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고 싶은 이야기

본 시니어 대학 글쓰기 강좌(2014년 봄학기)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14. 5. 3. 02:53

   본 시니어 대학 2014년 봄학기 강좌가 세 번째를 지나 네 번째 주로 접어들고 있다. 이번 학기에는 이미 등단(캐나다 한국일보 수필부문)하여 활발히 작품활동을 하시는 김광수 여사와 토론토의 다른 문학강좌에서 학생대표를 하셨던 이욱자 여사, 그리고 꾸준히 서정적인 글을 쓰시는 김정자 여사께서 합류하셨다. 기존의 멤버들과 함께 서스름없이 삶을 나누시며 글을 발표해주시니 고맙다.

 

  글쓰기 공부를 통하여 삶의 의욕을 찾았다며 열심히 글을 써 제출하시는 23년생 고승만 선생님, 클래스에 참여하여 글이 자꾸만 좋아지고 있다며 만족해하시는 이몽옥 선생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서서를 쓰신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최순우 선생님의 애제자 이한근 선생님, 작가였던 남편을 떠나보낸 후 자신도 글을 써보겠다며 살며시 웃으시는 박윤아 사모님, 중국 연변 출신 봉춘자 선생님, 이분들을 생각하면 힘이 난다.

 

   이몽옥 선생님은 글쓰기 덕분에 우울증도 없어지고, 남편과의 사이도 좋아졌다고 자랑하고 다니신다. 상당한 수준에 있는 세 분 여사님들도 이몽옥 선생님께서 소개하여 오시게 된 분들이다. 운영하는 클래스를 통하여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의욕적인 삶을 살게 된다고 하시니 감사한 일이다.


   일전에는 지난해 작고하신 수필가 변해명 선생님의 여동생 변해수 선생님께서 찾아오셨다. 토론토에서 규모가 큰 가톨릭 교회의 노인 대학으로부터 글쓰기 강좌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으셨단다.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조언을 얻으러 오셨다. 운전도 서투신데 미시사가에서 한 시간 이상을 헤매며 찾아오셨다고 했다. 그동안의 경험을 말씀드리고 가진 자료 중 일부를 전해드렸더니 고마워하신다. 수줍어하시며 년전 출판한 자신의 저서를 내어 놓으신다. 제목은 엄마의 편지’ 적절한 기회에 이책에 실린 글 한두 편을 소개할 예정이다

 

  지난주 과제 편지쓰기로 제출한 이욱자 여사의 글을 올려둔다.

   

어머니의 이름으로

이욱자

어머니

어느 수도사가 사람이 죽을 때의 모습은 살아온 모습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옥색 한복을 곱게 입으시고 단아게 주무시듯 관 속에 누워 계셨던 어머니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100세까지 무병장수하신 어머니의 죽음을 두고 모두들 복된 죽음이라고 위로를 해주시더군요. 하지만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도 어머니가 그리워 가슴이 저려옵니다.

어머니

이 세상에서 어머니의 이름보다 더 귀한 이름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무리 불러도 싫증나지 않고 마냥 불러도 부르고 싶은 이름입니다. 어머니를 생각만 해도 솟구치는 뜨거운 감정을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 밤 꿈에 보이더구나, 별일 없느냐? 보고 싶다. 한 번 다녀가거라.” 사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그리도 바빴는지, 이렇게 저렇게 둘러대며 전화를 받고서야 찾아가 문안 드리고는 선 걸음으로 돌아오곤 했으니 얼마나 서운하셨을까요.

어머니

꽃다운 20세 때 자란 환경과 동떨어진 곳으로 시집을 오셔서 아버지를 타작기계 발명가로, 7남매를 남부럽지 않게 키우시느라 손금 모두 닳아 없어지셨지요. 그 부지런 한 손으로 스무 명이 넘던 식구들을 위해 꼭두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산토끼처럼 뛰어다니시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가방 들고 출장만 다니셨던 아버지를 단 한번도 탓하지 않으셨던 어머니께서는 우리 집안의 기둥이셨어요. 가난한 이웃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 나누어 주시고 해산한 가정에는 쌀과 미역을 전해주시고, 군에 입대하는 청년에겐 주먹밥과 용돈까지 챙겨주셨으니 어머니는 과연 크게 베푸는 손을 가졌던 분이셨습니다.

어머니

비록 60세의 늦은 나이에 주님을 영접하셨지만 어머니는 믿음의 수장이셨어요. 정결한 마음으로 하루에 두 차례씩 시간을 정해놓고 가정예배를 드리시던 어머니의 믿음을 제가 어찌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어느 일요일 성경일독 한 사람에게 주는 상패를 전체 교인 중에서 홀로 받으시고 시편 23편을 큰소리로 암송하실 때에는 제 가슴이 벅차 오르며 저의 어머니임에 감사하고, 당신의 딸인 사실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작년에 어머니께서 출석하셨던 양무리 교회에서 어머니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예배를 드리지 못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되 하나님 말씀을 기준해서 효도하라.”목사님의 설교는 저의 정곡을 찔렀습니다. 성가대의 찬양을 들으며 어머니의 넓은 사랑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어머니

오늘 포도를 사왔습니다. 포도 알을 따면서 어머니와의 추억도 함께 따 고향집에 잠시 누웠습니다. 맛 있는 냄새로 온 집안이 흐뭇하고, 악기소리가 들리고, 웃음소리가 넘치던 우리 집은 즐거운 집이었어요. 지금쯤 세상 짐 다 내려놓으시고 하늘 나라에서 저희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실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아버지께서는 저희의 대학진학을 반대하셨습니다. 그 힘든 시기에도 끝내 아버지를 설득하여 사범대학에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입학금 마련을 위해 백금 손목시계와 양수기를 처분해 주신 어머니의 결단이 없었다면 어찌 오늘의 제가 있었겠습니까. 어머니 기억하세요? 여고 1학년 때의 일이었습니다. 시골에서 시내로 몸배바지 차림으로 찾아오신 어머니가 부끄러워 등을 떠밀어 돌려보낸 일 말입니다. 지금까지도 후회가 되어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머니

저도 어머님처럼 살다가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저를 떠나지 않으셨고, 저는 어머니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사랑합니다. 천국에서 다시 뵈올 때까지 안녕히

2014년 어머니의 큰딸 욱자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