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crifice·시니어

보카치오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04. 5. 24. 11:11
 

   보카치오라는 이름의 커피점이 대구의 아리아나 호텔에 새로이 생겨 났다고 해서 가보기로 했다.

 

내부의 인테리어를 정갈하게 꾸며, 편안히 앉아 커피를 마시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대구에서 커피를 마실 만한 곳으로는 동구에 위치한 인터불고 호텔 로비의 커피점과 반월당 근처 풀하우스 이렇게 두 곳이 있는데(법원 뒤쪽의 아리아나라는 레스토랑이 있는데 이곳에서도 커피를 마실 수 있기는 하나 커피점이라기 보다는 식사를 주로 하는 곳이어서 두 곳이라고 표현했다)보카치오 역시 조용하고 안정적이며 낭만적인 분위기의 커피점이다. 막 내린 신선한 커피를 제공해 주고 있다.

 

보카치오가 매력적인 것은 괜찮은 테라스를 마련했다는 것. 유럽이나 북미쪽을 여행해 보면 테라스나 노천까페를 유난히 많이 볼 수 있는데 한국은 아직 낭만적인 테라스나 노천 까페를 찾아보기 힘들다. 서울의 강남쪽엔 그런 곳이 몇 군데에 있기는 하나 주변환경과 어우러져 이곳이구나 할 정도로 매력적인 곳은 아직 찾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대구의 보카치오는 그런대로 괜찮은 테라스와 노천 까페를 마련하고 있다.

 

노천까페에서 커피를 마시려고 앉았는데 막 내리기 시작한 비가 제법 굵어지기 시작한다. 날씨까지 쌀쌀해져 까페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진한 에스프레소 커피 한잔과 하우스 맥주(독일에서 수입한 듯한 껄쭉한 맥주, 그렇다고 흑맥주는 아니고) 한잔을 주문하여  사랑하는 친구와 나누어 마셨다.

 

안에서 테라스 쪽을 내다보는 풍경이 운치도 있고 낭만도 있다. 앞쪽으로 보이는 거리도 깨끗이 정돈 되었고, 길 양 옆 가로수들이 푸르름을 더하여, 주위에 배치한 화분들과 조화를 이룬다. 커피 값이 비싼 것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분위기나 서비스 나쁘지 않고 주문한 커피와 맥주 맛이 상큼하다.

 

커피점안에서 빵이나 쿠키를 직접 구워내 신선한 빵과 쿠키를 선택하여 먹을 수 있다는 것도 보카치오가 가진 장점이다. 왜 가게 이름을 보카치오라고 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기회가 오질 않아 다음으로 미뤘다. 보카치오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고 싶어 인터넷을 뒤져 그에 대한 정보를 캐보았다.

 

보카치오 (Boccaccio, Giovanni) [1313~1375.12.21] ; 파리 출생. 단테의 《신곡(神曲)》에 대해 인곡(人曲)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단편소설집 《데카메론》을 지어 근대소설의 선구자로 칭송된다. 사생아로 태어났는데 피렌체 상인이었던 아버지가 파리에 있을 때 어느 공주와 사랑을 맺어 생긴 자식이라는 말이 있다. 또 그가 소설을 쓰게 된 동기는 엄한 계모를 피하여 나폴리에 왔다가 로베르토왕의 서출(庶出)인 마리아(그의 작품에서는 피아메타라고 부른다)와 사랑하게 되어, 그녀를 위하여 소설가가 되었다는 낭만적인 이야기가 전하지만, 지금은 이 이야기가 모두 부정되고 있다. 그는 소년시절 스승의 영향으로 단테의 위대함에 대해 강렬한 인상을 받았으며, 평생토록 단테를 존경하였는데, 후에 《단테전(傳) Vita di Dante》(1364)을 집필한 일과 만년에 피렌체의 교회에서 《신곡》 강의를 한 사실 등이 이를 증명한다.

 

그가 문학자로서의 천재성이 성숙되어 《데카메론》의 전제가 되는 작품을 쓰고, 또 《데카메론》의 내용이 되는 갖가지 에피소드를 모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상업을 익히려고 간(13251328) 활기찬 항구도시 나폴리에서, 그리고 근무처인 바르디은행의 융자로 번영하고 있던 안주 왕가(王家)의 로베르토왕의 궁정에서 생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폴리에서 화려하고 방종한 향락생활도 직접 경험하였으나 1340년에 바르디은행이 파산하자 피렌체로 돌아왔는데, 상인도 못되고 문학자도 못된 초조감 때문에 생애의 중도에서 하나의 전환점에 서게 되었다. 그러던 중 1348년 페스트가 피렌체에 퍼지자, 많은 주민들이 죽어갔다. 서화(序話)에서 이를 상세히 그린 그의 대표작 《데카메론》은 이 해부터 1353년까지에 완성되었다. 이 작품은 당시의 전기(前期) 인문주의기(期) 문단의 냉담한 평가를 받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일반 민중으로부터는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으며, 바르디은행의 지점을 통하여, 외국에까지 퍼져나갔고 서민들 사이에 급속히 보급되어 거리에는 변사들이 그 이야기들을 늘어놓을 정도가 되었다. 인쇄술도 없었고, 종이도 귀한 시대에 설화 형식의 단편문학이 퍼진 것이다. 여기에 사용된 이탈리아어는 이른바 보카치오식 산문이라는 것으로서, 오래도록 산문의 본이 되었다. 그의 재능과 학식 ·웅변은 피렌체 시민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시정부는 그를 사절로 삼아 각지에 파견하였다.

 

인문주의자로서의 보카치오의 활동에는, 1350년에 밀라노에서 만난 페트라르카(13041374)의 영향이 크다. 또 페트라르카는 보카치오가 신앙적인 위로를 구하였을 때, 맹신(盲信)에 흐르는 것을 막아 주었으며, 수도사 차니의 협박으로 그의 모든 산문작품을 태워버리려고 하자 현명한 충고로 이를 저지하였다. 1373년 피렌체에서 《신곡》을 강의하였으나, 병 때문에 몇 달 후에 중단하고, 첼타르도에 은퇴하여 사망하였다. 작품으로는 《데카메론》과 초기의 연애소설 《필로콜로》 《피아메타》, 여성을 비난한 《코르바치오》, 운문소설 《필로스트라토》 《피에졸레의 요정》, 라틴어 논문 《이교(異敎) 신들의 계보》 등이 있다.

<200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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