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봄학기 본 시니어대학 글쓰기 강좌 7>
연입밥
조경숙
연잎밥을 지었다. 큰 솥뚜껑을 열자 향을 껴안은 주먹만한 연밥이 소복하게 담겨있다. 오뉴월 땡볕에 싸움질을 하던 아이들이 마치 한 이불 속에 서로 몸을 포갠채 잠자는 모습 같다. 하나 둘 조심스레 펼치니 이리저리 곡선을 그리는 김이 오른다.
평소 ‘옴마밥’이라며 찬 없어도 밥그릇을 단숨에 비워내던 열 명이나 되는 식솔들은 연밥을 싸는 동안 신기한 듯 하나둘 얼굴을 들이밀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다. 굳이 이런 풀이파리에 밥을 싸는 이유가 뭐냐며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내 주위를 빙빙 돌기만 했다. 한 주걱씩 푼 밥을 연잎에 올리고 고명으로 대추 은행 잣을 올려 마음을 포개듯 돌려가며 동여맸다.
밥은 하루를 잇는 징검다리다. 밥이 보약이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사 일상의 소박한 행위이기도 하지만 밥은 생명 그 자체가 아닐까. 한소끔 뜨거운 김을 올린 뒤에도 연잎의 향기가 밥알 하나하나에 고루고루 스며들 때까지 가열한다. 쟁여넣은 연밥은 “잘해라. 바르게 가야 된다. 청춘은 한 번뿐인 거야.”라며 지칠 줄 모르게 재촉하고 호소하던 나의 잔소리와 함께 채근하듯 안개 같은 김을 내뽑는다.
연잎을 채취하러 갈 때는 팔월 그믐인데도 더위는 여전히 맹렬했다. 불 같은 태양이 식을 줄 몰라 산더미처럼 쌓인 일조차 포기한 날, 연꽃을 따러 가자는 지인의 전화가 왔다. 팔월 하순이라 연꽃을 채취하기엔 때늦은 감이 있어 연잎이라도 따보자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십 여 명이나 되는 피 끊은 십대 아이들의 등쌀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랠 요량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길을 나섰다.
집에서 십십여 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시골의 외딴 연못이었다. 이백 평 남짓한 밭에는 빼곡하게 뿌리내린 연이 내키보다 훌쩍 커 힘차게 솟구쳐 자라고 있었다. 넓은 이파리는 마음껏 펼쳐 하늘을 담아냈다. 사이사이 홍안紅顔의 소년 같은 깊은 눈망울로 투명한 연꽃을 피워냈다. 단아한 연실에 까맣게 익은 연밥까지 촘촘히 박혀 있었다.
연못 언저리에 서 있던 지인의 어머니는 해마다 살아있는 미꾸라지 서너 말 풀고 약 한 번치지 않고 키웠다며 연신 연꽃 예찬을 쏟아 내신다. 나는 허벅지까지 오는 물장화를 신고 무턱대고 텀벙텀벙 진흙밭에 들어섰다. 그 순간 무릎까지 쭈욱하고 묵직하게 소리를 내며 단숨에 빠져들었다. 무심코 내디딘 발걸음은 나를 곧추세우기는 커녕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문득, 이제 열다섯 살 승기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지와 단 둘이 살았던 승기는 아버지가 교도소에 들어가는 날 소년원에서 나왔다. 팍팍한 삶을 꾸려 갈 수 없어 집을 나가 버린 엄마, 길을 잃고 엇갈리던 삶은 대를 잇는 듯하였다. 면회장 유리 창문 너머로 새파란 입술을 깨물며 닿지 않는 손만 유리벽을 쓸고 있던 그 아이의 눈빛이 아직도 내 가슴에 화살처럼 꽃혀 있다.
연잎을 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부족한 경험은 마음만 앞질러 좀처럼 원하는 것을 체득할 수 없지 않던가. 진흙밭 깊은 수렁을 겨우 헤쳐 손이 닿는 대로 여름 햇살에 검푸르게 자라난 연잎을 채취하였다.
연잎은 폭염과 진흙탕 속에서 한 점 진흙의 티끌도 담아내지 않고 바람으 흔적조차도 찾아낼 수 없다. 자신만의 색을 태연히 담아냈다. 뿌리는 어떠한가. 가는 갓난애기 손가락 크기만 한 텅 빈 바람 구멍을 가슴에 안고도 아무 일 없듯이 진흙 속에 서 있다.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그속에서 맑은 물 걸러 지상의 꽃대로 잎을 올려 보낸다.
세파와 시류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오로지 한 송이 연꽃을 피우기 위해 깊은 수렁 같은 어둠속에서 견디는 것이리라. 내가 운영하는 청소년 회복센터는, 세상의 가장 큰 의지이자 본성의 고향 같은 엄마는 오래전에 집을 나갔거나, 아버지는 오랜 지병으로 이미 뿔뿔이 흩어진 가족, 혼자 할머니 손에 머물다 거리로 전전하던 아이들이 모여 살고 있다. 도무지 앞날을 가늠할 수 없는 캄캄하고 암울한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비행이라는 날개로 자신의 숨통을 열어야 살아 있다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나 또한 상처투성이 아이들하고 살아가자니 진흙 속 연뿌리처럼 가슴에 숨구멍 한 두 개쯤 열어놓아야만 한다. 열 명의 아이들은 제 각 각 먹는 것이며 말하는 모양새며 자는 모습까지 개성도 판이하다. 매 순간 어디로 튈지 가늠할 수 없는 활기 넘치는 소년들의 엄마 역할을 할 때면 덜컥 겁이 날 때도 많다. 넓은 연잎과 뿌리처럼 튼실해야 될 성 싶은데 말이다. 아이들이 제 모양의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내가 진흙밭이 되고 꽃대도 되어야 상처와 아픔을 태연하게 도려낼 수 있을 것 같다.
한낮을 넘기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연잎의 싱그러움이 가득할 때 연잎 밥을 지어보려 잡곡과 견과류를 대충 준비했다. 켜켜이 담아온 연잎도 손질하며 흐르는 물에 연잎을 내려놓으니 물방울만 굴러 떨어진다.
연잎에서 쉽게 세상과 썩이지 못하고 아웃사이드로 튕켜 나 올 수 밖에 없는 아이들 얼굴이 선명하게 오버랩 된다. 세상의 어떤 불의에도 오염되지 않고 고유한 자신을 지켜 나가는 것에도 비유할 수 있기에 묘하게 극명한 두 부분이 하나의 연잎에서 나타난다.
연잎의 너른 품성을 닮고 싶다. 슬픔과 기쁨, 미움과 고마움도 한 심장에서 피는 꽃이 아니던가.
연잎 보자기에 싼 밥을 푼다. 은은한 향이 베인밥 앞에 눈길을 보내며 아이들과 인연 고리에 어떤 의미조차 부여하고 싶지 않다. 둥그렇게 마주 보고 앉아 깔깔대며 밥을 먹는 지금의 모습을 감싸 안고 싶을 뿐이다.
우리는 연잎에 싸여진 알곡처럼 아주 특별한 하나하나로 가족이 된 셈이다. 고고하게 핀 연꽃보다 진흙 연못이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또한 연뿌리가 되고 꽃으로 물길을 내어 주는 꽃대가 되어 가길…. 심장 깊숙이 각인된 주홍글씨를 지우고 감미로운 바람 같은 연잎 향이 아이들 몸과 마음에 배어들면 좋겠다.
-2019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당선작
심사평: 수필은 작가가 작품 속에 함축되어 있다. 픽션인 시나 소설과는 달리 수필 한 편을 읽으면 문장력에서 작가의 인격과 사상, 그리고 철학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더러 유려한 문장 솜씨와 독창적인 비유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향기와 빛깔로 형상화한 작품을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연잎밥’을 보자. 글쓴이는 가정환경이 불우한 청소년 열 명을 맡아 키우고 있는 ‘청소년 회복센터’의 직원이다. 어느날 연잎밥을 만든다. 연잎을 펼쳐서 쌀 견과류 등을 넣고 친친 감싼다. 먹는 모습, 말하는 모양새, 자는 모습까지 제각각이며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들 모두 지금은 비록 진흙밭의 뿌리에 불과하지만 바르게 잘 자라서 맑고 눈부신 연꽃이기를 바란다. 예리한 관찰력과 아름다운 감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경겨움과 애틋함을 담고 있어 가슴이 훈훈해지는 글이다. 심사위원 강현순, 한후남.
사랑스런 나의 손자
이순섭
나는 두 세대 차이를 매일 느끼면서도 손자와 둘이 살고 있다. 그 아이는 내가 이민 온 후에 태어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귀염둥이로 기쁨을 주며 사랑속에서 자라났다. 특히 할아버지의 귀여움을 더 받았고 아침저녁으로 운전하여 데이케어에 다녔다. 어린 것 역시 할아버지에게 “하부지 하부지”하며 따랐고 좋아했다.
세월은 참 빠르게 흘러 그 아이가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다. 건실한 청년의 모습이다. 시간이 껑충 뛰어넘은 것 같다. 그 아이가 두 세대 차이를 개의치 않고 할머니와 같이 살겠다고 제 짐을 싸들고 왔다. 뜻밖이라 놀랐지만 그의 말이 어무 가상하고 대견하고 고맙다. 할머니가 노인의 몸으로 혼자 사는 것이 위험하고 염려가 되서 옆에서 보살피고 돕고싶다는 말이다. 아들을 뛰어 넘어 손자가 할머니를 생각해주는 그 마음, 어찌 그리 기특한 생각을 했을까. 너무너무 예쁘고 사랑스럽다. 앞으로 할머니와 지내려면 불편한 일이 많을 텐데.
나 역시 생각해 보았다. 혼자 사는 것이 습관화 되었고 더구나 한국 말이 서툰 그가 영어가 서툰 할머니와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전혀 노인의 삶이 생소한 그와 서로 이해하며 적응할 수 있을까. 내 건강 상태로 두 식구 생활을 감당해 낼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예상치 않았지만 착한 성품을 가진 그와 어울려 젊음의 싱싱한 정기를 받아 늙음의 속도를 늦출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빠르게 변해가는 이 시대에 살면서 새로운 문화와 정보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비록 몸은 늙음을 거부할 수 없지만 정신 세계만큼은 뒤쳐지지 않고 젊게 사는 비결을 많이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를 통해 필요할 때마다 도움을 받고 있다. 컴퓨터와 휴대폰에 들어있는 무궁무진한 정보를 꺼내 구사할 수 있는 그를 보면서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역시 신 세대의 아이들은 다 닮은 꼴인것 같다. 자유분망함이 있고 정리하고 치우는 것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때때로 방 정리도 해줘야 하고 빨래도 해야하고 도시락도 싸줘야 한다. 육체 노동을 필요로 할 때가 많다. 그런 것들에는 사랑이 있고 기쁜 마음으로 하다보니 몸의 고됨은 반으로 줄고 기쁨과 보람이 배가 된다.
어려서부터 심성이 착하고 부모의 뜻에 벗어나지 않고 신앙생활에 진실했고 성실하게 공부에도 열심이었다. 취직을 위한 자격 시험을 마치고 일하기 전에 머리를 식히겠다고 하와이를 향해 여행을 떠난다. 그러므로 내게는 휴가를 준 셈이다.
언젠가는 직장을 얻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결혼도 하게 되면 내 곁을 떠나게 될텐데 그 때의 허전하고 섭섭함을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안된다. 그가 잘 사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 내 건강이 그때까지 견디어 줄지 의문이다. 어찌됬든 그는 자신의 길을 따라 갈 것이고 그것이 인생의 순리이니 앞으로 훌륭한 사회인으로 그 세대에 필요한 일꾼으로 기여하기를 축복한다.
“새로운 환경과 낯선 곳이지만 많은 일들을 접하며 즐겁게 앞으로 살아갈 에너지를 많이 충준하고 많은 추억을 마음에 담아가지고 건강한 모습을 당당한 하나님의 아들로, 할머니의 손자로 돌아와 만나자. 사랑하는 손자야 그 날을 기다리며 기도할께.”
지금도 후회스럽다
고승만
“아아 살았다.”
자유가 그리웠다. 청운의 꿈을 안고 고향을 탈출했다. 천신만고 끝에 38선을 넘어 청단에 도착하여 무의식중에 내뱉은 말이었다. 1947년 7월 1일의 일이다.
형님 집에 찾아가 며칠 동안 휴식을 취했다. 친자식처럼 사랑하시는 분이 서울시 부녀국장으로 계신다기에 인사차 방문했다.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이 청년운동 하지 말고 미국 유학을 보내 줄 터이니 공부를 하라는 것이다. 식생활 문제가 해결되어야 공부도 하게 될 것 같았다.
절친한 친구가 있는 전기회사로 찾아가 상의를 했다. 지금 할 일이 많으니 회사에 입사하라고 했다. 생각 끝에 입사하였다. 광산기술자가 송전선로 측량설계 반에서 일했다. 광산과 전기는 거리가 멀지만, 광산 기술의 기초가 측량이라 무척 바빴다. 지금은 화천이 이남 땅에 속하지만, 당시에는 이북 땅이어서 발전소에서 공급하는 전기의 송전이 중단되었다. 수색에서 창동에 이르는 송전선을 신설해야만 했다.
나는 회사 독신료에 기거했지만, 선친께서는 형님댁에 계셨는데 암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회사 부속 병원의 원장 선생님과 상의하여 입원케 해 드렸다. 3개월간 치료를 하셨는데 하루는 원장선생께서 “희망이 없으니 집으로 모셔가라.”고 했다.
회사의 일도 있고, 농구부에서 매일 운동도 하고, 청년회 일도 있고 무척 바쁜 날을 보내고 있었다. 49년 음력 8월 12일 오후에 형님댁 조카가 회사로 찾아왔다. 저녁에 집으로 오라는 연락이었다. 직감적으로 선친께 좋지 않은 일이 있는 듯하여 물었다. 전과 같다는 대답이었다. 그날 저녁 피치 못할 약속이 있어 내일 아침 일찍 간다고 하고 조카를 돌려보냈다.
아침에 형님댁으로 가니 선친께서는 이미 운명하시고 이 세상에는 안 계신다. 고향에서는 효자 형제라고 평이 좋았는데 순간 큰 죄를 지은 것 같고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불효자식이라는 딱지가 하나 붙은 것 같았다. 오래 병석에 계시면 효자가 되기 어렵다는 말이 있지만 63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일을 얼마나 후회하고 있는지 모른다.
항상 선친께서는 거짓말하지 마라. 도적질하지 마라. 남의 빚보증 서지 말라고 가르쳐 주셨다. 나는 자식들에게 지금도 가르치고 있다.
미안해요 형님
봉춘자
칠십 평생 살아오면서 내 가족과 다른 사람에게 미안한 일들이 많았다. 30년 전 군부 공장에서 통계원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도시와 농촌이 서로 협력하여 잘 살아보자는 의미에서 도시의 공장과 농촌의 농업사 간에 서로 돕는 일을 하였다. 우리 직장에서도 몇 사람이 농촌지원 사업을 이 년간 맡아보게 되었다. 봄이 오면 직장에서 돈을 선대 하여 농사에 필요한 비료와 농구를 제공했다. 가을이 돌아오면 오천 명이 넘는 공장직원 한 사람당 25kg의 입쌀을 제공하여 음력설 준비를 하였다.
우리 공장에서는 나의 시댁 조카가 책임을 지고 있는 조선인 농업사와 연계를 맺고 있었다. 봄이 오면 농촌에 돈을 보내주고 가을이면 트럭으로 입쌀을 운반하여 직공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하다 보니 매우 바빴다. 피곤하고 힘들기도 했다.
쌀을 운반하려면 일주일간 농촌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시집 형님네 집에서 지냈다. 늦가을이던 어느 날 아이들이 추워서 떨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애처로웠다. 왜 솜옷을 입지 않느냐고 물었다. 형님께 “겨울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느냐?”라며 좋지 않은 말투로 물었다. 형님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얼굴빛이 붉어지는 듯했다. 나는 늦게야 눈치를 챘다. “아차 내가 실수를 했구나.”싶었다. 내 말 한마디가 형님 마음에 상처를 준 것이 틀림없었다.
쏟아진 물을 담을 수 없듯이 내가 뭐 잘났다고 도와주지도 못하고 큰소리냐 하는 생각에 지금까지도 형님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지워지질 않는다. 마음을 털어놓고 용서를 바라지 못한 못난 자존심이 나를 울리고 있다.
돌아오는 해에 고향으로 가게 되면 꼭 찾아뵙고 형님의 아팠던 마음을 어루만지며 용서를 바랄 것이다. “미안합니다. 용서하세요.”라고 외칠 것이다.
짓궂은 말 한마디는 타인에게 상처로 남지만 아름다운 말 한마디는 기쁨과 즐거움을 전한다는 도리를 깨닫는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뉘우치게 되니 고맙고 감사하다.
요게벳 북한 돕기 운동
이신희
동기: 1997년 7월에 캐나다에서 사역하시는 목사님들이 중심이 되어 계속 흉년을 맞아 굶주림에 시달리는 북한을 돕기 위해 목사님 7명과 사모님 한 사람이 미화 오만불을 지참하고 평안남도 평양, 북한에 간다. 중국에서 오만불에 상당한 곡식을 구입해 기차에 실어 평양 인근에 도착한다. 우리 일행은 이 화물차와 곡식더미를 카메라에 찍고 어떻게 인근 마을에 배달되는 가를 확인한 후 일행은 또한 평안북도 한 마을에 가서 농가를 둘러보는데, 한 농가에 들려 육십 세 가까운 부인이 영양실조로 꼼짝없이 누워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음식이라고는 묽은 파란 풀죽이 전부였다. 나는 고향인 북한에 35년 만에 떠났던 조국 땅을 밟는 설레임은 잠시 나도 모르게 공포에 뒤덮인다.
그후 3년 지나 남편되는 이성갑 목사는 은퇴와 동시에 연변과기대 부총장으로 임명 받아 그는 북한 사역을 위한 개교회 방문이 시작된다. 극한 식량 사정을 각 교회에 알리면서 그들을 살리기 위한 모금 운동을 펼친다.
그러던중 LA교회에 초청받아 아침 설교를 해야하는 시간에 도저히 몸에 고통이 와서 병원으로 엠블런스에 실려가 조사한 결과 신장암 말기로 판정받고 에어 엠블란스에 담당의사와 $80,000고지서와 함께 귀국한다.
그러나 1년 동안의 투병 끝에 몸이 약간 회복되자 그는 다시 연변과기대를 찾는다. 거기서 그는 그의 마지막 설교를 남기고 귀국하여 극도로 악화되면서 다시 병원에 입원하고 나와 우리 3남매를 불러놓고 그의 마지막 말, 형제들과 우애있게-사랑으로 살고 그것은 우리 가족을 넘어 내 민족까지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는 2002년 5월 9일 자기 생일, 우리 딸의 생일에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뒤로 남기고 세상을 뜬다. 나는 그가 떠난 후 정신을 잃고 아무도 만나지 않은 채 2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 여기저기서 조금씩 모아진 헌금 $20,000을 연변과기대에 전달해야 하는데 내가 이일을 맡으면 좋겠다고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서 2002년에 그 헌금을 들고 연변과기대학에 가서 그곳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에 영어 교사로 지명이 되어 학교에서 발급된 비자로 북한 나진에 연변과기대 학생을 시켜 나진 고아원으로 곡식을 실어나르는 일을 하면서 북한 어린이 집을 방문 그 형편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중국 연변에서 택시를 타고 7시간 걸려 나진선봉에 들어가 호텔에 감시원이 인도하는 대로 고아원들을 방문하게 된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자연현상! 북한 보다 휠씬 북쪽에 위치한 연변이며 똑같은 기후인데 중국의 옥수수는 팔뚝보다 더 크고 북쪽 땅에서 나는 옥수수는 열매가 제대로 영글지가 않는다. 하다못해 시장 마당에 나오는 감자도 그 크기가 중국산 감자와 비교도 안되게 잘다.
과연 북한 땅은 저주를 받았는가? 이렇게 푼돈을 모아 북한을 돕다가 2003년에 이르러 북한에 관심있는 분들의 협조하에 복한돕기 기구를 창설하여 ‘요게벳’이라는 이름하에 사업을 확장하는 의미에서 첫해에 배형도, 김숙자, 박태몬 의원들이 연변과기대-나진 북한 어린이 집을 방문하게 된다.
그 이름 ‘요게벳’ 구약 출에굽기 2장에서 이스라엘이 애굽 노예 생활 중 가장 최악의 상황에서 자기의 낳은 자식을 물에 떠내려 보내는 어머니의 심정, 그러나 어머니의 믿음으로, 그의 영원한 사랑으로 아들 모세는 구원을 받고 그는 더 나아가 자기 민족을 암흑의 땅에서 광명의 세상으로 인도하는 새로운 역사를 여는 자로 탄생한다.
그리하여 ‘요게벳’ 정신은 북한을 돕는 손길이 요게벳의 심장으로 북한을 도와 도움을 받은 자들이 새 세계를 향해 애굽 땅에서 나와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 요게벳 심장으로 북한을 2000~2012년까지 캐나다 정부에서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 때 북한에 가는 것 까지도 막아 12년만에 이 사역이 끝난다. 그러나 요게벳 회원들은 그들을 향한 사랑과 기도가 계속 흘러가게 할 것이며, 요게벳이 모세를 사랑함 같이 그 사랑은 영원할 것이다.
<구부러진 길/이준관>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꽃을 보려면/정호승>
꽃씨 속에 숨어있는
꽃을 보려면
고요히 눈이 녹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있는
잎을 보려면
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있는
어머니를 만나려면
들에 나가 먼저 봄이 되어라
꽃씨 속에 숨어있는
꽃을 보려면
평생 버리지 않았던 칼을 버려라
<봄꽃을 보니/김시천>
봄꽃을 보니
그리운 사람 더욱 그립습니다
이 봄엔 나도
내 마음 무거운 빗장을 풀고
봄꽃처럼 그리운 가슴 맑게 씻어서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서고 싶습니다
조금은 수줍은 듯 어색한 미소도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피었다 지고 싶습니다
'미셀러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캐나다 퍼시픽(CP) 여자 오픈 2019 (0) | 2019.08.27 |
---|---|
가스페 2019 (0) | 2019.08.15 |
2019 봄학기 본 시니어대학 글쓰기 강좌 6 (5월 23일) (0) | 2019.05.23 |
2019 봄학기 본 시니어대학 글쓰기 강좌 5 (5월 16일) (0) | 2019.05.16 |
The 7th HOUSE CONCERT "Schubert & Arensky" (PRIME CHAMBER MUSIC SOCIETY) (0) | 2019.05.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