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crifice·시니어

관악산 산행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04. 5. 24. 11:06

 

이날은 전날 마신 술 때문에 오전 11시가 넘어서야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서울대에서부터 시작한 산행. 산을 오르는 곳곳에 철쭉이 아름답게 피어있다. 초입에 만난 아카시아동산은 때가 이른 탓인지 본격적인 아카시아 향을 맡을 수는 없다.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힌 새색시 미소처럼 살짝 스쳐가는 향기만 잠시 느꼈을 따름이다.

 

아카시아 동산에서 연주암으로 오르는 길엔  두 군데의 약수터가 있어 좋다. 약수터에서 시원한 물을 한잔 들이키니 온 몸이 자르르 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산을 오른 뒤 한잔 쭉 들이키는 약수 만큼 맛있는 것이 또 어디 있으랴!

 

연주암에는 등산객들이 잠시 앉아 피로를 풀 수 있는 마루가 있다. 청마루에는 이미 등산객들로 가득하다.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해 아래 돌계단에 앉아 대웅전의 처마와 어우러지는 산자락을 감상한 한다. 한국의 미가 여기에 있다. 이런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수두룩하다. 안타까운 일이다. 마음의 문을 열고 길을 나서면 보고 느끼지 않으면 후회할 아름다움이 주위에 너무도 많은데 이 아름다움을 더 많이 보고 느낄 때 우리는 삶을 그만큼 더 사는 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예전에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나라도 아름다운 곳, 여행할 만한 곳, 볼 것들이 참으로 많다고. 구태여 해외여행을 가지 않더라도 우리나라에 있는 아름다움만 제대로 보고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라고.

 

어느 절이나 마찬가지 이겠지만 연주암에는 염불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염불소리를 들으면 편안함이 느껴진다. 비록 내가 기독교인이긴 해도 말이다. 나는 태어나서 한번도 절 밥을 먹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날은 괜스레 절 밥이 먹어보고 싶어 생전 처음으로 절 밥을 먹었다. 밥 한 그릇과 된장국 한 그릇, 다른 반찬 따위는 없다. 사람들이 어떻게 먹나 가만히 봤더니 밥과 국을 한 톨도 남기지 않고 싹 비운 후 본인이 먹은 그릇을 깨끗이 닦아 주방에 놓는다. 나 역시 그렇게 했다. 비빔밥에 재료가 많이 들어간 것도 아니고 된장국도 콩나물과 다시마를 넣고 된장을 풀어 끓인 것인데 담백하면서도 맛이 있다. 앞으로 시간이 맞으면(배식을 하는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으므로) 자주 절 밥을 먹을 생각이다.

 

나는 산을 혼자 다닌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혼자서 다닌다. 혼자서 다니면 사색을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로 남의 페이스에 나를 맞추어야 할 일도 없다. 대개는 빠른 걸음으로 혼자 산에 올랐다가 빠른 걸음으로 내려온다. 이날 역시 혼자서의 산행이었다. 연주암에서 사당 길로 내려오는데 60세 넘은 어른 한 분이 자신의 그룹과 동행하자고 채근이시다. 하산 길은 여러 명이 함께 내려가는 거라고. 마지못해 80세 노인께서도 포함된 이 그룹과 함께 했다. 과천쪽과 사당쪽으로 빠지는 삼거리에서 사당역 쪽으로 내려오는 길을 택하여 내려오다가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묻지마 길(?, 스스로 영동 최라고 소개 하시는 육십이 넘으신 어른이 그렇게 불렀다)로 빠져 가파른 바위를 타고 내려왔다. 내려오다 두 번인가 세 번을 쉬었다. 쉴 때마다 배낭에서 소주와 과일 그리고 김밥, 안주 등을 꺼내 놓는다. 음식을 싸 가지고 가 산에서 먹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영 거북하고 어색하다. 하지만 80세 어른이 주시는 잔이니 서너 잔 거푸 마다 않고 받았다. 인심은 역시 산 인심이 최고이다.

 

이 할아버지는 교장선생님으로 정년 퇴직을 하셨다고 했다. 키는 180센티 이상 되시는 것 같고, 인물도 잘생기시고, 멋진 등산바지에다 등산자켓, 베낭을 메셨는데 연세가 팔십이라고는 전혀 믿어지지 않는 정정한 청년할아버지이다, 본인은 거의 매일 연주암을 오른다고 하신다. 나는 연주암에서 월급을 준다는 말씀으로 농을 하셨는데 알고 보니 교장선생님으로 은퇴하셔서 받는 연금이 있다는 이야기시다.

 

사람은 이산화탄소를 내 뱉고 산소를 들이마시지만 나무는 이산화탄소를 들이마시고 산소를 내 뱉는다, 그래서 사람이 산에 있으면 가장 좋다 이러다 보니 80평생 감기 외 잔병치레라곤 없었다, 감기는 몸이 우리에게 주는 일종의 신호이므로 병이 아니다, 나이가 팔십이 되어도 딸 같은 삼십대 사십대 오십대 여자를 보면 껴안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그래서 가끔은 노래방에 가서 함께 산행을 한 젊은 여자를 껴안기도 하고, 뽀뽀를 하기도 한다,  산을 오를 때는 땀을 뻘뻘 흘리며 쉬지않고 계속해서 정상까지 오른다. 하지만 내려올 때는 자주 쉬면서 천천히 내려온다. 산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아서다. 또한 무릎관절에 무리를 주지 않아서 좋다 이상이 할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이다. 산을 내려와 소주 한잔 걸치는 자리에서 말이다.

 

지금도 매일 소주를 두 세 병씩 마신다는 할아버지청년 교장선생님. 매일 산에서 좋은 공기 마시니 정력이 넘쳐 나시는 것 같다. 나 역시 나이 팔십 세가 되었을 때 할아버지 청년 소리를 듣고 싶다. 지금부터 준비하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200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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