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봄학기 본 시니어대학 글쓰기 강좌 4>
· 많이 읽는 사람이 좋은 글을 쓰게 된다.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이나 시, 수필을 읽고 그 내용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마음에 떠오른 것을 적어보자. 이 작가는 어떤 재료를 사용했는가? (예를 들면 어떤 인물이나 사건, 어떤 상세한 묘사, 어떤 아이디어를 사용했는가?) 이 재료의 무엇이 마음에 드는가? 작가는 재료를 어떻게 얻었다고 생각하는가? 작가가 특정한 재료를 사용한 까닭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읽고, 읽고 또 읽는다. 모든 것을 읽고 그 글을 어떻게 썼는지 확인하라. 도제처럼 일하고 장인처럼 연구하는 목수와 같이 끝없이 읽어라!”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
· 기꺼이 배우는 사람이 되겠다는 자세를 견지하자. 비판적인 두뇌보다 창조적인 두뇌를 활용하자.
· “의문을 지닌 채 현재를 살아라. 그러면 나도 모르게 먼 훗날, 대답을 지닌 채 살아갈 날이 올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수탉의 도전
이인숙
수탉이 철조망 틈새 끼인 날갯죽지를 빼느라 발버둥을 친다. 눈망울을 껌뻑이고 붉은 볏을 움찔거리는 모습이 힘겨운가 보다. 틈새가 비좁아 수닭이 탈출하기엔 불가능해 보이건만, 포기할 수 없다는 몸부림이다. 탈출을 향한 집념이 팔월의 태양 볕보다 뜨겁다. 급기야 부리로 땅을 쪼아대며 용을 쓴다. 수닭의 몸짓에서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오기마저 느껴진다.
드디어 탈출이다. 수탉이 날개를 펴고 텃밭으로 쏜살같이 내달린다. 철조망 아래 땅을 파헤쳐 틈새로 탈출을 성공한 것이다. 닭이 머리가 나쁘다는 말도 옛말인 것 같다. 철망과 땅의 틈새를 파헤치면 구멍이 생기는 걸 어찌 알았을까. 수닭은 볏을 꼿꼿이 세우고 개선장군처럼 풀밭을 활보하고 있다. 그 모습은 더없이 늠름하다. 수닭의 탈출은 한번에 얻어진 것이 아니다. 몇 번의 실패 긑에 얻은 값진 성공이다.
수탉을 바라보다 문득 예전 내 모습이 떠오른다. 과연 나는 삶의 주인인 적이 있었던가. 돌아보니 목숨 줄인 생업에 열중하느라 종종거리며 살아온 듯 싶다. 좀 더 넓은 집을 얻고자 애를 쓴 것이 아니다. 남들보다 비싼 자동차와 좋은 옷을 입고자 치열하게 살아왔던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낯선 세계의 도전은 고사하고, 세 목숨 부지하고자 일을 찾아 애가 탈 뿐이었다.
두 딸의 손을 잡고 마주한 세상은 녹록치 않았다. 누구에게도 허둥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때론 오기도 부렸다. 매순간 강해지고자 마음을 다잡았고, 그래도 두려움이 일면 들길을 달려 마음을 다독였다. 하지만, 스스로 생계란 목숨줄에 친친 감겨 벗어나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돌았다. 나에게 수닭의 거침없는 도전이 절실하던 때였다.
생명 앞에선 미물인 닭도 인간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알을 품은 어미 닭은 모이를 먹을 때 외엔 둥지를 떠나지 않는다. 심지어 잠을 잘 때도 알을 품은 채로 잠이 든다. 새끼 외에 그 어떤 것도 욕심내지 않는다. 오직 알이 깨어 병아리가 되기를 염원할 뿐이다. 나 또한, 아이들을 온전히 지키고자 개인의 삶은 세상 밖으로 내던졌다. 어설픈 감정이나 불평불만을 할 여유도 없었고, 한낱 감정 타령은 사치라고 여겼다. 가장의 빈자리와 세 명의 목숨을 위하여 옥석을 가릴 여유가 없었다. 지난한 환경이 홀로 두 아이를 키우기에 역부족이었지만, 어미의 역할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다행히 두 딸은 부족한 보살핌에도 밝은 모습으로 자랐다. 새벽일을 마치고 돌아와 서둘러 아침을 준비하였다. 아이들에게 부족한 사랑을 아침밥으로 대신이라도 할 양 바지런을 떨었다. 그렇게 다시 일터로 부리나케 향하던 참이었다. 먼지가 뽀얀 자동차 유리창에 언뜻 무언가 보였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가로등 불빛에 보이는 것은 ‘엄마 사랑해!’라고 또박또박 써놓은 문자였다.
작은 녀석의 필체였다. 평소 표현이 적어 ‘시크 소녀’라고 부르는 녀석에게 사랑 고백을 받으니 가슴이 뭉클했다. 아마도 학교를 마치고 오던 길에 적어놓았으리라. 병아리만 같았던 딸아이가 벌써 어미를 위로해 줄 정도로 성장한 것 같아 기특하였다. 딸의 무언의 표현은 천근같이 무거운 몸을 일으켜 새벽길을 달려도 지치지 않을 활력소가 되었다. 꿈쩍하지 않을 것 같았던 시간은 거침없이 흘러갔다.
큰 딸이 둥지를 떠나던 날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안정된 직장을 마다하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겠단다. 처음엔 무모하다고 생각했다. 경쟁이 치열한 광고계에 뛰어든 아이가 불안하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아이가 대학 시절 내내 몰입하던 분야였기 때문이다. 딸은 내로라하는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고 외국 연수도 다녀왔다. 그러나 자신의 꿈을 접고 직장을 택한 건 엄마와 동생을 염려한 결과였으리라.
딸은 대입시험 준비도 홀로 무진 애를 썼다. 엄마의 경제적인 짐을 덜어주고자 학원도 가지 않던 녀석이었다. 수능시험을 몇 달 앞둔 어느 날 독서실에 가고 싶다고 말하였다. 최선의 노력을 한 다음에야 다른 대안을 찾는 아이인지라 이번 일도 쉬이 결정하진 않았으리라. 그렇게 딸의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다.
내 눈에 사회자로 선 딸의 모습이 제일 먼저 들어왔다. 연말 회사에서 주관하는 소외된 이웃을 위한 자선경매 자리였다. 큰 무대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자리를 굳히는 딸이 기특하였다. 아비의 부재와 어미의 나약함에 큰아이는 스스로 자신을 지키고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였나 보다. 막막한 현실을 탈출하고픈 의지는 누구보다 강했으리라. 그 덕분인가, 자신의 미래를 지키고자 도전하는 발길에 거침이 없었다. 과연 엄마보다 용기가 넘쳤다.
딸의 모습은 좌중을 이끌고 있었다. 그날 자선행사가 대성황이었다며 보내온 영상에는 마치 수닭이 풀밭을 누리듯 활기가 느껴졌다. 아마도 행사를 준비하고자 녀석은 많은 시간 무던히 애를 썼으리라. 딸의 당찬 모습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삶이 고단하다고 절망하지 않아 고맙다. 단순한 세상의 철조망을 뚫고자 도전을 포기하지 않아 고맙다.’라고 딸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아이는 이제 걱정하지 말고 용기를 내라는 듯 화면 가득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내가 머문 세상을 돌아본다. 나는 한 동안 세상 속 두려움이란 감옥에 자신을 유폐시킨 듯싶다. 두려움은 실상 그 높이가 아닐지도 모른다. 차마 그 깊이를 바라보지 못하고 지레짐작 느끼는 공포감이리라. 수탉의 탈출과 딸의 거침없는 모습이 나를 일깨운다. 이제는 딸들에게 진정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마음 깊이 숨죽인 모든 감각과 의지를 일깨우리라. 꿈을 마음껏 펼쳐보고픈 강한 의욕이 불붙듯 일어난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수탉의 자태가 늠름하다. 먹이를 사냥하고자 흙을 헤집는 발길질에도 힘이 넘친다. 울안에만 머물렀다면, 흙 속 산해진미와 새싹의 향긋함을 어찌 맛보았겠는가. 비록 수닭의 일생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하나 삶을 선택할 권리는 오직 자신에게만 있다. 불굴의 도전이 있었기에 울안이 아닌 풀밭의 터전을 얻은 셈이다.
용기도 절망도 자신의 마음에 달려 있다. 삶에서 쉽게 얻어지는 것이 어디 있으랴. 고통의 원인은 누구보다 본인이 잘 알고 있으리라. 그러나 극복하는 일 또한, 스스로 감당해야만 한다. 모난 돌이 몽돌이 되기까지는 거친 물길에 부딪히는 고난의 시간을 이겨내야 한다. 머물러 주춤 거린다면 무엇 하나 얻을 수 없으리라. 수닭의 몸부림에도 포기하지 않고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거침없는 도전정신을 깨운다.
세상은 두려움이 아닌 도전의 장이다. 웅덩이에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다. 끝없이 물길을 다독여 강으로 바다로 주저없이 나아가야만 한다. 저기 붉은 볏을 꼿꼿이 세운 수닭이 걸어오고 있다. 마치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딸들이 엄마에게 걸어오는 모습만 같다. 이제 딸들에게 나의 참모습을 보여 줄 차례이다. 가슴에 품은 꿈을 향하여 신발 끈을 단단히 묶는다.
-2019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작-
해방의 기쁨과 소용돌이
고승만(1923~)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날 기쁘고 싫증 나지 않는 숫자, 감동을 주는 숫자. 어제가 아기쯔노 가미(現人神, 살아있는 신)로 모시는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선포한 날. 36년간 국권은 물론 모든 자유 심지어는 언어와 이름까지 약탈당했다 다시 찾은 날, 해방의 날이다.
호랑이도 결박해놓고 보면 불쌍하다고 하더니 일본 천황이 떨리는 소리로 무조건 항복을 선포하는 것을 라디오를 통해 듣고 불쌍하게 느껴졌다. 고향 중심가로 나갔더니 어디서 나왔는지 페인트 가게에서 페인트를 사서 태극기를 만들고 있었고 시가는 통행하는 사람도 별로 없고 조용했다. 그때 일본 헌병대가 동부교회당을 점령 주둔하고 있었고 일본 경찰관들도 그대로 있었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자중했다고 생각되었다.
하루가 지나니 위대한 스틸린 원수 만세라는 현수막이 여러 곳에 걸려있고 사람들은 무슨 동무라고 칭하며 급조된 공산주의자들이 많이 생겼다. 우리들은 아버지 동무 할아버지 동무 할머니 동무하면서 놀려주었다.
지주의 자식이나 지식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전부 배척당하고 전부 실업자가 되었다. 친구 두 명과 같이 이제는 장사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46년 3월 초에 유명한 종합병원 원장 선생님의 자문을 얻어 서울에 가서 약품을 힘들게 구했다. 막상 구해서 왔는데 판매할 곳이 없었다.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 서울에서 친구를 만났는데 새 학년부터 광산전문학교에서 농구부를 신설하니 특기생으로 입학할 수 있다는 것이다.
6월 말경에 다시 월남하다 평양에서 체포되어 고향으로 압송, 재판도 없이 보안서 유치장에 95일간 유치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래도 꿈을 버리지 않고 협력하는 척하다 다시 월남하기로 결심하고 민청에 가입하여 얼마 있으니 노동당에 가입하라는 것이다. 당원이 되고 기회만 노렸다.
47년 3월 동위원 선거가 있었는데 7명 위원중 최다득표를 하니까 당에서 동사무장으로 추천하여 어쩔 수 없이 사무장 일을 보았다. 한 달쯤 지나서 무보수라 먹고 살 수 없다는 핑계로 사무장직을 사직하고 중심가에 책방을 개점했다. 그 때 모 창고에 전쟁 때에 소개되어 많은 책이 있는 것을 알게 되어 빌려다가 진열했다. 주로 의학서적과 법학서적이었다. 책 볼만한 사람들은 월남하고 신간서적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3~4개월 개업했다가 책을 구입해 온다는 구실로 평양에 가서 친척집에서 2일을 묵고 해주로 가서 배로 월남할 계획으로 해주로 갔다.
해주역에 내리던 날 역 앞에서 친구를 만났다. 친구가 해변가 여인숙으로 안내해 주었다. 여인숙 주인이 후배의 형이고 후배는 도보안부에 있다는 것이다. 여인숙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아침에 배를 타고 월남 청단 앞 바닷가에 도착해서 첫마디가 아~ 이제는 살았다였다. 통성에 가서 서울로 가고자 하였으나 통성 미군수용소를 거쳐서 서울에 연고가 있어야 갈 수 있고 없는 사람은 서울 외의 지방으로 가야 했다.
수용소에 들어가니 정문에서 DDT로 목욕하다시피 전신에 뿌려주었다. 2일인가 있다가 독신자는 서울로 갈 수 있었다. 정문을 나오는데 아버님과 형수, 조카 세 명이 밤에 3.8선을 넘었다는 것이다. 비극이다.
서울에서 큰 형님이 친구들과 얼마 전에 정착해 계셨다. 서울에 도착한 다음 날 형님이 아버님과 식구들을 서울로 모셔왔다. 2~3일 후에 학교 다닐 때부터 친자식처럼 사랑해주시던 어머니라고 모시던 분이 서울 시청 고위직에 계시는 분을 안다고 하여 사택으로 문안차 갔더니 쓸데없이 청년운동 하지 말고 미국 유학 보내줄 테니 공부하라는 것이었다. 원래 미국 유학 출신이기 기반이 견고한 분이었다. 그 후 알아봤더니 중고등학교 6년제 출신이어야 전문대나 대학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보니 다시 고등학교 각 수도 없고 간다고 해도 먹고 살아야 하기에 고민하는 중 이미 경전에 취직해 있는 여러 명의 친구가 고생하지 말고 우리 회사에 입사해 있다가 기회가 있으면 고향으로 가자고 해 입사했다. 광산기술자가 전기회사에 입사해 막막하기는 했지만, 농구부가 있어서 열심히 아침저녁으로 연습하여 많이 늘어서 주변 사람도 놀랄 정도였다. 그때 지금은 한국에 속해있지만, 화천수력발전소가 이북에 속해 있어서 의정부 창동 방면 전기 사정이 아주 좋지 못했다. 그래서 당인리 발전소에서 수색 변전소에 송전 된 전기를 창동 쪽으로 송전하는 송전선을 기설 설계를 하게 되었는데 12km나 되는 것을 잘 마무리 지었다. 자부심을 느꼈다. 결국 깨달은 것은 누구를 막론하고 때를 잘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프리라이팅
이신희
무엇을 쓸 수 있을까요? 15분 안에?
늘 마음에 끓어 오르는 이야기는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이다. 할아버지 홍하순 목사님, 사모님 김영애 사모님, 큰삼촌 홍준철, 그리고 사촌들, 또 6.25 당시 막둥이 삼촌, 남한에 내려왔으나 역시 6.25 사변에 목숨을 잃은 준호 삼촌, 이들의 모습이 구름과 같이 몰려온다.
홍하순 목사님은 평안북도 철산이라는 곳에서 태어나 연희대학을 나오신 후에 평양에서 신학을 하시고 평안북도 의주로 오셔서 서 교회에서 목회를 할 때 저희 외할아버지는 의주 상인으로 온 재산을 독립군을 도와준 이창수 장로-그 후 일본인들에게 알려져 병원에서 맹장 수술을 하는 중 과다하게 몰핀을 투하해 목숨을 잃으셨다.
나의 아버지(홍준모)는 홍하순 목사의 둘째 아들로, 수의사로 창성군에 공무원으로 일할 때 특히 말 사육에 종사하면서 나도 아버지와 같이 말을 타고 다닌 추억이 있다.
그 후 해방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신의주 우리가 살던 곳에는 소련군이 입주하여 우리 부친 홍준모 수의사는 그들이 타는 말들을 사육, 치료를 맡으셨다. 그러나 목사이신 홍하순 할아버지는 우리 가족이 남한으로 가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해방 3년 되던 해에 서울로 내려오게 되었다.
우리 부친께서는 수의사라는 직업 때문에 어디든지 자유롭게 다닐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평양에 갈 기회가 있어서 황해도 해주 그 당시 우리 어머님 사촌 오빠가 그곳에서 농사일을 하기 때문에 친척방문을 핑계로 온 가족이 황해도 해주로 내려갔다. 황해도 해주에서 인천으로 가는 배를 찾아 우리 가족이 북한을 탈출했다.
그 당시 이미 남한에서는 한경직 목사님이 베다니교회(현 영락교회)라는 이름으로 교회가 시작되었을 때였다. 갈데없는 북한 난민들은 베다니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우리 아버님은 수의사라는 직업 때문에 서울시청에서 수의사로 일하시면서 축산협동조합을 시작한 분이시다.
다시 인생을 산다면?
봉춘자
다시 인생을 산다면? 참 재미있는 생각이다. 꿈의 세계에서 상상의 날개를 그리고 휠휠 날고 있다.
어린 시절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내겐 꿈은 있었다. 선생님께서 네가 크면 어떤 사람으로 살 거냐고 물으실 때 저는 커서 우리 엄마 병도 고치고 아픈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의사가 될래요 하며 꿈을 키웠다. 가정의 맏이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운 시기를 겪게 될 것 같아 학교를 포기하였다. 사람들에게 오는 기회를 놓쳐버리면 다시 찾아오기가 힘들어서 나의 계획은 물거품 사라지듯 사라졌다.
그렇게 나의 뜻과는 다른 전공을 배워 직장생활을 하며 결혼하여 아이들을 키우며 힘들고 바쁜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에게도 따뜻한 사랑을 해주지 못하여 항상 죄책감과 미안한 마음이다. 사랑에 빚진 엄마를 용서하기 바랄 뿐이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시어 이곳 축복의 땅 캐나다로 인도하시어 행복한 노후를 보내게 하셨다. 만약에 내가 젊음을 찾아 다시 인생을 산다면 사랑보다 얻기 어려운 기독교 신앙의 믿음으로 살 것이다.
진정한 고뇌의 삶을 이끌 수 있는 원동력을 키우며 인생의 지혜로 상생하는 한 포기의 생각하는 갈대가 되어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싶다. 철이 들면서부터 심적 동기나 행동의 원점은 젖먹이 유아 시대에서 받은 무의식 경험에 있는 것이리라. 어릴 때부터 삐뚤게 나가지 않게 보듬고 다듬는 정원사의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고결한 인격과 덕행, 자비와 인내, 겸손 체면 명예 등 인간적인 상호 존경의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사랑을 듬뿍 담은 교육을 해보고 싶다. 어린이 교육을 위하여 꽃 봉우리를 키워내는 어린이 교사가 되고 싶다. 그들이 어른이 되어 사회에서 유용한 일꾼으로 살아가도록, 고결한 인격자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마음과 힘을 다하고 싶다.
그리하면 할머니가 되어있는 나에게 많은 제자들이 찾아오는 우수한 교사로 남게 될 것이다.
작 모르겐(Jack Morgen)
이몽옥
쟉 모르겐(Jack Morgen)의 80회 생일잔치에 대한 기사가 한 달 전 신문지상에 기재 되었다. 그리고 동네의 하나뿐인 가게, 우리 가게 벽지와 신문광고에는 [선물은 사절 잔치만]이라 했다.
쟉[Jack]은 이곳 크레몬트(Claremont)에서 태어났고 한 번의 이사도 없이 태어난 집에서 80 년을 살아온 사람이다. 직업도 한결같이 농업으로 네 자녀를 양육, 출가시켰고 캐나다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다. 집 근처에 가니 멀리까지 차들이 세워져 있어서 나도 미리 차를 세우고 한참을 걸어 올라갔다. 집 입구엔 상업용 간판을 빌려다 [80회 생일잔치 모두 환영]이라고 쓰여있어 그 길을 지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게 또 불편의 양해를 구하는 느낌이 들었다. 활짝 열려 있는 대문 안에 들어서니 테이블을 덮은 예쁜 상보 위에 축하 카드를 받는 바구니 하나와 방명록 한 권과 펜 그리고 자기 스스로 자신의 이름자를 써서 가슴에 달고 들어가도록 빈 명찰이 있었다. 정원에는 많은 하객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80세 전후의 사람들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어린아이들이 하프 연주를 했다. 그리고 잔치가 끝나갈 무렵 쟉은 손님들을 데리고 소풍을 가듯 집 구경을 시켜주었다. 100년이 넘는 벽돌집에 보석을 진열했듯이 사용하지 않는 옛 도구들은 하얀 오일 페인트를 입혀 선반 같은 나무토막 위에 올려놓았다. 쟉은 젊어서부터 그림을 그렸는지 기록 사진처럼 아이들이 정원에서 노는 모습, 쟉의 부인인 메리의 젊었을 때의 모습을 그려 벽에 걸어 놓았다. 그리고 나무들이 무성하였으며 수많은 꽃이 피어있었고 연못엔 나의 손바닥보다 더 큰 금붕어들이 떼 지어 다니고 있었다.
아주 매서운 겨울이 왔다. 쟉은 겹겹이 옷을 껴입었고 장작 나무를 주워 한데 묶고 있었다. 힘이 드는지 중간중간 장작더미 위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웠다. 나는 그런 쟉이 모든 것을 정리하고 호텔 같은 콘도로 이사를 가 왕자처럼 살것이라 짐작했었다. 쟉의 땅은 집을 지을 수 있고 땅의 면적도 100에이커가 넘는 대지였기 때문이었다. 요즘은 교통이 편리하고 주위 환경이 좋은 변두리를 선호하기 때문에 쟉이 원 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가 있었다. 더구나 부인이었던 메리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던 날 메리는 우리 가게로 진통제를 사러 왔었다. 가방 속엔 전화기가 들어 있었는데 순간 무척 외로운가 보다, 또 누구의 전화를 애타게 기다리는가 보다 했었다. 그러나 쟉의 말대로 “내가 도시로 이사를 간다면 그곳에 가서 뭘 하겠어?”라는 쟉의 말이 늘 맴돌고 있다.
나는 나의 희망 사항을 쟉에게 말했었나 보다. 나는 조용하고 깨끗하고 안전한 곳 나만의 왕궁을 만들고 그곳에서 춤도 추고, 소리 높여 노래 부르고 친구들을 불러모아 수다를 떨고 싶었나 보다. 나는 말하고 싶어 했었고 글을 쓰고 싶어 했었다. 그러나 환자처럼 두서가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창문을 통해 밖의 세상이 훤히 보이는 콘도에 앉아 글도 쓰고 누구와 통화도 하고 문득 문을 잠그고 외출도 하고 여행도 가는 그림이 내 맘속에 있었나 보다.
20살 때 한국을 떠나 유럽으로 북아메리카로 이사를 다니던 나의 마음은 태평양을 건너는 새였는지 모른다. 경마장을 달리는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회생활 경험이 없는 상황에서 한국을 떠나와 고립된 삶이라 외로웠고 두려웠다. 어린아이처럼 솔직했다. 그래서 상대방을 빨리 파악하지 못하고 내 방식만 고집했는지 모른다.
이렇듯 나와 쟉은 상반된 삶을 살아왔으면서 우리는 서로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왜 고향을 떠났을까? 아직도 나의 마음 한구석에 붙박이장처럼 박혀 있는 곳은 내가 살았던 서울인데. 저 산 너머 저 언덕 위에 행복이 있다기에 남의 말만 듣고 고향을 떠나 온것은 아닐까?
쟉 할아버지는 오늘도 나무를 자르고 집 변두리를 다듬고 있다. 어떤 면으로 관찰을 한다면 쟉 할아버지도 나도 행복의 도수 지표가 같은 궤도에 머무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계를 유람하듯 살아온 나를 보면서 쟉 할아버지는 지난날의 자신의 반복된 삶, 권태의 슬픔을 삭히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구처럼 큰 틀에서 생을 보존하는 방법이라면 쟉 할아버지와 나는 경기장에서 수비역할 과 공격역할을 착실히 이행한 선수라고 생각하자.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운명에 순종하며 살다가 80세 생일이 오면 쟉 할아버지처럼 식구들을 불러모아 놓고 그동안 기록 영화처럼 만들어 놓은 무성 영상과 설교를 하듯 길게 통화를 한 녹음기를 들려주고 언제 누가 번역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글을 전해주고 싶다. 허나 화살처럼 빨리 변해 가는 새로운 문명 생활 방식을 붙잡을 수 없듯이 우리 아이들의 아이들 사고방식이 오래된 옷을 대하듯 귀찮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쟉은 오늘도 나무를 가꾸고 집 변두리를 다듬고 있다. 다음 해는 다시 피지 않을 꽃들까지 정성 들여 가꾸는 것은 그리고 언제 마감이 될지 모르는 쟉의 인생을 감안 하니 더더욱 경이롭다. 아니 인간으로서 의무를 다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 세상에 와서 인간은 모든 것을 지배만 했다. 의무라는 것도 있다. 좀 더 좋은 환경을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아이들이 또 그 아이들이 좋은 것들을 취하고 떠날 때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한다면 좋은 순환이 될 것이다. 지구는 영원할 것이다.
잊지 못할 선생님
이순섭
나는 일제 강점기 이 차 대전이 치열했던 가난한 시절 시골 농촌에서 태어났다. 일본의 압박 속에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안고 비참하게 살던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삼학년 때 해방이 되어서야 비로소 우리 말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사학년 때부터 존경하는 은사를 만나 육학년 졸업 때까지 선생님의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좋은 인성과 지성과 감성과 삶의 지혜까지 배우며 자랐다.
선생님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우리 학교에 처음으로 부임한 우리보다 열 살 위인 총각 선생님이셨다. 이름은 오흥섭, 코가 크다고 해서 코주부라는 별명으로 더 알려진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은 다방면으로 조예가 깊고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후진 교육에만 열중했던 감성적이면서도 엄한 선생님이셨다.
특히 예능에 재능이 남달라서 학생들의 잠재된 재능을 발굴해서 그 재능을 키워주고 각자 잘하는 부분을 칭찬해주고 키워 주셨다. 음악 시간에는 많은 동요와 아직 어리지만 여러 가곡을 배우게 했다. 왜정의 핍박으로 마음에 한을 품고 애수에 찬 노래로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래며 부르던 노래와 고향을 그리는 노래가 많았다. ‘울 밑에선 봉선화야’, ‘깊어가는 가을밤에’, ‘성불사의 밤’, ‘고향 생각’, ‘황성 옛터’, ‘뜸북 뜸북새’, ‘고향 생각’, ‘마의태자’ 그 외에도 많은 노래를 가르쳐 주셨다. 지금도 그 시절이 그리울 때는 옛 노래들을 콧노래로 흥얼거리게 된다.
작문을 잘하는 학생은 지은 글을 읽게 하고 자신감과 꿈을 갖게 했다. 그러므로 그 학생은 그 재능을 키워서 지금까지도 수필을 쓰고 있다. 노래를 잘하는 애는 늘 독창을 시켜서 성악적 재능을 키워주셨다. 그 밖에 수학을 잘하는 친구는 그쪽으로 전공해서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으로 재직했다. 체육을 잘하는 친구는 운동회 때는 선수로 뛰곤 했다, 각자 특기를 키워주어 그 재능을 따라갈 수 있게 도와주는 폭넓고 색다른 교육방법으로 우리를 가르치셨다. 육학년까지 선생님의 훌륭한 가르침을 따라 감수성이 예민하고 총명한 어린 시절을 잘 보내고 바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나에게는 그림 그리기와 붓글씨 쓰는 재능이 있었던 것 같다. 미술 시간에 그린 그림과 붓글씨는 반 게시판에 붙여지는 영광을 누렸고 도내 어린이 미술 전람회에도 붓글씨 시조 한 편을 써서 출품했던 기억도 난다.
우리 고향은 농촌이라(지금은 일산 신도시가 되었지만) 중학교에 가는 학생은 반에서 반도 안 되었다. 그 고장은 면 소재지의 작은 도시라 중학교가 없어서 경의선 열차로 서울까지 기차 통학을 해야 했다.
과외공부라는 말이 생소했던 그 시대에 중학교에 가고자 하는 학생들을 모아 방과 후에 따로 공부를 시켰다. 매일 시험을 보는데 성적이 안 좋으면 복도에 일렬로 서서 걸상을 들고 단체 기합을 서야 헸고 공부 잘하던 학생이 어쩌다 시험 점수가 떨어지면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았는데 정강이에 피멍이 들도록 맞아야 했다.
공부가 끝나고 캄캄한 밤에 2Km가 넘는 시골길을 걷노라면 무섭기만 했다. 양편이 산으로 벽을 이룬 길을 걸으면 산속에서 짐승 우는 소리가 나곤 했다. 그럴 때면 머리끝이 쭈뼛 서며 가슴이 철렁하여 걸음을 멈추곤 하였다.
선생님께서 정말 열심히 잘 가르쳐 주신 결과 육학년이 두 반이었는데 우리 반에서는 서울에 가서 거의 다 중학교에 입학했고 여러 명이 일류 중학교에 합격해서 전교에 기쁨과 영광을 안겨주었다.
그때 마음 졸였던 일이 또 하나 기억난다. 학기 말만 되면 남학생 두 명과 여학생 두 명을 남게 해서 학생들의 성적을 통계 내는 일을 시켰다. 그럴 때마다 서로가 눈치를 보며 이번에는 내 성적이 어떻게 나올까, 누가 일 등을 차지할까 하는 불안감을 가지고 마음 졸였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을 뵈면 늘 존경스러웠다. 선생님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다른 어떤 직업보다 가치 있어 보였다. 어린 마음에 나도 후일 공부를 계속할 수만 있다면 선생님이 되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육이오 사변으로 인해 꿈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바른 교육으로 일관했던 선생님 덕분에 좋은 가르침과 인도로 성장하여 모두가 훌륭한 사회인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즐거웠고 행복했던 그 시절은 지나간 추억으로만 마음에 살아 있다. 그리운 선생님과 같이 뛰놀던 친구들이 그립다. 보고 싶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사모곡/신달자>
길에서 미열이 나면
하나님 하고 부르지만
자다가 신열이 끓으면
어머니
어머니를 불러요
아직도 몸 아프면
날 찾냐고
쯧쯧쯧 혀를 차시나요
아이구 이꼴 저꼴
보기 싫다시며 또 눈물 닦으시나요
나 몸아파요, 어머니
오늘은 따뜻한 명태국물
마시며 누워 있고 싶어요
자는 듯 죽은 듯 움직이지 않고
부르튼 입으로 어머니 부르며
병뿌리가 빠지는 듯 혼자 앓으면
아이구 저 딱한 것
어머니 탄식 귀청을 뚫어요
아파다고 해라
아프다고 해라
어머니 말씀
가슴을 베어요
<밤비/허형만>
비 나리는 밤이면
어머니는
팔순의 외할머니 생각에
방문을 여는 버릇이 있다
방문을 열면
눈먼 외할머니 소식이
소문으로 묻어 들려오는지
밤비 흔들리는 소리에 기대앉던
육순의 어머니
공양미 삼백석이야 판소리에나 있는 거
어쩔 수 없는 가난을 씹고 살지만
꿈자리가 뒤숭숭하시다?
외가댁에 다녀오신 오늘
묘하게도 밤비 내리고
방문을 여신 어머니는
밤비 흔들리는 소리에 젖어
차라리 돌아가시제
돌아가시제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정채봉>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
단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어머니의 눈물/박목월>
회초리를 들긴 하셨지만
차마 종아리를 때리진 못하시고
노려보시는
당신 눈엔 글썽거리는 눈물
와락 울며 어머니께 용서를 빌면
꼭 껴안으시던
가슴이 으스러지도록
너무나 힘찬 당신의 포옹
바른길
곧게 걸어 가리라
울며 뉘우치며 다짐 했지만
또다시 당신을 울리게 하는
어머니 눈에
채찍보다 두려운 눈물
두 줄기 볼에 아롱지는
흔들리는 불빛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심순덕>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어리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불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돕이 깍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가 보고 싶다
외할머니가 보고 싶으시다, 그것이 그냥 넉두리인 줄 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어머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실/윌리엄 스테포드>
네가 따르는 한가닥 실이 있다
그 실은 변화하는 것들 사이로 지나간다
하지만 그 실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네가 무엇을 따라가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너는 그 실에 대해 설명해야만 한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 실을 붙잡고 있는 한 너는 길을 잃지 않는다
비극은 일어나기 마련이고 사람들은 상처입고 죽는다
그리고 너는 고통받고 늙어간다
시간이 하는 일을 너는 어떻게도 막을 수 없다
그래도 그 실을 절대로 놓지 말라
우리 모두는 일상 속의 작은 사건들과 소소한 비극들과 절망을 겪는 ‘아파하는 영혼(aching soul)’이다. 그렇다해도 당신이 따라가는 실을 놓지 말라. 글쓰기이든, 그림 그리는 일이든, 퀼트를 만드는 바느질이든, 그 실이 있는 한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그 실이 보이지 않는다. 당신이 걸어가는 길, 타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당신이 잡고 있는 그 실은 당신의 가슴으로 부르는 노래이다. 그 실이 당신 영혼의 아픔을 치료해 줄 것이다.
윌리엄 스테포드(William Stafford, 1914~1993)는 시인이자 반전운동가로 삶의 후반기인 48세에 처음으로 시를 발표했다. 한번은 기자가 그에게 언제부터 시인이 되고자 결심했는지 물었다. 그는 말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다. 다만 그것을 언제 그만두었는지는 각각의 사람에게 물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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