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김정규 목사를 추모하며
아빠를 생각하며 자녀들이 쓴 편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 아빠는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셨고 영혼 구원하는 것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가장 기뻐하셨습니다.
우리 아빠는 가정을 사랑했고 누구를 만나든 웃음으로 대해주는 우리 아빠였습니다.
우리들이 모르는 것이 있으면 같이 생각해 주시고 밝은 웃음으로 기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면 밤늦은 시간에도 아무리 먼 곳이라도 데리러 오셨습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고 싶다 하면 어디라도 데리고 가셨습니다. 한 명 한 명을 사랑해 주었던 우리 아빠. 아빠 보고 싶어요. 우리 아빠 고마웠어요. 아빠 잘 가요 하나님 나라에서 편히 쉬어요. 하나님 나라에서 만나요. 사랑해요.
주영, 주혜, 주성, 주희 올림”
고인인 김정규 목사와 저는 같은 1973년부터 1975년까지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습니다.
7년 전으로 기억합니다. 제가 속한 본 남성합창단이 온타리오의 작은 도시 티스워터(teeswater)에 있는 한 교회로 연주회를 하러 갔었습니다. 연주회를 마친 후 그 교회 식구들과 친선 축구 시합을 하였습니다.
축구 시합을 하는데 골대 뒤에서 열심히 공을 주워 나르는 나이 지긋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공이 골대를 지나 멀리 날아가면 숨을 헐떡이며 달려가 공을 주워 골키퍼에게 가져다 주셨습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경기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볼 보이를 하고 계셨습니다. 구태여 하라고 해도 귀찮아하며 하지 않을 일을 자진해서 하셨습니다. 머리가 희끗한 저 분은 누구실까 무척 궁금했습니다. 그 볼 보이를 하시던 분이 김정규 목사님이셨습니다. 목사님과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40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만난 날입니다.
이후 김 목사님과 가끔 만나거나 통화를 하면서 삶의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김 목사님은 대학을 마친 후 일본으로 건너가셨고 목사 안수를 받으시고 교회를 개척하여 교우와 이웃을 섬기시던 일을 들려주셨습니다. 개척한 교회를 다른 분께 넘겨주시고 동경으로 나와 오랫동안 노숙자들을 섬겼다고 하셨습니다.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음에도 늘 힘들고 외로운 이웃을 섬기며 사신 김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존경의 마음이 들곤 했습니다.
김 목사님의 얼굴에는 늘 미소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김 목사님이라고 삶의 애환이 왜 없으셨겠습니까. 그러나 김 목사님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안 하시고 늘 빙그레 웃으시며 따뜻한 마음을 나누어 주시던 분이셨습니다. 골대 뒤에서 말없이 공을 주워주시던 그 마음으로 세상과 이웃을 섬기며 사신 분이셨습니다. 일본에서 목회하실 때도, 동경에서 노숙자를 섬기실 때도 사랑으로 다가가 형제자매를 위로하였고 섬기셨습니다.
저는 요즈음 세상에서 소위 출세했다고 하는 사람들-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들, 돈을 많이 번 사람들, 유명하다는 사람들-보다는 평범하게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따뜻한 마음, 그윽한 눈길로 이웃과 함께, 이웃을 돌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존경스럽고 닮고 싶습니다. 김정규 목사님도 그런 삶을 사신 분들 중 한 분이십니다.
자신과 자신의 가정보다는 늘 교회와 이웃을 먼저 생각하신 김정규 목사님, 아무리 힘들어도 넉넉한 미소로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셨던 김정규 목사님,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기며 사셨던 김정규 목사님, 목사님이 계셔서 이 세상이 더욱 살만했습니다. 목사님이 계셔서 참 행복했습니다.
2021년 1월 25일. 閑素.
<김정규 목사의 삶 이야기>
김정규 목사의 자녀들 주영(25), 주혜(23), 주성(19), 주희(17)는 ‘우리 아빠는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였고 또 이웃과 자녀들을 가장 사랑한 사람이었고 복음을 전하려 애쓰시던 분이었다’고 회고합니다.
1995년경, 김정규 목사는 후쿠오카 인근, 한인들이 적은 작은 시골 마을에서 목회자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시골로 향했습니다. 아내 김명진 사모와 함께 예배당 없이 집에서 한인 5명과 같이 예배를 드리다가 7년 만에 돈 한 푼 없이 기적처럼 교회를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일본 야쿠자를 무작정 찾아가 ‘기증받은 땅에 교회를 지어주면 매달 갚겠다’고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했습니다. 김 목사의 순수한 신앙에 반한 조직의 수장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교회를 지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3년 뒤 한국에서 IMF가 터져 그 시골 마을에 고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김 목사는 교회 출석과 관계없이 200여 가정에 통역 등 도움을 주며 발 벗고 나섰습니다. 갖은 고생을 하며 시골에 예배당을 짓고 교회를 안정시킨 김 목사는 동경의 ‘거지들이 모이는 교회’가 폐쇄 위기라는 소식을 듣고 섬기던 교회를 다른 분에게 넘겨주고 동경으로 향했습니다.
동경의 거지교회의 예배환경은 최악이었습니다. 헌금이라고는 없었고 예배당을 찾는 노숙자들은 하나같이 거칠고 공격적이었습니다. 이전에 부임한 여러 목사가 두 달을 못 견디고 도망칠 정도였습니다. 지옥과 같은 예배공간을 물려받은 김 목사는 9년 동안 목회를 하며 교회를 안정화하는 또 다른 기적을 일궜습니다.
“이런 삶을 사는 게 힘들지 않으냐?” 주변 사람들의 질문에 김 목사는 항상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에 있겠느냐”며 싱글벙글 웃었습니다. 김 목사의 얼굴엔 언제나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김 목사와 가족은 안식년을 겸하여 토론토로 왔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그야말로 빈손으로 캐나다 토론토에 온 김 목사와 아내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고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도 배달 일을 계속했습니다. 김 목사의 아내 김명진 사모는 남편이 평생 변변한 식사도 한 번 제대로 못 하시고 고생만 하다 떠나셨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김정규 목사는 자신보다는 늘 이웃을 섬겼고 자녀들을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여유 있는 웃음으로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며 남에서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던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가진 건 없었지만 늘 넉넉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평생을 사셨던 분이셨습니다.
- 캐나다 토론토 한국일보 2021년 1월 25일자 기사 참조
김정규 목사는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어 1월 4일 토론토 노스욕 제너럴 병원에 입원하였고 ICU(Intensive Care Unit)에서 치료를 받던 중 1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閑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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