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시

누가 나무를 돌보지? Who will look after my tree?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23. 12. 24. 00:50

데릴은 사람들에게 친절할 것과 일상의 소중함을 알려주었다.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감각을 민감하게 갈고닦으며 유지해야 함도 일깨워 주었다. 그것이 자연이든, 사물이든, 관계든.
데릴과 내가 서로 알고 지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고작해야 이 년 반이나 될까. 대릴은 포트 이리에 살던 큰딸 가족의 이웃이었다. 그는 마치 내 옆집에 사는 이웃이라도 되는 양 가깝게 느껴졌다. 독일계 캐나다인인 그에게 서먹함이란 없었고 오히려 오랜 친구처럼 여겨졌다.
언젠가 딸아이는 옆집에 백인 내외분이 사시는데 따뜻하게 대해 준다며 웃었다. 한국 드라마며 영화를 보라며 자주 추천해 주신다고 했다. *파머즈 마켓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빵과 쿠키를 팔고 계셨다며 재미있어했다. 정원에서 키운 보랏빛 라벤더 꽃을 잘라 꽃다발을 만들어 주시며 향기가 좋을 것이라고 말했고, 쿠키를 구워 오기도 하셨다. 갓 태어난 제영이를 위하여는 아가용 모바일을 만들어 주셨다.
알고 보니 데릴은 나와 동년배로 은퇴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무척 들떠있는 듯 보였다. 현관 앞에는 직접 싹을 틔워 키운 오렌지나무 화분을 두었는데 잎이 성성했고 노란 열매 하나 동그마니 매달고 있었다. 무게를 견디며 가까스로 버티는 가녀린 가지가 애처로워 보였다. 뒤뜰에는 새 먹이통을 놓아두었는데 오색딱따구리가 포르르 날아와 쪼아 먹고는 맞은편 숲으로 날아가곤 했다.
데릴은 빵 굽기와 *버드 위칭, 그림 그리기와 오페라 감상, 정원 가꾸기와 오렌지 나무 돌보기, 아내와 함께 드라이브하기, 자녀들과 시간 보내기 등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마음껏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웃에게는 친절하고 따뜻했다. 누구에게든 윽박지르려 하지 않았고 은근한 미소로 대했다. 목소리는 작으나 부드러웠고 나긋나긋했다.
데릴은 할머니에게 배운 레시피로 요리하여 아내와 가족, 손님 대접하기를 좋아했다. 나중에는 책으로 엮어 레시피 북(The Slovak Recipes from My Grandmother's Kitchen by Darryl R. Stefanik)으로 펴내기도 했다. 손 글씨로 쓰고 삽화도 직접 그린 예쁘고 특별한 책이었다. 이 책은 지금도 아마존이나 이베이, 인디고 서점 등에서 팔리고 있다. 집으로 초대받아 간 적도 있었는데 아늑하게 꾸민 공간이 잘 정돈되어 있었고 벽에는 직접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 깔끔한 내외의 성격과 성향을 말해주는 듯하였다.
데릴에게는 다섯 명의 손자가 있었다. 손자들에게는 큰 산과 같은 존재였다. 웅숭깊은 사랑으로 손주들을 대하며 세상에 아름다운 것이 얼마나 많은지 보여주려 애썼다. 남자다움이 어떤 것인지, 왜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해야 하는지 표정과 행동으로 말해 주었다. 함께 책을 읽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면서 이웃과 세상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데릴에게 원치 않던 손님이 찾아왔다. 건강 진단을 받았는데 폐에서 암이 발견되었다. 의사의 소견은 암세포를 줄이기 위해 키모치료를 받은 후 수술 여부를 결정하자는 것이었다. 포트 이리에서 토론토에 있는 세인트 마가렛 병원을 오가며 키모를 받았다. 치료를 위해 병원을 다녀온 후 이삼일은 버거워했다. 머지않아 수술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한 줄기 희망, 그 빛을 바라보며 견뎌냈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기대와 다르게 흘러갔다. 십여 차례 키모를 끝냈음에도 담당 의사는 수술 일정을 잡아 주지 않았고 경과를 더 지켜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데릴은 수술을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기다리는 것이 자신을 더욱 힘들게 한다고 말했다.
치료를 받는 중에도 아내와 틈틈이 드라이브를 즐겼고 병문객들에게 빵과 쿠키를 구워 대접했다. 병세가 악화되어 걷기조차 힘들어졌음에도 캐네디언 오페라 컴퍼니(Canadian Opera Company)가 주관하는 공연에 가기로 했다며 아이처럼 좋아하기도 했다. 데릴은 대학에서 아트를 전공했기에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고 즐기는 일에 능숙했다. 숨어있는 경이로움을 찾아 표현하기를 기뻐했다.
데릴은 지난 10월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고등학교 시절 만나 가정을 이룬 아내 코닐리아와 아들(Franz Paul)과 딸(Anastasia), 다섯 손주(Bauer, Beckham, Beau, Jaxon, Xander)를 남겨둔 채.
데릴과의 만남을 통하여 나는 삶과 죽음에 대하여 전보다 더 깊이, 더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너나없이 우리 모두가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른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토록 고대하던 은퇴자의 삶을 시작해 보지도 못하고 떠나야 함을 보면서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미루지 말고 과감하게 실행해야 한다는 교훈을 가슴에 새겼다.
일 년 전 포트이리를 떠나 버펄로로 이사한 딸과 사위가 최근 코닐리아를 뵈러 갔다. 코닐리아는 남편을 떠나보낸 후 무척 힘들어한다고 했다. 살던 포트 이리의 집을 팔고 나이아가라 온 더 레이크 쪽에 집을 구하여 이사 갈 계획이라도 했다. 딸은 데릴이 그린 ‘아트 북'(Who will look after my tree?) 한 권을 가져다주었다.
올 한 해 나는 데릴을 떠나보낸 일을 잊지 못한다. 그는 살아있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고귀한지 알려주었고, 어떤 눈으로 세상과 이웃을 바라보아야 하는지, 어떻게 섬기고 사랑해야 하는지 보여주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 그린 그림으로 데릴이 말을 건네왔다.
“*대니, 멈추어 서서 주변을 바라봐 얼마나 아름다운지! 쉿, 가만히 귀 기울여 봐. 들려?”

* 파머스마켓(농민시장): 생산자가 직접 농산물을 출하하여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시장, 지역마다 열리는데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열리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 버드 위칭(bird watching): 새 보기 취미
* 대니(Danny)는 나의 영어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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