. 23. 22:04

<<2019 봄학기 본 시니어대학 글쓰기 강좌 6>>

 

<불러도 대답이 없네/고승만(1923~)>

 

우리 임 고영혜가

하늘나라로 간 지

14개월 12일이 됬네

 

마냥 불러도 대답이 없지 

꿈에라도 한 번만

나타나 줬으면

 

2월이 다가고 3월이라네

강남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

이땅에도 봄이 온다네

 

우리 고향에서 제비가

돌아오는 날은

삼월삼짓날이라고 하는데

 

우리 임은 삼월삼짓날

하늘나라로 갔으니

봄이 올 리가 없네

 

집 앞 늙은 나무도 봄이 왔다고

새옷을 입고 있는데

나에게도 봄이 와야 하는데

추운 겨울 날씨네

 

 우리 임은 목사님의 4 3녀 중 위로 오빠 한 명이고 둘째로 장녀로 출생하고 대학은 보육과를 하고 독일 여선교사에게 한국말을 가르치고 교회에서 어깨 너머로 피아노를 배웠다.

 나는 독신주의자였는데 1960년 친척의 소개로 어머니께서 정해준 상대여서 1960 12 23일에 결혼하였다. 나는 국영기업체에서 소비조합을 운영하고 57 70일을 같이 생활하면서 정직하고 거짓말은 피차 한 번도 하지 않고 살았다. 바람도 우리 몸을 스쳐가면 소리가 나는데 둘이서 생활하면서 소리 내 본 기억은 안난다.

 삼 녀 일 남을 두고 맏딸은 자기가 못한 피아노를 어릴 때부터 가르쳐서 고 3때는 콩쿠르에서 입항하고 대학은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교회음악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서울에서 음학학원을 운영하고 모 교회에서 반주를 하고 있다.

 1991년 이곳 캐나다로 이민와서 착실하게 살고 우리 임은 감기 한 번 앓지않고 생활하였다. 안타깝게도 2016 1 5일 아침부터 갑작스럽게 말을 못하여 구급차로 병원에 갔다. 병원에서 요양원으로 보내 한 달 정도 있다가 퇴원하였는데 말은 여전히 못하고 다른 이상은 없었다.

 나도 우리 임의 수족노릇을 하며 필담(筆談)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2년 정도 지냈는데 2018 1 18일 저녁 8시경 갑자기 이상해져서 그급차로 병원으로 실려가 입원을 했는데 뇌졸증이라 눈 한 번 떠보지 못하고 내가 눈꺼풀을 벌려주어야 주변을 살피곤 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2018 3 3일 새벽 4~5시 사이에 하늘나라로 갔다.

 모든 절차를 잘 마무리하고 지금은 딸이 어머니 보고 싶다고 나와 같이 찍은 사진 다섯 장을 거실 벽에 붙여놓고 항상 마주보고 있다. 처음 몇달 동안은 매일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지금도 사진을 바라보며 하루에도 몇번씩 보고 싶다. 왜 먼저갔느냐고 물으며 나 좀 데리고 가 달라고 하며 눈물을 찔끔거린다. 86세에 별세했으니 살만큼 살았는데도 2년동안 말 한마디 못하고 얼마나 답답했겠나 싶다.  

 동정심 불쌍한 마음에 가슴이 아파서 눈물을 흘리다 친구겸 내자로서 둘이서만 살았는데 나를 두고 갔으니 가슴이 아프다. 앞 아파트 옥상에 비둘기들이 사이좋게 노는 것을 보면서 나는 비둘기만도 못한가 생각한다.

 교회의 나보다 젊은 친구들과 매주 금요일마다 모임을 가졌는데 이 친구들도 우리 내자의 죽음과 전후하여 다 하늘나라로 갔다. 33년생 김장로, 32년생 우리 내자, 31년생 김집사, 30년생 김후배가 차례로 갔다.

 늙을 수록 부부가 동반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는지 나 자신이 문제다. 이 순간도 가신 임 보고 싶다. 또 찔금 눈물이 난다.

 

    

나이드는 가치

봉춘자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현재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 가치 있는 삶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를 사는 삶이다. 내가 있는 곳에서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충실하고 일관성 있게 일하며 사는 삶이다. 과거에 얽매어 끊임없이 고통받고 두려워하며 온갖 스트레스를 앓고 부질없는 후회와 걱정으로 시간을 허비할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사는 누군가의 가슴 속에 의미 있는 존재로 기억되어야 가치 있는 삶이 될 것이다.

 세상 속에 사는 인간 삶이 층층만층 구만층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삶이 부단히 변화되는 것은 사실이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존경을 받아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존경할 수 있다. 나이가 들수록 내가 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사람들이 나를 기억해 주었으면 하고 생각하게 된다. 누구에게 무엇이 되고자 한다면 그 누군가의 존재부터 인정하고 그로부터 배울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학교에서는 학생이 교사에게 배우지만 사회생활에서는 교사가 학생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

 자녀는 부모에게 배우는 것이 마땅하지만 때로는 부모도 세대차이를 인정하고 자식에게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정치인들도 국민에게 배울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하물며 나이 먹어가는 우리가 나보다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고, 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라고 그들로부터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또 내 마음에 안 든다고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거나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면 많은 것을 놓치고 살아갈 것이다. 선입견이나 편견 때문에 삶의 방향과 가치를 잃게 되면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단다.

 인생을 가치 있게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어야 한다. 아픈 사람에게는 치유가 되어야 하고 사랑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감동이 되어야 한다. 가치 있는 인생은 누군가에게 또 다른 가치를 만들어 준다. 우리가 나이를 먹고 온갖 경험을 쌓았다 해도 여전히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호기심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며 혼자 있어도 무료하지 않고, 가족과 떨어져 있어도 외롭지 않은, 시간과 공간을 배우고자는 하나의 마음으로 누구에게든 배울 수 있어야 하겠다.

 배워서 얻은 지혜와 재능을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씀으로써 신으로부터 받은 지혜와 재능의 선물이 빛나게, 유용하게 쓰이면 좋겠다. 이렇게 이웃을 위해, 사회를 위해,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반듯이 거창한 것이 아니다. 미미한 일이라도 아주 먼 미래에 그 성과를 나타낼 수 있다면 후세에 사회발전에 밑거름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의미와 가치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나이를 먹었다고 뒷짐지고 수수방관할 것이 아니다. 서로가 의지하며 사는 세상에서 티끌만한 우리의 힘이 우주를 움직이는 에너지 속의 동력이 될 수 있다. 용기를 가지고 즐거운 마음으로, 맑은 영혼의 건강한 몸으로, 가치 있게 나이를 먹으며, 인생의 황혼길을 한걸음 한 걸음 걸어가야겠다.



 

이순섭

모든 인생은 가정에서 태어나 가정에서 생을 마치게 된다. 그 안에서 많은 희로애락을 겪으며 생로병사를 맞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최초로 에덴 동산에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며 만물을 다스리라는 축복과 함께 그들에게 가정이라는 선물을 안겨주셨다. 그들로 하여금 가정의 시작이요 인류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

가정이란 가족이 있어야 한 공동체로 형성이 된다. 식구가 없는 곳에는 가정이라고 할 수가 없다. 한 가정이 기초가 되어 사회가 이루어지고 가정이 오밀조밀 모여서 한 국가를 이루게 되고 인류가 어루러지게 된다.

한 생명이 가정 안에서 탄생되고 부모와 함께 사랑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나서 성년이 되면 하나님과 이웃의 축복 속에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떠나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또 다른 독립된 한 가정을 이루게 된다. 그 가정 안에서 또 생육하고 번성하여 그 가문의 조상이 된다. 이 땅에서 생을 마치는 그 순간에도 영원한 나라에서 복된 삶을 영원히 누리라는 가족의 환송을 받으며 육은 흙으로 돌아간다.

나에게도 부모님의 사랑과 축복 속에 탄생과 더불어 가정이라는 보금자리를 주셨다. 그 속에서 형제들과 어울려 부모의 돌봄을 받고 한 인격체로, 어른으로 성숙케 되었다. 혼기가 차서 행불행을 점칠 수 없는 앞날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달콤한 꿈을 안고 한편으로는 모험과 같은 상황속으로 얼떨결에, 그렇게 부모형제를 떠나 두 사람으로 시작되는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만물의 순리를 따라 축복 속에 두 아들을 주셔서 오붓한 가정을 이루었다. 남편의 아내로 아이들의 엄마라는 책임과 의무를 안고 남편을 어떻게 내조해야 하는지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아무런 지식도 배움도 없이 남들이 사는 모습과 같이 하나 하나 배우고 익혀갔다. 끈끈한 혈연관계를 이루어 가며 세월의 흐름을 타고 가정이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 배워가며 아내의 의무, 부모의 의무라는 굴레 속에 한 가정의 역사를 이루며 성숙되어가고 있었다. 

세상은 고해라고 했던가. 호사다마는 성스러워야 하고 행복해야만 할 우리 가정에도 어두운 그림자는 비켜지나가지 않았다. 소리없이 닥친 불운은 경제적인 압박과 질고로 흠집을 내고 고통의 잔을 마시게 했다. 인간은 힘들고 어려울수록 좌절하지 않고 안간힘을 써서라도 이겨내는 저력을 본능적으로 타고나는 것일까. 어디서 힘과 용기가 생겨났는지. 이겨내기 위해서는 정신적으로 강해질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기에 기도로 힘을 얻어야 했다.

나이와 함꼐 세월의 줄을 타고 중년을 거쳐 노년까지 흘러왔다. 지나온 80년이라는 긴 세월을 돌이켜보면 행복했었다고 느꼈던 시간들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기억에 남는 것이 없고 힘들고 어려웠던 일들은 긴 시간과 함께 쌓이고 쌓여 얼룩진 모습으로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반면 아이들을 키우는 과정에서 기쁜 일도 있었고 보람도 느끼면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고 꿈과 희망을 갖게 했었다. 내 가정에 빛으로 힘든 일도 잊어버리게 하고 보람을 느끼게 하는 큰 선물이었다. 이러한 가족이 없었다면,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의 삶이 없었다면 얼마나 삭막하고 무겁고 괴로운 삶을 살았을까.

내 생명이 잉태된 곳, 어린 시절의 가정이 시작된 곳, 내 인격이 형성된 곳, 부모 형제 친구 친척들이 어울려 살았던 내 터전,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 습관과 문화와 정에 길들여진 내 고향, 내 조국을 등지고 이민이라는 큰 모험을 떠나려했던 그 용기는 어디서 생겨났을까. 새로운 땅 넓고 광활한 땅 평화스럽고 생활이 보장된 캐나다라는 생소한 곳에 둥지를 틀고 행복해지리라는 핑크 빛 꿈을 안고 조국을 등지고 비행기를 탔었다.

한편으로는 언어와 문화가 다르고 풍속이 다른 동족이 아닌 낳설은 다민족 속에 섞여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생활 수단은 무엇으로 삼고 의식주 해결을 어떻게 할 것인가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가나안 땅을 향해 갈대아우르를 떠났던 것은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했기 때문이다. 그 아브라함의 심정으로 기도하면서 이것이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라고 믿고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 것을 믿고 바라보며 떠났던 이민이었다. 나의 남은 반생을 맡기고 행복을 꿈꾸며 떠났던 그 길이 오늘까지 이어지게 된 시작이었다.

아무도 아는 이 없는 이곳, 먼저 정착한 피붙이 아들 가정 하나만 믿고 의지하며 낯설고 물설은 캐나다 이국 땅을 제 이의 고향으로 삼고 서서히 이민 생활에 익숙해가며 오늘까지 잘 적응하며 평안히 살고 있는 것이 너무너무 감사할 뿐이다.

수십년 동안 가정이라는 작은 공동체 속에서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함께 겪으며 의지하며 고락을 같이 했던 남편이 먼저 떠나가고 홀로되었으나 외로움을 느낄 사이도 없이 아들 가족이 한가족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고 한편 고맙기고 하고 말년의 내 삶에 도우미로, 사랑의 제공자로, 삶의 걸음걸이마다 동행자로 버팀목으로 기쁨과 위로가 되고 자랑거리가 되고 힘이 되고 감사의 조건이 되고있다.

자식이 있어 울타리가 든든하다. 두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각자 주어진 환경에서 가정을 잘 꾸려가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면 고마울 뿐이다. 성심으로 효성을 보여주니 흐믓하고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가정은 참으로 에너지와 행복의 원천이요 근원이 된다. 만나면 반갑고 헤어지면 그리웁고 만남의 관계속에서 정은 깊어지고 서로 위로와 격려와 배려로 이해와 양보로 격이 가까와지고 감사와 사랑이 묻어난다. 가정 안에서 생명이 태어나 육체와 정신이 성숙하고 지혜와 교육이 있고 가풍을 배우고 거기에 길들여지고 사랑과 정성의 식탁에서 성장과 건강이 채워지고 사랑과 희생을 배우고 각종 문화를 배우며 선악을 가릴 줄 알게 되고 삶의 모습을 본받고 가족애의 끈끈한 정 속에서 부모와 형제의 끊을 수 없는 튼튼힌 끈으로 엮이어 따뜻한 보금자리를 이루고 사회성을 배우고 국가관을 배우고 성장하여 사회의 일원으로 값어치 있는 삶을 살게 되고 이웃들과 어우러져 한 인간의 가치를 발휘하게 된다.

한편 부정적인 일도 모든 가정에 없을 수가 없다. 긍정적이고 따뜻했던 모습이 부정적인 상황으로 바뀌어 욕심으로 이기적인 모습으로 변하고 오해와 미움이 싹 트고 사랑과 이해와 배려가 없으므로 아름답게 꽃 피우고 행복해야 할 가정이 깨어져 불행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려운 상황를 지혜롭게 대처하고 이해와 사랑으로 똘똘 뭉칠수 있는 길은 각자의 이기심을 버리고 배려와 희생만이 뜨거운 사랑으로 서로 감싸안으므로 즐거운 가정, 감사가 넘치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될 것이다.

가정에는 용서와 이해와 사랑이 근본이 되야 한다. 부모는 자식이 큰 죄를 지었어도 남이 가질 수 없는 사랑과 용서의 힘이 있다. 목숨이라도 내어줄 수 있는 위대한 사랑의 용기가 있다. 모든 것이 피로 나눈 사랑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정에는 세상적인 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엄격한 규칙이 지켜지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부모의 사랑을 먹고 자란 자식이 또 부모가 되고 그 길을 따라가고 그 자식이 그 대를 물려가며 대대손손 그렇게 가정을 이어간다. 끊어지지 않고 가정은 영원히 이어져 갈 것이다.

가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부모로부터 대대로 물려 받은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가정이든 남다른 그 가정만의 고유한 유산이 있다. 길이길이 지속되어야 할 전통적인 대물림이 있다. 대대로 물려주어야 하는 긍정적인 아름다운 내력이 있는 반면 따르지 않아야 할 부정적인 대물림도 있다. 유산이라는 것은 재산, 외모, 심성, 식성, 생활습관, 재능, 지혜 등 많은 것이 있지만 우리 기독교적인 입장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신앙의 유산이다. 모태로부터 기도와 영감으로 물려받는 신앙도 있고 후천적으로 독실한 신앙의 부모님의 싱앙생활을 보면서 느끼며 배우며 물려받는 신앙도 있다. 남과 같이 약삭바르지 못하지만 온유하고 정직하고 모나지 않고 양순한 성품 성격을 받고 태어나 그 밑에서 보고 듣고 가풍을 배우고 자란 것이 사랑스럽고 감사한 것이다. 그리고 신앙적인 환경에서 성숙한 것이 자랑스럽기도 하다.

내 후손에게는 내가 받은 긍정적인 유산과 함께 신앙의 유산을 나보다 더 훌륭한 유산으로 물려주고 싶다. 생활로 보여주는 모범을 보여 배우게 하고 항상 두 아들의 가정과 가족을 위해 기도하므로 그들에게 좋은 부모로 기억되고 대대로 믿음을 이어 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충성하며 훌륭한 사회인으로 또 그들의 후손에게 자손만대 이어지기를 항상 기도한다.   

 


어머니

이신희

 어머니 날을 맞아 교회에서, 집에서 온통 어머니 날 행사로 떠들썩하다. 어린이들은 어머니들을 위한 노래로 어머니들의 노고를 위로한다고 애를 쓴다. 과연 어머니의 사랑을 표현할 말이 있을까? 어렸을 때는 어려서, 크면 커서 어머니와 자식간의 관계는 말로 표현할 단어를 찾기 쉽지 않다.

 저의 어머님은 작년 2월에 99세로 세상을 뜨셨다. 고향은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나 딸 넷 아들 하나, 딸 부자집 세 째 딸로 태어나 부친 이창수 장로 그분은 착실한 기독교인이며 교육도 제데로 받은 분이셔서 자녀들도 모두 전문학교 이상으로 키우셔서 여자들이면서도 각 분야에서 사회에 공헌하는 자랑스러운 일꾼들로 우뚝 우뚝 섰다.

 우리 어머니는 피아노 반주자로, 유치원 선생, 막둥이 삼촌은 역시 학교 선생으로 그렇게 열심히 사서던 어머니는 서울로 내려오셔서 교회 반주, 피아노 선생으로 살아오시면서 역시 슬하에 딸 넷 아들 둘을 두시고 자녀들 뒷바라지 하면서도 늘 명랑한 성격 때문에 늘 우리 집엔 엄마 친구들로 시끌버끌! 우리 형제들은 한구석에서 입 꽉 다물로 있어야 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어머님 여자 형제 네 명 중 남한으로 오신 분은 우리 어머님 한 분, 늘 언니 동생 숙희 이모를 생각하며 눈물 짓던 어머니의 모습. 막둥이 이운필 삼촌은 국민학교 교장을 오랫동안 하시다 다시 가족 외할머니까지 모시고 브라질로 이민, 북한에서 다시 6.25 시태를 일으킬까봐 두려워 떠났다. 그후 나는 외할머니를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캐나다 이민 온 후에 LA에서 이운필 삼촌이 병이 들어 병원 입원했을 때 본인이 마지막외할머니는 브라질에서 돌아가셨다.

 


노병께 드리는 경례

閑素

 열아홉 나이에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한 젊은이는 일주일간의 짧은 훈련을 받았다. 교육을 받던 중 총기오발 사고로 죽어나가는 동료 학도병을 보면서 전장이 어떤 곳일지 짐작할 수 있었다.

 훈련을 마친 후 북한군으로부터 노획한 총과 배낭 등 장비와 인민군복을 지급받았다. 적의 후방에 침투하므로 인민군으로 위장하려는 의도였다.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포항 위쪽 영덕지역으로 침투하여 적진을 교란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작전을 수행을 위해 상륙지점으로 항해하던 배는 강구 인근 장사 앞바다에서 암초에 부딪히며 좌초했다. 특수요원들이 육지와 상륙함 사이에 밧줄을 연결하였다. 미리 포진한 인민군들은 육지로 상륙하는 아군을 향해 미친 듯이 총을 쏘아댔다. 전투기들은 고도를 낮추어 적진을 향하여 폭격을 하고 바다에서는 함포 사격으로 적의 공격을 누그러뜨렸다.

  처음으로 전장을 경험하는 어린 유격대원은 배에서 뛰어내리기를 주저하였다. 총탄이 빗발치는 곳을 바라보니 두려움이 앞섰다. 대대장은 권총을 쏘아대며 배에서 내리지 않으면 사살하겠노라고 소리를 질렀다. 눈을 꾹 감고 바다로 뛰어내렸다. 배와 육지 사이에 연결된 밧줄에 의지해 육지로 향했다.

 적들이 쏘아대는 총알이 '슈웅쑤융' 소리를 내며 물거품을 일으켰다. 총에 맞은 전우들이 물 위로 떠올랐다. 하지만 정신을 놓을 겨를이 없었다. 사력을 다해 육지에 올라 길게 이어진 모래사장에 엎드렸다. 피를 흘리며 나뒹구는 전우도 보였다. 돌격 앞으로라는 명령에 따라 앞에 보이는 산을 향해 냅다 뛰었다.

 대원들은 산속에 집결하여 전열을 정비하였다. 많은 수의 전우들이 죽어갔지만 산 사람은 계속 싸워야만 했다. 육지에 상륙한 후 엿새 동안 적군과 대치했다. 비가 끊임없이 내려 군복이 홀딱 젖은 채 긴 시간을 견뎌야 할 때면 바지를 입은채 오줌을 쌌고 잠시나마 따뜻한 체온을 즐길 수 있었다.

 일주일 후 유격대원들을 태우러 새로운 상륙함이 도착했다. 미군은 들고 있는 총과 배낭 등 장비를 던져 버리고 알몸으로 바다에 뛰어들라 했다. 아까운 마음에 버리기를 주저하자 개머리판을 휘두르며 버리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장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머뭇거리는 사이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생명을 귀히 여기는 그들이 우러러 보였다. 사력을 다해 헤엄쳐 배에 올랐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목숨을 부지한 전우들은 육군본부가 있는 부산으로 귀환하였다. 부산항에는 수많은 시민이 모여 살아 돌아온 이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신문은 적 후방을 교란하고 보급로를 차단하는 등 적의 전의를 상실케 하였다며  호외도 뿌려댔다. 장사상륙작전은 곧바로 이어진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도 영향을 주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날 설레는 마음 때문에 잠을 설치는 건 어린 시절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건 내일 있을 가족 여행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길지도 않은 단 하루의 휴가. 어디로 가겠느냐는 물음에 부친은 망설임 없이 바다로 가자고 하셨다. 매년 여름이면 바닷물에 몸을 담그며 더위를 잊곤 했는데 지난 두 해 동안은 바다에 다녀오지 못해 아쉬우셨단다.

 어쩌면 6.25동란 때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죽을 고비를 넘겼던 장사상륙작전의 현장을 가고 싶은 마음이 더 많으셨는지도 모르겠다. 목숨을 걸고 싸웠던 장소에서 자신이 경험한 전쟁과 조국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말해주고 싶으셨으리라.

 출발부터 아이처럼 들뜬 기분을 숨기지 않으신다. 대구 포항 간 고속도로를 타고 포항에서 내려 칠 번 국도를 타고 영덕 방향으로 올라가니 바다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본격적인 피서철을 맞지 않아서인지 해수욕장은 조용한 편이다. 해송 군락이 지나가는 여행객을 반갑게 맞아준다. 외로움을 이기려 서로 마주 보며 바다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나 보다.

 장사해수욕장에 도착하자 무엇인가 할 일이 있는 사람처럼 바쁘게 걸으신다. 장사상륙작전 전몰용사 위령탑 앞에 서셨다. 말없이 주위를 한 바퀴 도신다. 전장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한 친구들을 생각하셨을까. 죽을 고비를 넘기며 지켜온 조국의 안녕을 비셨을까.

 사선을 넘나들던 당시의 기억을 되새기는 듯 눈빛이 흐려있다. 반려자와 함께 장사상륙작전 전승 기념비에 새겨진 글씨를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가는 노병의 모습을 보니 속에서 뜨거운 무엇이 울컥 솟아오른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하루가 노병에겐 작은 선물이 될지도 모르겠다. 피와 땀으로 지켜낸 조국이 건재하고 자녀들이 장성하여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책임과 역할을 다하고 있는 지금 더 바랄 게 무엇이랴.

 

지난 두 해 동안 힘든 병마와 싸워 이기고 병석에서 일어난 후 유명을 달리한 친구와 전우들의 혼이 깃든 이곳을 다시 와보고 싶으셨으리라. 어느새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물속으로 첨벙 뛰어드는 노병의 등 뒤로 거수경례를 올린다.

 

 

옹기들의 숨결

송복련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미자루 나도 몰래 내던지고꽃은 마구 피는데 처녀들 마음도 마냥 싱숭생숭할 수 밖에. 져 나르던 물동이와 밭 매던 호미자루마저 팽개치고 싶은 봄날이다. 노래 가사의 일부이지만 물동이는 생활에 요긴한 물건이었다. 예전, 여자 애들은 물동이를 이는 법을 일찌감치 터득해서 똬리에 얹은 물동이를 손으로 잡지 않고서도 기막히게 잘 걸었다. 아낙네쯤 되면 양손에 아이 손을 잡고 보퉁이까지 들고 갈 만큼 숙달되었다.

 옹기 사는 곳이나 시대에 따라 모양이나 이름이 다채롭다. 독이나 항아리 단지로 불릴 때는 크기가 다르고 유약을 바르지 않거나 잿물을 입힌 것이 있나 하면 소주를 만드는 소줏고리, 구명이 숭숭 뚫린 시루와 물을 이고 다니는 동이와 그를 담아두는 물두멍, 찌개를 긇이면 뚝배기, 똥장군 같은 구린내를 풍기는 이름까지 있으니, 모두가 훍에서 태어난 것이다. 주로 그릇으로 쓰던 옹기는 사람들과 함께 숨쉬며 그 곁에서 오래전부터 머물렀다.

 시어머니가 처음 우리 집에 오신 날 장터에서 독 세 개를 사 들여 놓으셨다. 윤기가 반지르르한 그것들을 보고 있으면 갖출 것들을 다 갖춘 듯 집안이 꽉 찼다. 정월 말일 날에 물어물어 소금의 농도를 맞추어 처음으로 장을 담그던 날의 자랑이 가물거린다. 살림 맛을 알아가며 올망졸망 늘어가던 옹기들은 햇볕과 바람과 소통하며 숙성시킨 양념들은 살림솜씨와 함께 풍성하게 익어갔다. 늦가을 화단 한 쪽에 묻어둔 독에서 꺼내 먹던 김장김치의 쨍한 맛은 이제 기억 속에 저장되어 그때의 김치 맛을 따라갈 수 없다. 아파트로 이사 다니며 떠나보낸 것들 가운데 빈 고추장 항아리만 이제 쓸쓸하게 베란다를 지킨다.

 내 곁에서 멀어진 옹기를 생각하며 이포리 옹기가마를 찾았다. 경사진 언덕으로 통가마가 길게 자리한 곳에는 옹기들이 차곡차곡 들어차고 있었다. 곁에는 장작들이 비닐을 쓰고 불 지필 날을 기다렸다. 작업장으로 드니 옹기 장인이 우릴 반긴다. 아들과 손자들이 연신 물레를 돌리며 옹기 만드는 과정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가래떡 같은 흙을 쌓으며 발로 물레를 돌린 다음 도개를 사용해 안팎에서 드두렸다. 한쪽에는 날 옹기들이 말라가고 있었다. 예전 방식 그대로 만드는 옹기장은 6대째 가업을 이어온 기능보유자이다. 아제는 아들 손자 3대가 한 마음으로 옛것을 지키며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가마에 불이 지피는 날 꼭 다시 찾아보리리라. 흙에서 아농 것들이 1200도의 장작불로 단련되어 새롭게 태어나는 걸 보고 싶다. 젊은 날의 혹독한 시련 끝에 철이 드는 것처럼 옹기들은 제자리를 잡고 앉아 바깥 세계와 소통하는 단단한 물건이 되리라.

 어린 서절 술래잡기를 할 때 숨어들던 장독 옆에는 석류가 익어가고 대추알이 단지 뚜껑 위로 굴렀다. 어둑한 부엌 한 귀퉁이 물독에는 물바가지가 떠 있었는데 엎어진 바가지를 장난삼아 두드리면 장단이 흘러나왔다. 원주민들이 타악기를 두드리던 손놀림마냥 장단이 척척 맞으면 듣기 좋은 음악이 되었다. 옹기들이 키를 맞추며 나란히 줄을 섰던 장독대에 빈 독도 있었다. 머리를 박고 소리를 내면 우렁우렁 울리는 소리에 재미를 느껴보았으리라. 큰길가 술 어매가 술독을 휘저어 바가지로 퍼주던 시큼털털한 막걸리를 주전자에 받아오던 날의 술맛을 떠올리게 한다.

 독은 먹고 사는데 요긴했건만 옹기장이는 그다지 대접받지 못하고 그 무게만큼이나 삶이 버거웠다. 그러고도 그 일을 대물림하여 가난하게 살아가니 오죽 힘에 겨웠을까. 독이 만들어질 때까지 흙을 만지는 일이나 불을 때서 구워내는 과정들이 만만많았고 팔기 위해 지게에 지고 장터로 향하는 흰 바지저고리 차림의 구부러진 허리가 애잔하다. 머리 위까지 솟은 독은 자주 팔리는 물건이 아니라 팔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은 풀린 다리에 안간힘을 써야 했다.

 황순원의 소설을 읽은 탓인지 항아리 대신에 독이라고 말할 때는 독짓는 늙은이라는 말이 따라 나온다. 송 영감이 일곱 살 당손이를 남의 집으로 떠나보내고 옹기가마로 기어드는 모습은 처절했다. 견딜 수 없이 뜨거운 곳으로 무엇인가를 찾아 들어가던 그 곁앙으로 새어드는 햇빛 속에서 찾아낸 것은 터져나간 독 조각들이었다. 우릎을 꿇고 앉아 자기가 독을 대신이라도 하듯이 깨진 독 조각 앞에 단정히 꿇어앉는다. 자신을 소신공양하려는지 깨진 독과 생의 마지막을 함께한 이 작품은 슬픈 여운으로 남아 있다.

 단단해 보이는 옹기들도 마지막에는 흙으로 돌아간다. 사람들과 함께 자연으로 돌아가는 이 소박한 도구들이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소중한 보물을 잃어버리는 것이라 못내 아쉽다. 편리함만 고집하다 스스로 숨 막히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옹기를 다시 돌아보게 되리라. 친환경이라는 말이 자주 들리고는 있지만 잃어가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게 아닌가. 옹기들의 숨결이 그리워지는 시간이다.   

 

 수목원의 아이들

곽흥렬

 따사로온 기운이 목덜미를 간지럽힌다. “봄이다!”하고 나직이 읊조려 본다. 얼마나 손가락을 꼽아가며 기다리고 기다려온 시절이던가. 불과 한 주 전까지만 해도 한자나 되는 폭설에 놀라 오던 봄이 도로 달아나 버렸나 싶었다. 오늘 아침, 창가에 내리는 아지랑이가 마음을 마당으로 불러낸다. 겨우내 묵어서 찌든 일상의 먼지도 털어내고 무료한 시간도 달랠 겸 대구수목원을 찾았다. 오후의 금빛 햇살을 받은 꽃과 나무들이 일제히 기지개를 켜며 다시 맞은 희망의 계절을 환호한다. 올망졸망 늘어선 꽃나무들에게 하나하나 차례로 눈맞춤을 하며 인사를 건넨다. 그들도 마치 기다리고라도 있었다는 듯 해맑은 얼굴로 알은체를 해 온다. 그렇게 오랜만의 한유한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때였다. 지도교사의 인솔 아래 여기저기서 노랑병아리 떼가 우르르 모여들었다. 조용하던 수목원이 갑자기 아이들의 재잘거림으로 왁자그르르하다. 수십 명씩 무리를 지어 놀이에 정신이 빠졌다. 숨바꼭질을 하는 아이들도 있고 보물찾기를 하는 아이들도 보인다.

 그 광경에 유심히 눈길을 주고 있노로니 어째 마음 한구석이 거북살스러워 온다. 숨바꼭질이며 보물찾기 따위의 놀이를 위해서라면 굳이 수목원까지 와야 할 이유가 뭐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이다. 이런 교육 활동들은 그저 근처의 공터나 쌈지공원 같은 데서도 얼마든지 이러어질 수 있을 것 아닌가.

 아이들은 밀물처럼 몰려와 주변을 한바탕 요란스럽게 흔들어 놓고는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들이 떠난 뒤 나는 수목원의 존재 이유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에 잠겨들었다. 굳이 적잖은 비용을 들여가면서 수목원을 만들고 가꾸는 목적이 무엇일까. 이곳을 찾는 사람들, 특히 자라나는 세대에게 꽃과 나무의 생태를 알게 함으로써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주기 위한 체험학습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함이 아니겠는가. 거기다 생명 존중의 심성을 갖게 되는 것은 덤으로 길러지는 무형의 수확일 터이다.

 한참 동안 장의자에 앉아 불편해진 심사를 추스르고 있으려니 어디선가 손에 손에 스케치북을 든 한 무리의 병아리들이 다시 나타났다. 선생님이 따스한 사랑 담긴 목소리로 아이들을 불러 모은다.

 ! 얘들아, 우리 지금부터 스케치북에 내가 좋아하는 꽃나무 그림을 그리고 그 밑에다 자기 생각을 한번 달아보자.”

 인솔 교사의 유도에 아이들은 일제히 !”하면서 목소리를 높인다. 그 대답의 함성이 부푼 풍선처럼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잠시 후, 이들은 팝콘 튀듯 산지사방으로 흩어져서는 제각기 그리기에 여념이 없다. 꽃을 그리는 아이도 있고 나무를 그리는 아이도 있다. 개중엔 두 가지 다 담는 아이도 눈에 뜨인다. 식물 한 번 쳐다보고 도화지 한 번 바라보고 식물 한 번 쳐다보고 도화지 한 번 바라보고, 그리기에 정신을 쏟는 아이들의 표정이 진지하다. 고사리 손으로 크레파스를 옴켜쥐고 삐뚤뺴뚤 열심히 도화지의 여백을 채워 나가는 모습에 천진난만함이 묻어난다.

 아까의 광경과 지금의 광경을 견주어 보면서 다시금 생각에 잠긴다. 목표는 같지만 얻어가는 것은 전혀 다르지 않겠는가. 아이들은 아직 스스로 알아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인지 능력을 지니지 못했다. 그저 교사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무조건 따를 뿐이다. 지혜로운 교사냐 그렇지 못한 교사냐에 따라 처음엔 똑같은 바탕의 이이들일지라도 결과로 나타나는 심성은 크게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그것은 백지에 무엇을 그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탈무드의 한 구절에 새삼 고갯방아가 찧어진다. 백지처럼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어린 영혼들을 바람직스러운 길로 이끌어 줄 책임은 순전히 어른인 교사에게 지워진 몫이 아닐까. 가르친다고 해서 다 같이 가르치는 것은 아님을 수목원 나들이에서 똑똑히 보았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요즈음도 이따금씩 수목원을 찾는 날이면 그 때의 풍경이 선연히 되살아나곤 한다. 그러면서 내 기억은 오래도록 가슴속 깊숙이에 남아 결결이 내 가르침의 자세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귀한 경험이 되었다.

 

 

<호수/정지용>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수 밖에

 

 

<내게 이야기하기/이어령>

 

너무 잘하려 하지 말라 하네

이미 살고 있음이 이긴 것이므로

너무 슬퍼하지 말라 하네

삶은 슬픔도 아름다운 기억으로 돌려주므로

너무 고집부리지 말라 하네

사람의 마음과 생각은 늘 변하는 것이므로

너무 욕심부리지 말라 하네

사람이 살아가는데 그다지 많은 것이 필요치 않으므로

너무 연연해 하지 말라 하네

죽을 것 같던 사람이 간 자리에도 또 소중한 사람이 오므로

너무 미안해 하지 말라 하네

우리 모두는 누구나 실수하는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너무 뒤돌아보지 말라 하네

지나간 날보다 앞으로 살날이 더 의미 있으므로

너무 받으려 하지 말라 하네

살다보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기쁘므로

너무 조급해 하지 말라 하네

천천히 가도 얼마든지 먼저 도착할 수 있으므로

죽도록 온 존재로 사랑하라 하네

우리가 세상에 온 이유는 사랑하기 위함이므로

향나무는 자기를 찍은 도끼에도 향을 묻힌다네요

“내가 모르고 있을

진짜 소중한 것!

 

 

<만들수만 있다면/도종환>

 

만들 수만 있다면

아름다운 기억만을 만들며 삽시다

남길 수만 있다면

부끄럽지 않은 기억만을 남기며 삽시다

 

가슴에 성에 낀 듯 시리고 외로웠던 뒤에도

당신은 차고 깨끗했습니다

무참히 짓밟히고 으깨어진 뒤에도

당신은 오히려 당당했습니다

사나운 바람 속에서 풀잎처럼 쓰러졌다가도

우두둑 우두둑 다시 일어섰습니다

 

꽃 피던 시절의 짧은 기쁨보다

꽃 지고 서리 내린 뒤의 오랜 황량함 속에서

당신과 나는 가만히 손을 잡고 마주서서

적막한 한세상을 살았습니다

돌아서 뉘우치지 맙시다

밤이 가고 새벽이 온 뒤에도 후회하지 맙시다

 

만들 수만 있다면

아름다운 기억만을 만들며 삽시다

 

 

<추상적 표현과 구체적 그림으로 보여주기>

 

 가난하고 어린 명상에게 쌀은 동나도 별은 동나지 않았다. 봄이면 산에 들에 별꽃이 피고 여름에는 개울가에 물장구소리가 반짝반짝 부서졌다. 개똥벌레와 놀다가 사립문 안으로 들어설 때 마당에서 모깃불이 타닥타닥 잔별을 튀겼다. 고봉밥 한 그릇 똑딱 비우고 멍석자리에 누우면 하늘에서 별들이 쏟아졌다.(/김이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