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봄학기 본 시니어대학 글쓰기 강좌 5>
어머니와 귤
이어령
수술을 받기 위해서 어머니는 서울로 가셨다. 이른바 대동아 전쟁이 한창 고비였던 때라 마취제도 변변히 없는 가운데 수술을 받으셨다고 한다.
그런 경황에서도 어머니는 나에게 예쁜 필통과 귤을 보내주셨다. 필통은 입원 전에 손수 사신 것이지만, 귤은 병문안 온 손님들이 어렵게 구해 가져온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귀한 것이라고 머리맡에 놓고 보시다가 끝내 잡숫지 않으시고 나에게 보내주신 것이다.
그 노란귤과 함께 어머니는 하얀 상자속의 유골로 돌아오셨다. 물론 그 귤은 어머니도 나도 누구도 먹을 수 없는 열매였다. 그것은 먹는 열매가 아니다. 그 둥근 열매는 사랑의 태양이었고 그리움의 달이었다. 그 향기로운 몇 알의 귤은 어머니와 함께 묻혀졌다.
서울로 떠나시던 마지막 날, 어머니는 나보고 다리를 주물러 달라고 하셨다. 열 한 살이었으니까 이젠 어머니의 다리를 주무를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성장한 것이다. 정말 다리가 아프셔서 그러셨는지, 혹은 막내라고 늘 걸려하셨는데 그 만큼 자란 것을 확인하고 싶으셔서 그러셨는지, 혹은 내손을 가까이 느끼며 마지막 작별을 하려고 하신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다리를 주물러 달라고 하셨다.
왜 그랬던가. 나는 어머니에게 숙제를 해야 한다고 꾀를 부리고는 제대로 다리를 주물러 드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셨다. 나는 어머니의 신병이 무엇인지 잘 몰랐던 것이다. 그것이 정말 마지막인지 몰랐던 것이다.
나는 더러 산소에 갈 때 귤을 산다. 홍동백서에는 지정되어있지 않은 색깔이지만 제상에다가 귤을 고인다.
그리고 귤을 살 때마다 나는 귤 값이 너무 싼 것에 대해서 절망을 한다. 분노를 한다. 어머니가 머리맡에 놓고 가신 그 귤은 지폐 몇 장으로는 살 수 있는 그런 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 이제 어디가 그 귤을 구할 것이며, 내 이제 어디가 어머니의 다리를 주물러드릴 수 있을까?
어머니의 강아지와 아버지의 밤배
정호경
초등학교 때를 제외한 중고 시절을 비롯해 대학을 마칠 때까지 객지에서의 하숙생활 때문에 나는 부모님과 함께 따뜻한 정을 나누며 한 지붕 아래서 살아본 적이 별로 없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자 결혼을 해서 결혼 후에는 직장 관계로 다른 지방으로 멀리 떨어져나가 생활을 해야 했으므로 그로부터 시작한 객지생활 때문에 평생 부모님과는 한집에서 생활할 기회가 없어서 부모님의 정과 사랑의 품이라면, 초등학교 때의 어린 시절과 결혼 직전의 한동안이 아니었던가 싶다.
나는 경남 하동군 진교면의 조그만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그때는 일제 때여서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해방이 되었다. 그래서 내 어린 시절의 생활이란 우리 동네 꼬마들이거나 혹은 이웃의 일본인 내 또래 꼬마들과의 생활이 전부여서 일본사람들과의 접촉에서 생긴,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더러 있었다. 우리 집 바로 곁에 일본인 소유의 가지, 오이 밭이 있었다. 이것들은 우리가 맨입으로 먹기 좋은 것들이어서 밤이 되면, 우리 동네 꼬마들의 단골 습격 장소였으나 그것도 너무 잦아 흥이 나지 않아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모험을 찾아 어느 가을 저녁 무렵에 이웃의 꼬마 친구와 함께 일본인의 감나무 밭 울타리를 넘어 들어가 단감을 서너 개씩 따가지고 호주머니에 넣어 나오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그 바짝 마른 일본인 주인할머니가 울타리 밖에 와서 버티고 서 있지 않은가. 나는 놀라 그 자리에서 감을 냅다 던져버리고 그 길로 집 앞 논길을 따라 한없이 도망갔지만, 내 친구 꼬마 녀석은 그 일본인 주인할머니한테 그 자리에서 붙들려 도망친 놈은 누구냐고 물었던지 바로 앞의 우리 집을 홀랑 불어버린 것이다. 도망친 지 한두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겁에 질린 공포감을 안고 조심조심 집에 들어가니 이미 아버지는 회초리를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저녁에 나는, 어머니가 아침마다 우리 집 꼬마들의 점심도시락 반찬을 만들기 위해 다듬잇돌 위에 올려놓은 명태처럼 아비지 앞에 엎드려 장단지가 터지도록 두들겨 맞았다. 나의 아버지는 그 당시 이 마을의 유지였기 때문에 일본인 할머니에게서 체면 손상을 당했다는 것이 화가 난 이유였다. 그 뒷날 아침 나는 아버지한테 오늘 학교 미술시간에 쓸 도화지 살 돈을 얻어야 하는데, 무서워서 옆에 가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닷새 만에 돌아오는 시골 오일장날이면, 큰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으로 나간다. 한두 시간 뒤에 집으로 돌아오는 어머니의 장바구니 속에는 파릇한 산채를 비롯하여 싱싱한 가지며 호박 고구마줄기 깻잎 그리고 낙지 바지락 등이 가득 담겨 있었는데, 어떤 때는 주먹만한 복슬강아지도 이런 반찬거리들의 한 쪽에 웅크린 채 엎드려 있었다. 나는 개가 아닌 강아지를 좋아한다고 가끔 씩 사서 어머니의 장바구니에 담아오곤 했는데, 강아지가 자라서 짖는 소리가 커지면, 그만 이웃집에 줘버리고는 다시 새 강아지를 사오곤 하던 어머니였다. 그건 그렇다 치고 어머니가 사다준 강아지는 어렸을 적부터 동구밖 붕어낚시터로 가는, 내 유일한 길동무였으니 지금 나의 이 보잘 것 없는 서정수필이나마 쓸 수 있도록 문학적 정서를 길러준 것은 어머니의 장바구니에 담겨온 강아지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연유로 하여 나는 지금도 어머니의 정이 깃든 내 고향의 복슬강아지를 생각하고 또한 그런 향토적 정서가 담긴 한국문학 작품, 예컨데 김유정의 ‘동백꽃’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오영수의 ‘남이와 엿장수’등의 단편소설을 지금도 생각이 나면 다시 찾아 읽곤 한다.
나의 아버지는 장사를 해서 돈 버는 데만 열중할 뿐, 가정교육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며, 번번이 외지에 출장을 가야 했기 때문에 며칠이고 아버지의 얼굴을 못 볼 때도 있었다. 아버지는 장사에는 머리 회전이 빨랐으며, 그에 따라 포부도 커서 해방 직후에는 좀 더 큰 상업도시로 옮아갈 준비가 다 돼 있었는데도 부득이한 사정으로 그만 방향을 돌리게 된 곳이 다른 아닌 순천을 거친 여수이니 사람의 야릇한 운명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때는 6.25동란 직후여서 병역문제가 혼란스러워 2개월 만에 한 번씩은 소집영장이 집으로 날아들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경찰서에 가서 대학생 신분증을 내보이고는 간신히 풀려나오곤 했다. 그런데 나중에는 학생신분증만으로는 통하지 않고, 병역연기신청서에 대학재학증명서를 첨부하여 경찰서 병사계에 제출해야 했다. 어느 날 또 집으로 날아든 나의 입영통지서를 받은 아버지는 수시로 당하는 일이었지만, 마음이 불안했던지 부산 서대신동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서울에서 내려온 우리의 천막촌 피난대학으로 찾아와서 구내방송을 통해 나를 찾았다. 나는 깜짝 놀라 당장 사무처로 달려갔더니 아버지가 피곤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사무처 직원은 국장님이 출장 중이어서 중요서류상자 안에 들어있는 대학교 직인을 꺼낼 수가 없으며, 오늘은 토요일이니 다음 주 월요일에 다시 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아버지의 표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이 여유롭게 구수한 옛날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아버지의 그 옛날이야기를 한참 듣고 있던 사무처 직원은 그만 감동을 했는지 벌떡 일어나 도구 상자를 뒤적이더니 찾아낸 망치와 펜치로 서류상자의 자물쇠를 뜯어 네모로 된 대학교 직인을 내 재학증명서에 쿵 찍어 아버지에게 건넸다. 아버지의 저 능란하고 구수한 화술에 우리는 평소 수없이 들은 이야기이지만, 사무처 직원은 처음이니 그만 꼴딱 넘어가고 말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나는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얼른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버지와 나는 여객선 터미널에 가서 여수행 밤배에 올랐다. 저녁밥 때는 조금 일렀지만, 배에서 파는, 뜨끈한 해장국을 사서 함께 나누어 먹었다. 아버지와 단 둘이 머리를 맞대고 엎드려 코를 훌쩍이며 밥을 먹기는 난생 처음이다. 뱃머리 쪽에서 뱃고동이 길게 울리더니 여수까지 어두운 밤을 네 시간이나 걸리는 밤배는 쿵쿵쿵 엔진 소리를 내며 선창을 빠져나갔다. 아버지는 당일 왕복하는 뱃길이 피곤했던지 삼등 선실 벽에 비스듬히 기댄 채 졸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그 지쳐서 조는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선실 밖으로 나와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가을 밤하늘의 달빛이 환했다. 밤배의 뱃머리에 부딪쳐 부서지는 파도는 초가을의 밤하늘에 싸라기처럼 하얗게 부서져 날리고 있었다.
옛 은사를 생각함
고승만
무궁화 3,000리, 총 길이 1,200km 나 될 작은 땅덩어리에서 그나마 허리가 타의에 의해 잘렸지만 언젠가는 우리의 힘으로 연결 될 것을 믿는다.
일제 강점 시에도 우리 반도는 물론 어디든지 여행 할 수 있었는데 우리의 땅에 가고 싶은데 못 가는 신세 이것은 이북에 고향을 둔 실향민 아니고는 그 고통을 모를 것 같다. 그중에 절실한 사람 중 한 사람이 바로 나다.
많은 선생님을 모시고 존경했지만 그중에서도 김용식 선생님을 더 존경한다. 선생님께서는 수재들만 입학할 수 있는 경성 사범(서울) 연습과 졸업을 하신 분으로 인격적으로도 고결하시고 말씀도 잘하시고 운동 특히 연식정구를 잘하셨다. 그 선생님 사랑을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은 바로 이 사람이 아닌가 싶다.
어느 날 수업 시간 중, “운동 잘하는 사람 공부 잘 못 한다는 말은 잘못 생각한 말이다. 선생님과 저기 승민이를 보라.” 갑자기 선생님이 왜 저러시나 이상히 생각했다. 선생님은 숙제를 내주시거나 공부하라는 말씀 한번 안 하시고 스스로 공부하게끔 하신다. 한번은 나를 시험해 보시느라고 그리하셨는지 일본어 시간에 갑자기 발효(醱酵)의 뜻이 무엇이냐고 질문하기로 대답했다.
다음 해 3월에 관립 경성 공업학교 광산과(官立 京城 工業學校 鑛山科)에 입학 원서를 내시면서 사무실로 오라고 하셔서 선생님 앞에 갔더니, 소견표를 보여 주시는데 그 중 한마디 ‘사려 깊다’만 생각난다. 이런 일은 전무후무한 일이고 그만큼 믿고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결국 합격하고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총독부에서 지정한 직장에서 약 2개월 근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선친과 두 형님과 형석광(螢石鑛)을 2년 정도 하여 재미를 봤다.
그동안 미국 B 29 비행기는 자기 집 안방 드나들 듯하고 일본은 완전히 제공권을 상실하고 일본 해군 사령관인 야마모토 이소로구 대장이 전사했다. 일본 해군은 전멸한 것이니 패망할 날도 며칠 남지 않았다고 느꼈다.
나는 우리 광맥도 끊어지고 패자의 발악도 있을지 몰라 50km 정도 떨어진 구성군에 있는 일본 미쯔이회사에서 삼성광산 선광장에서 잡부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44년 9월~10월 두 달 동안 했는데 선광장 책임자인 일본 사람 요시다 과장이 11월에 희천 명달 광산 선광장 설비를 철거하여 희천역으로 운반하는 일이 있으니 같이 가자고 해서 같이 가기로 했는데 조선사람 상대할 일이 많으니까 통역 겸 비서 역할을 시키려고 같이 가자고 한 것 같았다.
이 당시 트럭이나 버스는 전부 목탄(木炭)차였다. 우리도 트럭 세 대가 가게 되니까 목탄문제가 여간 아니었다. 마침 그때 희천군 시학관으로 김용식 선생님이 계셔서 과장과 동행 선생님을 찾아뵙고 도와주실 것을 부탁했다. 힘 닫는 데까지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선생님께 보답은 못하고 받기만 해서 지금도 송구스러운 마음뿐이다. 3개월간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서도 인사도 못 드리고 온 것이 지금도 후회스럽다. 회사에 돌아와서 그동안 수고 많이 했다고 표창장도 받았는데 이것도 선생님 덕분으로 생각했다.
더욱이 스승의 날을 보내면서 후회만 남고 선생님 생각이 간절하다. 타계하신 지가 상당히 오래되었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진심으로 명복을 빌 뿐이다.
선생님의 손
閑素
고등학생 시절 유난히 선생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딱히 사고를 쳐서 문제라기보다 해야 할 공부는 하지 않고 허공만 바라보며 공상에 잠기는 학생이었다.
교과서나 참고서를 읽는 데 집중해야 할 시간에 실존문학 작가에 빠져 그들의 저서만 손에 들고 있었다. 각종 운동경기는 다 보아야 했고 운동장에 나가 공을 차며 놀기에 바빴다.
선생님은 무척 엄격하셨다. 더러는 좋은 말로 충고도 하셨지만 때로는 사정없이 매질도 하셨다. 엉덩이나 손바닥에 불이 나도록 맞아도 그때뿐이었다. 혼자만 그런 게 아니라고 오죽잖게 위안도 했다. 성실하게 할 일을 꾸준히 하는 모범생이 더 많았음에도 말이다.
버스를 타고 단체 여행을 하게 되었다. 마침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공교롭게도 빈자리에 선생님께서 앉으셨다. 여행을 망쳤구나 싶었다.
학생과장을 겸하셨던 선생님께서 옆자리에 앉으셨으니 여간 긴장되는 게 아니었다.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왜 그리 속만 썩이느냐는 책망이 있으리라 짐작했다.
예상과는 다르게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침묵 속의 긴장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얼마나 지속되었을까? 선생님은 가만히 자신의 오른손을 뻗어 나의 왼손을 꼭 잡으셨다. 한참을 그렇게 계셨다.
선생님의 따뜻한 손길은 '너를 사랑하고 인정한다'는 무언(無言)의 표시로 여겨졌다. 손을 잡은 채 “아버님 어머님은 잘 계시느냐?”고 물으셨다. 얼굴 한 번 뵌 적이 없는 부모님의 안부를 묻는 선생님의 물음은 '네게 늘 관심을 두고 있다'는 말씀으로 들렸다.
그날 나는 왜 그렇게 기뻤는지 모른다. 하늘은 더 푸르렀고 나뭇가지에 촘촘히 달린 잎은 다른 날에 비교되지 않을 만큼 싱싱하였다. 여행 내내 들뜬 마음 감출 길 없었다. 이후 선생님께서 담당하였던 국어 과목은 다른 과목의 교과서보다 더 잘 읽혔던 것 같다.
그날의 손 잡음은 백번의 매질이나 천 번의 잔소리보다 더 가치가 있는 사랑의 충고였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것도 당시 국어 과목을 담당하셨던 선생님의 따뜻한 손길 덕분일 지도 모를 일이다.
울타리
봉춘자
내가 처음 본 울타리는 1945년 해방을 맞던 4월 어느 날인 것 같다. 다섯 살 어린 소녀의 나이에 부모님을 따라 이사 온 곳은 외할아버지가 계신 신안진이란 곳이었다. 당시 어머님의 간질병 증세가 너무 심하여 어머님의 소원대로 외가동네로 이사 오게 되었다. 외할머니댁 집 벽을 사이에 둔 집에는 나와 동갑내기 옥금이가 살고 있었다.
집 주위로는 큰 울타리가 둘러싸여 있어 옥금이를 만나려면 불편하였다. 그래도 나와 옥금이는 어느 사이에 좋은 친구가 되어 함께 놀곤하였는데 엄마 없는 옥금이는 웃음도 적고 조용했다.
그때 나는 아프신 엄마라도 우리 형제들을 돌보고 매일 함께 있어주시는 것에 감사했다.
어느 날 버들로 엮어 만든 울타리 한쪽이 비스듬히 넘어져 있어서 그쪽 집을 쉽게 드나들 수 있었는데 그 울타리는 도둑을 막기 위한 것보다 닭이나 개들이 채소밭을 못 쓰게 할까 봐 세워둔 울타리라고 하였다.
우리 집이 신안진으로 이사를 온 지 어느덧 두 달이 넘는 무더운 여름철이 되었다. 울타리 밑에 심어 놓은 꽃들이 누가 먼저 필세라 울긋불긋 꽃 몽우리를 틔우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봉선화가 방긋방긋 웃으며 피어나고 접시꽃, 백일홍, 코스모스가 차례로 피었다. 앞마당 백양나무 가지에 앉아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소리와 아름다운 꽃들이 조화를 이루어 정원은 더욱 빛났다.
어느 무더운 저녁 해는 이미 서산을 넘어 보이지 않았으나 붉게 물든 서쪽 하늘의 노을빛이 아름다웠다. 넋을 잃고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부르는 쪽으로 달려가며 기울어져 있는 울타리를 뛰어넘는데 정이 많고 부지런한 옥금이 언니가 “넘어질라 조심해야지.” 하며 나를 맞아주었다.
그 언니는 옥금이와 내게 봉선화 물을 들여주려고 나를 부른 것이었다. 우리 둘은 얌전히 앉아 언니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 언니는 봉선화 꽃을 이겨서 우리의 손톱에 올려놓고 낡은 천 조각으로 잘 싸매면서 “빠지면 안 돼 조심해”라고 하였다. 나는 그것이 떨어져 나올까 걱정이 되어 밤잠도 설치었다. 다음 날 아침 옥금이와 나는 빨갛게 물든 손톱이 하도 예뻐 손뼉을 치며 좋아하였다.
그렇게 지내는 사이에 옥금이도 웃음을 되찾았고 어머님의 병환도 좋아지셨다. 우리 집은 외가를 떠나 이사를 해야 했으므로 옥금이와 나는 이별을 맞게 되었다.
그 후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직장에 다니던 외삼촌께서 여름휴가 차 오셨는데 떠나던 날 편지 봉투를 주면서 옥금이 언니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하셨다. 아마도 그 편지는 연서가 아니었을까. 일 년이 지나 그들은 결혼하였고 옥금이 언니는 나의 외숙모가 되었다.
또다시 세월이 흘러 옥금이도 결혼을 하여 남편을 따라갔으며 나도 아이들의 엄마가 되었다. 이렇게 흘러가는 세월 속에 아이들도 결혼하고 나는 손자 손녀를 둔 할머니가 되어버렸다.
울타리 사이로 드나들던 내가 황혼 길에 들어섰고 황혼이 노을빛을 지나 어둠이 스며들고 있다. 하지만 나는 주눅이 들지 않을 터이다. 이제부터 시작이라 믿으며 이웃을 위해 작은 도움의 손길이라도 내미는 삶을 살리라 다짐해본다.
옥금이와 만나 지나간 어린 시절의 추억을 꽃피울 날이 속히 오기를 소망한다.
어느 봄날
이신희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던 오늘이었던가. 후배들이 보낸 소식에 이미 마음은 한껏 부풀었는데 아침에 눈을 뜨니 하늘이 맑다. 옷을 이것 입었다 벗었다 한참 뒤적거리다 노란 도꾸리 파란 자켓 그리고 또 연한 연두색 모자 달린 비옷같은 겉옷을 걸치고 초록색 끈달린 가방을 어깨에 매고 선글라스까지 챙겨 가방에 넣고 가벼운 마음으로 더퍼린 지하철(dufferin subway)역으로 춤추듯 달려갔다.
그런데 이 전차가 두 번씩이나 멈추면서 십 분씩 늦어 목적지에 닫았을 때 나의 동창 희숙이와 경애는 보이지 않는다. 불야 불야 하이파크, 이곳저곳 피크닉 에리어(picnic area)를 기웃거렸으나 우리 친구 경애와 희숙이는 찾을 수가 없다. 한 시간 찾다가 지쳐서 다시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마음은 바람 빠진 풍선으로, 쭈그러지고 찢어진 풍선-바람 빠진 찢어진 고무 조각-되어 한숨만 길게 나온다.
2019-05-14
<시골 국민학교를 추억함/유하>
내 가슴엔 아직도 사루비아의 달콤함이 살고
여선생님 하얀 치아의 눈부심과 새 수련장
빠알간 색연필로 쓴 참 잘했어요가 산다
희말라야시다 오동나무 가지 사이로
놀러 온 햇볕도 다람쥐도 찌르레기도
어린 풍금 소리에 맞춰
가슴에 달린 손수건처럼 마음을 펄럭이던
그래 생명의 모든 국민학교가 거기 있었지
아직도 내 입 안에 사는
철수와 영희, 아련하게 바둑이를 부르며
둥글게 둥글게
그 착한 영혼의 이름들로 충만한 운동장
아, 다시 가고 싶어라
환한 금빛
모래알의 은하수
<수양버들/이순섭>
봄 날씨 답지않은 쌀쌀한 4월 아침
옷깃을 여미고 아침 운동을 한다
날마다 걷는 익숙한 산책길
오늘은 더 발걸음이 가볍다
겨울 같은 날씨에도 봄을 알리는 수양버들
수줍어 고개 숙인 봄처녀를 닮았는가
풀어 늘어뜨린 윤기나는 머리카락 연상케 한다
옛날 어린 시절 물먹은 가지 꺾어 피리 만들어
삐 삐 삐… 서툰 멜로디에 마주보며 미소짓던
동심의 세계로 아련하게 빠져든다
흰 서리 머리에 이고 지척지척 느린 걸음
노인들의 가슴에도 봄을 맞는 벅참 가득
수십번째 봄맞이에도 희망의 꿈을 꾼다
그 무엇에도 질세라 앞장 서는 수양버들
짙어지는 색깔로 물들어 가면
굳게 닫히었던 내 가슴에도 새로 오는 봄을 맞는다
<봄꽃을 보니/김시천>
봄꽃을 보니
그리운 사람 더욱 그립습니다
이 봄엔 나도
내 마음 무거운 빗장을 풀고
봄꽃처럼 그리운 가슴 맑게 씻어서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서고 싶습니다
조금은 수줍은 듯 어색한 미소도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피었다 지고 싶습니다
<봄 안부/강인호>
당신 없이도 또 봄날이어서
살구꽃 분홍빛 저리 환합니다
언젠가 당신에게 찾아갔을
분홍빛 오늘은 내 가슴에 듭니다
머잖아 저 분홍빛 차차 엷여져서는
어느날 푸른빛 속으로 사라지겠지요
당신 가슴속에 스며들었을 내 추억도
이제 다 스러지고 말았을지도 모르는데
살구꽃 환한 나무 아래서 당신 생각입니다
앞으로 몇 번이나 저 분홍빛이 그대와 나
우리의 가슴속에 찾아와 머물다 갈런지요
잘 지내주어요
더 이상 내가 그대 안의 분홍빛 아니어도
그대의 봄 아름답기를
<그대 앞에 봄이 있다/김종해>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봄날, 사랑의 기도/안도현>
봄이 오기 전에는 그렇게도 봄을 기다렸으나
정작 봄이 와도 저는 봄을 맞지 못했습니다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당신을 사랑하게 해 주소서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로 해서
이 세상 전체가 따뜻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갓 태어난 아가의 응아, 하는 울음소리로
엄마에게 신호를 보내듯
내 입 밖으로 나오는 사랑해요, 라는 말이
당신에게 닿게 하소서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남의 허물을 함부로 가리키던 손바닥과
남의 멱살을 무턱대고 잡던 손바닥을 부끄럽게 하소서
남을 위해 한번도 열려본 적이 없는 지갑과
끼니때마다 흘러 넘쳐 버리던 밥이며 국물과
그리고 인간에 대한 모든
무례와 무지와 무관심을 부끄럽게 하소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하소서
큰 것보다도 작은 것이 좋다고,
많은 것보다도 적은 것이 좋다고,
높은 것보다도 낮은 것이 좋다고,
빠른 것보다 느린 것이 좋다고,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그것들을 아끼고 쓰다듬을 수 있는 손길을 주소서
장미의 화려한 빛깔 대신에
제비꽃의 소담한 빛깔에 취하게 하소서
백합의 강렬한 향기 대신에
진달래의 향기 없는 향기에 취하게 하소서
떨림과 설렘과 감격을 잊어버린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 같은 몸에도 물이 차 오르게 하소서
꽃이 피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 봄날이 다 가기전에
얼음장을 뚫고 바다에 당도한
저 푸른 강물과 같이 당신에게 닿게 하소서
<아름다운 곳/문정희>
봄이라고 해서 사실은
새로 난 것 한가지도 없다
어디인가 깊고 먼 곳을 다녀온
모두가 낯익은 작년 것들이다
우리가 날마다 작고 슬픈 밥솥에다
쌀을 씻어 헹구고 있는 사이
보아라, 죽어서 땅에 떨어진
저 가느다란 풀 잎에
푸르고 생생한 기적이 돌아왔다
창백한 고목나무에도
일제히 눈펄 같은 벚꽃들이 피었다
누구의 손이 쓰다듬었을까
어디를 다녀와야 다시 봄이 될까
나도 그곳에 한 번 다녀오고 싶다
<다시 오는 봄/도종환>
햇빛이 너무 맑아 눈물이 납니다
살아 있구나 느끼니 눈물이 납니다
기러기떼 열지어 북으로 가고
길섶에 풀들도 돌아오는데
당신은 가고 그리움만 남아서가 아닙니다
이렇게 살아 있구나 생각하니 눈물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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