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셀러니

이어령 선생님 고맙습니다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22. 3. 2. 00:19

이어령 선생님 고맙습니다. 하나님 품에서 편히 쉬십시오. 사랑하는 따님 이민아 목사님과 감격의 포옹을 하실 선생님 모습을 그려봅니다. 선생님을 추모하며 중앙일보에 실린 평론가 김주연 님께서 쓰신 글과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 이인화 소설가의 글을 올려놓습니다.

<평론가 김주연 ‘이어령을 추모하며’>

이어령, 그는 문화의 자부심이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문화라는 영역에 영예를 입혀준, 말의 정확한 뜻에서, 과감한 크리에이터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내가 아는 진정한 진보주의자였다. ‘진보’라는 말이 정치적으로 다소 폭넓게 쓰이는 것 같은데, 이어령이야말로 참다운 진보 그 자체였다. 그는 매일 새로운 말을 한다. 이미 있는 말도 그 의미를 뒤집고 작은 한 조각의 말마디에서 거대한 해석을 이끌어낸다. 그의 문화는 그렇게 진보적 형성을 이루어 가면서 정치나 경제에 종속된, 혹은 그 하위 영향권에 머무르는 자리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이끌고 나아가는 강력한 힘임을 끊임없이 발주시켜왔다. 이어령, 그의 이름은 그 자체로 한국의 독자적인 명예요 브랜드였다. 예컨대 그는 정치, 혹은 현실의 여러 가지 부끄러운 아이콘을 지워 버리는 흔쾌한 자부심이었다. 따라서 그의 생각에 동의하든 안 하든, 심지어는 그 내용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도 이어령을 말하는 것은 자랑스러운 문화행위일 수 있었다. 그런 그가 갔다. 허전하다.
‘말’이 천대받는 사회에서 이어령은 ‘말’을 살려준, 그러므로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계는 ‘말’로 이루어진 아름답고 엄중한 사회라는 것을 끊임없이 가르쳐준 고마운 선생이었다. 그가 고안해서 선포한 ‘디지로그’라는 ‘말’을 보라.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복합된 새로운 그 ‘말’ 속에는 아날로그의 전통 정서와 디지털의 미래 전망이 어우러진 현실이 움직인다. 근대 초기의 미분화된 취락 정서와 근대를 넘어서는 기술지향을 단번에 껴안는 놀라운 예지와 문학적 감각이 번득이지 않는가. 죽음을 바라보면서 자궁과 무덤의 영어 어휘의 공통성을 발견하고 이를 생명 자본론과 연결시키는 안목은 단순한 어휘론을 넘어서는 문명비평가로서의 혜안이라고 하기에 부족하지 않다. 그의 수사는 화려한 문장가라는 호칭에 충분히 값하지만 불세출의 에세이들이 함축하고 있는 내용의 깊이는 늘 이 시대를 앞질러 예감하여 왔다.
이어령은 그 문장과 비판의 예리함, 무엇보다 우상 파괴의 진보성으로 인하여 사람 자신마저 날카로운 인상으로 예단되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 그의 인간성은 따뜻했다. 한번 말하기 시작하면 좀처럼 그치지 않는 습관도 (아마 한 시간은 기본일 듯) 한몫하겠지만 그는 뜻밖에도 사람들에게 관대하다. 문학은 권력과 정치이념을 넘어서는 초월적 힘이라고 믿는 탓인지 바로 그 권력과 이념의 스펙트럼도 상당히 넓다. 그와 불온성 논쟁을 벌였던 김수영 시인을 향해 “우리는 같은 꿈을 꾸고 있다”라고 하는가 하면 정치적으로 곤경을 겪는 작가들을 말없이, 혹은 공개적으로 적극 변호하기도 했다. 언젠가 그는 비슷한 일화들을 내게 말하면서 대부분 말없이 지나갔다고 조금 쓸쓸해했다. 앞을 달리는 자의 외로움이라고 할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 품이 넉넉해 보이곤 했다
이어령, 그는 문학평론가였지만 문학평론에 배타적으로 집중하지는 않았다. 시, 소설, 드라마 등 문학의 모든 장르에 창작의 손길을 뻗었고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는 미시적/분석적 형태로 작품론/작가론에 머무르는 대신 그 전체를 아우르고 넘어서는 거시적 문명 비평의 길로 나아갔으며 우리 사회 전체의 문화적 품격을 일으켜 세웠다. 미시적 감성을 통하여 거시적 세계를 움직인, 과감한 이 시대의 크리에이터는 그 모든 창작활동이 신이 준 선물이었다고 겸양까지 하였다! 시대의 비평가 이어령 선생, 참으로 이 세상의 큰 동력 자체였다, 천국에서 잠시 쉬시기 바랍니다.

"죽음이라는 게 거창한 것 같지? 아니야. 내가 신나게 글 쓰고 있는데, 신나게 애들이랑 놀고 있는데 불쑥 부르는 소리를 듣는 거야. '그만 놀고 들어와 밥 먹어!' 이쪽으로, 엄마의 세계로 건너오라는 명령이지."-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김지수 지음 열림원

“아버님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계획했던 작업을 놓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의식을 놓지 않고 죽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까지 호기심을 갖고 지켜보려 했습니다. 너무도 슬픈 일이지만, 당신 의지대로 마무리한 것은 아버짐께 어울리는 멋진 엔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큰 아드님 이승무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헌팅턴 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이어령>

헌팅턴 비치에 가면 네가 살던 집이 있을까
네가 돌아와 차고 문을 열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네가 운전하며 달리던 가로수 길이 거기 있을까
네가 없어도 바다로 내려가던 하얀 언덕길이 거기 있을까.
바람처럼 스쳐간 흑인 소년의 자전거 바큇살이
아침 햇살에 빛나고 있을까.

헌팅턴 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아침마다 작은 갯벌에 오던 바닷새들이 거기 있을까.


"네가 간 길을 이제 내가 간다.
그곳은 아마도 너도 나도 모르는 영혼의 길일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지 우리 것이 아니다."
2022년 2월 이어령


<”너무 아름다웠어요. 고마왔어요.” 이어령의 마지막 말들(조선일보 기사에서 따옴)-지수 조선일보 문화전문 기자 씀>

지난 금요일(2월 18일) 평창동에서 호출이 왔다. 이어령 선생이 급히 찾으신다는 전갈이었다. 이즈음 선생은 잠옷을 입고 서재와 거실에 누워 내방객을 맞이하곤 했다. 아무런 의료적 장치에 기대지 않고 때가 되면 링거로 최소의 영양만 취했으나 골상의 윤곽이 다 드러난 채로도, 해야 할 일과 말을 명료하게 지휘해가셨다.
“이보게. 좀비 영화가 유행하니, 이젠 내가 좀비야. 숨만 붙어 있잖아(웃음).”
농담할 때마다 입 주위 근육이 당겨져 앙상한 이마 뼈가 도드라졌다. 보라색 담요를 덮고 비닐 강갑을 낀 스승과 숨이 붙은 채로 나는 함께 웃었다. 마른 해골조차 ‘있으면’ 그건 죽음이 아니라고, 진짜 죽음은 슬픔조차 ‘사라진 상태’라던 말씀을 상기하며.
그는 의사가 사망 선고를 내리기 전, 당신 스스로 사회적 사망 선고를 내리길 원하셨다.
“더 이상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네. 자네가 글로 내 사회적 죽음을 공표해 주게.”
당신의 ‘명명’으로 생사의 선을 넘고자 하는 선생의 기세는 완강했으나, 나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숨을 죽이고 간곡하게 고개를 저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그가 나지막이 말을 이어갔다.
“깜깜한 밤중이었네. 내가 가장 외롭고 괴로운 순간이지.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어. 누군가 하고 봤더니 노래하는 장사익이야. 그이가 집에서 쓰던 기계를 다 챙겨 와서 내 앞에서 노래를 불러줬다네. 1인 콘서트를 한 거야.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 한 곡이 끝나고 또 한 곡... 당신은 찔레꽃, 찔레꽃처럼 울었지… 너무나 애절했어. 너무나 아름다웠지. (침묵)이런 아름다운 세상이 계속됐으면 좋겠어.
글로 써주게. 사람들에게, 너무 아름다웠다고, 정말 고마웠다고.”
거실 깊숙이 2월의 햇살이 비춰 들었다.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입술로도 그는 이야기꾼이 산신령을 만나러 가던 이야기를 이어갔고, 천천히 넘어가는 태양의 온기를 즐겼다. 지난번 만남에서 김용호 작가가 선물한 머리에 전등을 단 ‘모던보이’가 당신을 닮았다고 하자, 어서 책상 위에 올려놓고 불을 켜라고 기쁘게 다그쳤다.
몸의 형상인 흰 도자기 위, 동그란 머리 전구에 불빛이 들어오자, 그가 흡족하게 말했다.
“저게 나야!”
살아온 대로 죽는다는 말은 진실이었다. 그는 그가 말하고 쓴 대로 마지막 시간을 쓰고 완벽하게 연출해 갔다. 항암 치료를 거부했고, 치료약을 일절 먹지 않았다.
그의 곁에서 선생의 손발이 되어 밀도 높은 밤낮을 함께 했던 김연 실장과 박용국 비서는 말했다.
“선생님을 정말 존경해요.”
뭐랄까. 그들이 말하는 ‘존경’이라는 단어는 일반인들이 멀리서 바치는 ‘존경의 찬사’와는 사뭇 결이 달랐다. 선생은 병원 중환자실에 갇히지 않고,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집에서 해를 쬐며 삶 쪽의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그것은 미련이 아니라 즐거운 책무였다.
임종을 앞둔 89세 노인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다 챙겨서 만나고 그들을 축복했는지, SNS에 올라온 ‘간증’을 보고 나는 인중에 땀이 고였다. 사지 팔팔하게 움직이는 나조차도 감당 못할 스케줄이었다.
마지막까지 손을 놓지 않은 것은 책이었다. 쓸 수 없을 때 쓴다던 세 줄 일기 ‘눈물 한 방울’을 비롯해 딸 이민아 목사에게 쓴 시와 여러 편을 모은 시집 ‘헌팅턴 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20편으로 기획된 ‘이어령 대화록’과 이미 앞서 대장정을 시작한 ‘한국인 이야기’ 등이 차례로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책을 쓰기 위해 인터뷰하는 동안 그는 여러 차례 내게 농담처럼 말했었다.
3월이면 나는 없을 거야.”
코로나가 맹위를 떨치는 시간이 지속될수록 나는 봄을 기다렸지만, 동시에 스승 없는 세상에서 눈을 뜨는 것이 두려워 봄이 더디 오길 바랬다.
오는 3월 15일은 따님인 고 이민아 목사의 10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임종 하루 전, 지난주 금요일(2월 25일). 선생은 출판사 열림원 김현정 주간에게 전화를 걸어 시집 ‘헌팅턴 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의 서문을 불러주었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는 받아 적지 못했다. 헌팅턴 비치는 살아생전 이민아 목사가 살던 미국의 바닷가였다.
‘헌팅턴 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네가 간 길을 내가 간다. 그곳은 아마도 너도 나도 모르는 영혼의 길일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지 우리의 것이 아니다. 2022년 3월 이어령.’

3월을 며칠 앞두고, 그렇게 가장 자기 다운 방식으로 3월을 명명한 후, 선생은 떠났다.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하잖아. 탄생의 그 자리로 가는 거라네. 죽음은 어둠의 골짜기가 아니야. 세계의 끝, 어스름 황혼이 아니지.” “눈부시게 환한 대낮이지요.”
“맞아. 5월에 핀 장미처럼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대낮이지. 장미밭 한복판에 죽음이 있어. 세계의 한 복판에. 생의 화려한 한가운데. 고향이지.” “그 말이 왜 이토록 아름다울까요?”
“어둠이 아니라 빛이라서. 밤이 아니라 대낮이라서 그렇지.”-’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2월 26일 정오 경. 환한 대낮에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채, 선생은 죽음과 따뜻하게 포옹하며 자신의 말을 완성했다.
소박하고 경이로운 한국말로 세계의 혁신을 명명했던 언어의 거인. 디지로그와 생명자본, 갓길과 굴렁쇠의 창조자. 참가자이자 감독의 역할로 생의 한가운데서 죽음의 전 과정을 아름다운 선물로 생중계했던 우리의 영원한 문화부 장관 앞에 end 마크 대신 꽃 한 송이를 올린다.

<이어령 선생을 보내며/이인화 소설가>

26일 이어령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날씨는 우중충했고 비가 내렸으며 바람이 심했다.
선생이 이어령 평전을 써달라고 부탁했기에 나는 돌아가시기 직전 가끔 찾아뵈었다. 병환이 위중했는데도 선생은 늘 웃으며 당신이 쓰고 계신 책 이야기를 하셨다. 체중이 절반으로 줄어든, 불행과 지혜가 아로새겨진 야윈 얼굴에 아름다움이 있었다. 미소 짓는 우수였고 기도하는 달관이었다.
메타버스, 생명 자본주의, 인간은 150만 년 동안 먹거리를 찾는 채집꾼, 호모 컬렉티쿠스였다, 그런 이야기만 하셨다. 새로 나온 플라톤 전집이 좋더라, 빨리 사 보라는 말씀도 했다. 나약한 감상의 말은 일절 없었다. 이런 무언의 충고를 하시는 듯했다.
난 곧 죽습니다. 하지만 아직 내 꿈을 쫓아갈 정열이 있지요. 그대는 어떤가요?
이어령은 한국 현대 문예 비평사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비평가이다. 그는 한 줌 지식인의 전유물이었던 비평을 모든 사람의 지식으로 만드는 커다란 변혁을 이룩했다. 인습적이고 권위적이었던 한국 비평에 참신한 수사학과 통찰을 도입했고 독자들은 그 비평에 열광했다.
이어령은 <저항의 문학> 같은 문학 비평에서 출발하여,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 지향의 일본인> 같은 문화 비평을 거쳐, <그래도 바람개비는 돈다> <디지로그 선언> 같은 문명 비평으로 나아갔다. 그는 인구의 절대다수가 농사를 지을 때 현대 문명을 이야기했고 사람들이 겨우 도시에서 살게 되었을 때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 가자고 외쳤다. 국문학자, 에세이스트, 언론인, 문화부 장관, 올림픽 기획자 등 얼핏 산만해 보이는 그의 이력은, 사실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비평이라는 꿈을 쫓아온 일관된 정열의 궤적이다.
부고와 함께 우리는 이어령의 생애를 정면으로 마주 보게 된다. 그리고 이어령의 지성과 에너지가 우리 사회의 얼마나 큰 부분을 채우고 있었던가를 깨닫고 놀라게 된다. 오늘날 한류 커뮤니티 1억 명에 빛나는 한국 문화가 이 위대한 해석자에게 얼마나 많이 의지해왔는가를 실감하게 된다.
나에게 이어령은 추억의 불빛으로 빛나는 신전이다. 7살 때 영남대 강당에서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문학사상’을 홍보하러 온, 검은 뿔테 안경 때문에 얼굴에 하얀 철 가면을 쓴 것 같은 신사의 강연을 처음 들었다. 29살에 장관을 지내고 대학에 복귀한 선생을 같은 과의 신임 교수가 되어 다시 보았다. 그리고 인생의 많은 것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 57살에 아직도 문학적 영감을 주는 큰 스승을 빈소에서 본다.
교정의 목련꽃이 아름답던 어느 봄날. 선생은 꺼벙한 얼굴의 신임 교수와 학생들 앞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디지로그는 리얼과 페이크의 경계가 무너지는 겁니다. 아날로그 세계가 진짜고 디지털 세계는 가짜가 아닙니다. 다 진짜입니다. 우리는 필멸의 존재입니다. 시간만이 우리를 구성하는 실체이기에 우리는 모든 세계에서 살 수 있습니다. 언젠가 ‘완전한 디지털 전환’이라는 말이 나올 겁니다.
우리는 결국 디지로그로 살아갑니다. 인생에서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우리는 역경에 익숙해집니다. 나락으로 밀려 떨어졌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강인한 정신력으로 다시 기어 올라갑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나는 그때 선생의 말을 반도 이해할 수 없었다. 햇살만이 이파리 사이로 쏟아져 아스팔트 위에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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