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termination·청년

무슨 일을 하든지 고비는 있습니다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01. 1. 5. 11:09
무슨 일을 하든지 고비(사물의 가장 긴요한 기회나 막다른 때의 상황)는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우리에게 닥쳐오는 고비를 잘 이겨내야 합니다.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거나 주저 않으면 원하는 수준까지 도달하거나 자신이 목표하는 바를 성취할 수 없습니다.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성취감을 맛볼 수도 없고 중도포기라는 불명예와 부끄러움, 패배의식만이 자신에게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어떤 일을 하다가 만나는 고비, 그 고비만 잘 넘기면 새로운 깨달음이 있고 평탄하고 쉬운 길이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등산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까마득히 보이는 산을 넘으면 또 다른 봉우리가 있고 또 그 봉우리를 넘으면 새로운 봉우리가 눈 앞에 펼쳐집니다. 이때 하나의 봉우리를 넘고 나서 힘이 들어 못 가겠다고 주저 않으면 목표(정상)에 도달하기는커녕 다음 봉우리 후에 펼쳐지는 장관을 볼 수도 없습니다. 한 봉우리 한 봉우리를 넘으면 봉우리를 넘을 때 마다 힘이 들기는 하지만 그 봉우리 너머 한단계 더 높은 곳에서 보고 느끼는 장관과 성취감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결국에는 목표지점까지 도달할 수 있게 됩니다.

필자는 이번 주말 두 번의 산행을 즐겼습니다. 토요일은 함께 일하는 동료 부장들과 북한산을 다녀왔고 일요일은 혼자 관악산을 갔었습니다. 산행을 할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가까운 거리에 오를 수 있는 산이 있다는 건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주어진 행운이요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국과 캐나다의 중부지역이나 동부지역에는 우리나라와 같은 아기자기 하고 아름다운 산이 없습니다. 산을 가고자 하면 비행기나 차로 몇 시간을 달려가야만 겨우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각 지역마다 아름다운 산들이 주변에 있어 전국 어디서든 마음만 먹으면 한 시간 안에 산을 오를 수 가 있습니다. 이번 주말산행 역시 멋진 산행이 되었습니다. 시월의 마지막 즈음 절정에 달한 울긋불긋한 단풍을 즐기며 산을 오를 때의 기쁨은 땀을 흘릴 때의 만족감과 어울러져 감동적이기 까지 했습니다. 산을 오를 때 다리가 뻐근해 오고 땀이 비오듯 쏟아지며 힘이 들기는 했지만 한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딛어 정상에 다다랐을 때 그 만족함과 성취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일요일 산에 오르던 중 어린 아이하나가 부모와 함께 산 중턱에 있는 바위에 앉아 마치 정상에 오른 것처럼 “야! 여기가 정상이다”라고 소리지르며 즐거워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보기에는 거기가 정상처럼 보였던 것이지요. 그곳까지 혼자 힘으로 올라온 아이의 모습이 대견스러웠습니다. 어린 아이의 힘으로 산 중턱까지 오르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터인데 말입니다. 혼자서 아이가 자란 후 진정 산에 오르는 기쁨을 알았을 때 중턱이 아닌 정상에 올라 정상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만족감과 성취감을 느낄 수 있게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산에 오르는 훈련을 하였고 또 자라면서 산이 있어 산에 오르는 기쁨을 충분히 알았을 터이니 말입니다.

산에 오를 때에만 고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라톤을 할 때에나 영어공부를 할 때에나 직장생활을 할 때에나 사업을 할 때도 고비는 늘 있습니다.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하여 포기하면 결코 목표한 지점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마라톤을 할 때 30km와 35km사이에서 큰 고비를 맞게 됩니다. 완주를 포기하게 되는 사람이 이 지점에서 가장 많이 생겨납니다. 필자가 지난 10월 3일 제 2회 통일마라톤 대회에 참가하였을 때 포기하고 싶은 유혹이 생겼을 때가 두 차례 있었습니다. 한번은 20km지점을 통과할 때였고 또 한번은 30km지점을 통과할 때 였습니다. 20km 지점을 지날 때 까지는 한번 뛰어본(지난해 하프코스는 완주해본 경험이 있었음) 뒤라 그런지 그리 힘들지 않게 달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20km를 지나는 지점부터는 슬슬 힘이 들기 시작하더니 25km지점에서는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이를 눈치챈 대회진행본부의 대형버스가 옆에 서더니 진행요원이 “타시겠어요?”라고 웃으며 말했을 때 ‘이번은 처음인데 다음에 다시 도전키로 하고 버스를 타버릴까’하는 유혹이 스치고 지나갔었습니다. 그 후 32km지점을 지날 때 다시 한번 내가 이런 컨디션으로 과연 완주를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두 번의 고비를 넘기고 나자 ‘나는 완주할 수 있고 반드시 완주할 것이다’라는 자신감이 생겨났습니다. 결국은 첫번째 도전에서 완주를 하고 나서 누리는 자신감과 정신적 만족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영어공부를 할 때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한국의 성인들에게 물으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어, 특히 회화를 잘하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는 다고 말합니다. 영어회화를 잘해 보겠다고 한두 번 시작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결과가 좋지 않은 것은 공부하는 방법이 잘못된 탓도 있지만 또 다른 원인은 고비를 넘기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의욕적으로 시작을 하였으나 한두 달 해보고 나니 발전도 없는 것 같고 또 남들 잠자는 시간, 남들 쉬는 시간에 혼자서 자신의 생활을 포기해가며 공부를 계속한다는 것이 힘이 들어 일정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중도에서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고비만 넘기면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없을 터인데 하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테니스를 할 때에나 골프를 할 때, 악기를 연주할 때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일정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고비가 닥치더라도 그 고비를 잘 넘기면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깨가 당긴다고, 배울 돈이 모자란다고, 피곤하다고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하게 되면 결국은 잘하는 수준에 도달할 수 없게 됩니다.

어느날 소크라테스에게 한 소년이 찾아와서는 “어떻게 하면 스승님과 같은 지혜와 통찰력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소크라테스는 한마디 말도 없이 해변가로 가서는 옷을 입은 채 바닷물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소년은 덩달아 바닷속으로 따라 들어 갔습니다. 목에 물이 찰랑찰랑하는 지점에 멈춰선 노 스승은 따라 들어온 소년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 보더니 소년의 머리에 손을 얹고는 물 아래로 쑥 밀어 넣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물속에서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치던 소년을 한참동안 놓아주지 않던 소크라테스는 소년이 힘이 빠져 더 이상 발버둥치지도 못하고 거의 죽게 될 지경에 이르렀을 때 혼자서 해변가로 걸어 나왔습니다. 물을 먹을 만큼 먹고 의식을 잃을 때까지 갔던 소년은 가까스로 몸을 추스리어 겨우겨우 해변가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해변가에서 마신 물을 다시 토해 낸 후 겨우 살았다 싶었을 때 소년은 자신을 죽음직전까지 몰고 갔던 노인을 찾았습니다. 해변 저쪽에서 바다쪽을 바라다보고 있는 노스승을 발견하고는 다가가 물었습니다. “어쩌자고 저를 물속에 빠트려 죽이려 하셨습니까?” 노 스승은 무심히 되물었습니다. “물속에 있을 때 무엇을 가장 필요하던가?”, “예, 숨 한번 쉬는 것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그 소년에게 처음이지 마지막으로 해준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숨 한번 쉬고 싶던 그 마음으로 지혜와 통찰력을 구해보게 그럼 얻어질 것일세.”

고비를 맞게 될 때 혼신의 힘을 다하여 이겨 내려고 노력하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죽을 작정을 하고 싸워서 이기지 못할 시련이나 고비는 결코 없습니다. 세상에 감당 못할 시련이나 고비는 결코 없습니다. 성경은 ‘감당할 수 있는 시련이나 시험 외에는 사람에게 주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기겠다고 마음을 먹고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면 그 고비는 얼마든지 이겨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만, 시험만 바라보면 눈 앞에 있는 고난과 시험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멀리 가고자 하는 길을 바라보십시오. 자갈길 가시밭길 저 너머 길게 뻗어져 있는 평탄한 길을 보십시오. 가야 할 길 다 가고 난 다음 얻게 될 만족과 기쁨을 생각해 보십시오. 고난과 시험을 이기고 목표에 도달했을 때 얻게 될 보람과 편안함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힘이 생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