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동인지 출판 기념회에 참석하려 하였다. 시간과 장소를 정확히 몰라 그냥 지나쳐 버렸다. 아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다음날 먼발치에서나마 얼굴을 대하니 반가웠다. 시인의 아내가 수줍은 미소로 다가와 시집을 전해주었다. 읽으니 눈물이 핑 돌았다. 한 편의 시에 우주가 담기고, 역사가 담기고, 한 개인의 삶도 오롯이 담길 수 있다고 생각하니 입이 쩍 벌어졌다. 마하가섭인 양 미소 지으며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었다.
시라는 대접은 파란 하늘에 떠가는 저 새털구름마저 다 퍼 담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건가.
(울타리 없는 정원/김준태)
그 와중에 세 번의 여름이 지나갔다. 가끔 달빛이 맨살을 끌다 갔고 라쿤 몇 마리, 깜깜 밤중의 한복판을 다투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술은 입에 대지 않았고 시는 쓰지 못했으며 돈은 벌리지 않았다. 몰락의 기운이 차올라 왔지만 겉으론 내내 평온했다. 천성 맑은 아내는 홀로 숨어 울다가도 이내 아닌 척. 창을 열며 하이 소프라노로 무어라 얘길 했지만 그 너머엔 까칠한 해바라기 한 줄기. 홀로 푸른 임종을 바라보셨을 아버지의 흐린 눈빛 한 줌. 자꾸 눈물이 나서 텃밭 고랑 가득 떨어진 방울 토마토만 터뜨렸다. 속절없이 우울하기만 했던 가계(家系). 늘 덜컹대고 흔들리던 지질한 삶의 문지방. 어둡고 싶은 유년의 상자를 열 때마다 천사의 미소를 발라주었지만. 사랑한다 사랑한다 마음을 후벼 주문을 외었지만.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다는 생각엔 절망하기도 했다. 그런 날엔 불현듯 술이 마시고 싶었지만 시를 꺼내 다시 아프자며 밤을 흔들고도 싶었지만. 화려한 인문(人文)은 빛바랜 치기. 나의 것은 본래 없던 것이므로 중심을 보자 떠나왔던 모든 이별은 무효. 내가 만질 수 있는 순수는 이대로 아픈 것 내가 바랄 수 있는 구원은 이대로 없는 것. 마르지 않는 눈물로 둘러친 지금 이대로 반쯤 살고 반쯤 죽는 것.
(감상문)
그 집 앞/김선화
‘솥뚜껑만한 맨손’이 말하는 멋쩍음을 확실하게 느껴보려고 가끔 읽고 있다. 단번에 다가오진 않았지만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하늘이 콩짝만하게 보인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도 있다. 작가는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 사람이다. (형상과 개념 p87)’라고 말씀하신 의미를 몸으로 느껴보려 애쓰고 있다. 선생님께서는 ‘사물에 대한 인식능력의 여하함’에 달린 것이라고 힌트를 주셨다.
마음의 소리
김준태
근래에 새로운 재밋거리에 빠졌다. 오디오가 먹통이 된 고물차 덕분이긴 하지만 운전 중 졸음을 쫓는 데는 묘책이다 싶어 시작한 놀이다. 혼자 놀음이지만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재미도 있고 의미도 가져 보자는 생각에 몇 가지 유형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예를 들면 꿈을 꾼 다음날은 꿈속에서 본 것들을 가지고 노는 식이다. ‘피라미. 송사리. 누치. 쏘가리. 모래무지. 각시붕어. 납지리. 가물치. 메기. 은어. 미꾸라지. 퉁가리. 뱀장어. 꺽지. 끄리. 빠가사리. 버들치. 버들붕어~’. 꿈속이긴 했지만 양지말* 개울의 한여름은 여전히 드넓고 뜨겁고 신났다. 그 곳에서 만나던 조무래기 내 동무들의 이름은 ‘종호. 정권. 승수. 은실. 연영. 영신…’. 서울서 전학을 와서 학교 근처 농장에 살던 여자애 이름은 생각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잡아서 병에 담기 무섭게 발그레 물들던 버들붕어 지느러미 같던 그 아이의 볼빛은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그 날은 아침에 일어나기가 무섭게 민물고기 이름들을 챙겼고, 종일 혼자 헤엄치며 외치며 놀았다. ‘피라미야. 송살아. 꺽지야. 납질아. 은어야. 버들아~’.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엔 깜박이등 재깍거림을 따라 불러보기도 하고, 핸들을 두드리는 손톱 소리 사이로 이름들을 던져 넣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닿곤 했다.
날이 가면서 사람이 짓는 목소리의 경이로움에 빠져들고 있다. 같은 단어지만 발성 호흡의 농담을 조금 바꾸거나 이어지는 단어의 간격만 살짝 건드려도 얼마나 다르고 어찌나 새롭게 다가오는지. 아침에 일어나면 처음 스치는 단어를 붙잡고 그날의 소리 행렬을 정하는 게 시작이 되었다. 이건 뭐 못 말리는 자기도취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굳이 명분을 찾자면 살아 움직이는 하루가 그대로 시가 되길 바라는 시인의 마음이랄까? “시의 행은 숨결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쓰는 사람의, 쓰고 있는 순간의 숨결에서부터 생산된다”는 Charles Olson의 말을 떠올려 본다. 좁은 차 안에서 이뤄지는 소리의 행렬이야 말로 시적 에너지가 고스란히 전달되는 완벽한 구조인 셈이다. 이른 바 시를 짓는 마음과 듣는 마음이 함께 어우러지는 공간.
곧 봄맞이 시낭송 행사가 꽃불처럼 번질 때가 되었다. 모국의 상황이지만 10여 년 전부터 시를 낭송하고 즐기는 모임이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다. 반가우면서도 내심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는 것은 토론토 우리 사는 마을에선 통 그런 소식을 접할 수가 없어서이다. 이왕에 나온 말이니 좀 덧붙이자면 시낭송(詩朗誦)이란 밝을 낭, 욀 송 즉 ‘낭랑한 목소리로 시를 외운다’는 의미로 낭송문학이라는 장르에 속하는 별개의 문학예술이며 적극적인 문학 작품 감상 활동이다. 다양한 표현 매체를 활용한 개성 있고 독특한 시낭송은 새로운 예술적 성취감을 줄 수 있는 퍼포먼스로서 자리매김되고 있다. 혹 그런 시낭송의 묘미를 느끼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당신의 마음속에 스며드는 소리 짓기를 시도해 보길 권한다. 가령 녹록하지 않은 이민 삶을 사느라 본의 아니게 목석간장의 부부가 되어간다면, 지금이라도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의 이름을 연이어 30번쯤 반복해서 불러보는 거다. 맑은 아침엔 가볍고 힘찬 숨으로, 힘들고 지친 퇴근길엔 낮고 느린 호흡으로, 그냥 그 순간 당신의 마음이 빚어내는 숨결로 불러 보라. 부르는 당신의 숨소리가 그 사람만을 위한 이 세상 하나 밖에 없는 감동 어린 시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당신이 아름답다.
(※ 양지말* =경기도 안양의 지역명칭)
< 김준태 - 시인, ‘시.6.토론토’동인 ‘시와 시론’으로 등단 >
펜클럽·한국신시학 회원 / 허균 문학상 수상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l 위의 글은 토론토에서 발행되는 2013년 4월 7일자 시사한겨례 1500자 칼럼에 실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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