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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전당(김승희) 외

사랑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으리으리한 것이다 회색 소굴 지하 셋방 고구마 포대 속 그런데에 살아도 사랑한다는 것은 얼굴이 썩어 들어가면서도 보랏빛 꽃과 푸른 덩굴을 피워올리는 고구마 속처럼 으리으리한 것이다 시퍼런 수박을 막 쪼갰을 때 능소화 빛 색채로 흘러넘치던 여름의 내면, 가슴을 활짝 연 여름 수박에서는 절벽의 환상과 시원한 물 냄새가 퍼지고 하얀 서리의 시린 기운과 붉은 낙원의 색채가 열리는데 분명 저 아래 보이는 것은 절벽이다 절벽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절벽까지 왔다 절벽에 닿았다 절벽인데 절벽인데도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이 있다 절벽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 낭떠러지 사랑의 천당 그것은 구도도 아니고 연애도 아니고 사랑은 꼭 그만큼 썩은 고구마, 가슴을 절개한 여름 수박 그런 으리으리..

문학일기 2024.08.03

무현금(無絃琴)/박승민 외

그러고도 한참을 더 숨을 고른 뒤에야 바람의 환부(患部)를 조심스레 눌러봅니다. 닿는다는 건 자주 바뀌는 당신 마음의 일생을 따라 걷는 일인데 알 수 없을 것 같았던 가 마음까지도 모르겠네. 이젠 도통 모르겠네. 투덕거리며 자꾸 당신 쪽으로 귀를 조금 더 기대어놓는 일인데, 이쪽으로 되넘어오는 찌그러진 마음의 대야를 펴서 다시 전해보는 일인데… 이번에는 어떤 화성악도 흉내 내지 않았습니다. 수백 번을 꼬아서 만든 명주실의 소리들도 끊어버렸습니다. 마지막까지 참아 내던 들숨의 현(악기할絃)이 자신도 어찌하지 못하고 허공을 끊고 터져나갈 때, 그 순간의 단심(丹心)만을 생각하며 다시 어두워지는 구름의 공명통 속으로 올려 보냅니다. 한생이란 답장이 오기엔 너무 짧은 거리, 어느 늙수구레한 어둠이 붉은 나뭇잎 ..

문학일기 2024.07.23

새와 토끼(이산하) 외

또 카니리아가 노래를 멈추고 졸았다. 광부들이 갱 밖으로 탈출했다. 사장은 일의 능률이 떨어진다고 새의 목을 비틀어 입갱금지 조치를 내렸다. 광부들이 유독가스에 중독돼 쓰러져갔다. 전쟁 때 잠수함 속의 토끼가 죽자 선장의 명령으로 토끼 역할을 대신한 ’ 25시’의 작가 게오르규 병사가 떠올랐다. 누가 병든 새와 토끼를 넣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일찍 숨을 멈추었을 수도 있다. 지키는 자는 누가 지키나. 그 지키는 자는 또 누가 지키나. 이제는 먼저 아픈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낡은 것은 갔지만 새로운 것이 오지 않는 그 순간이 위기다. 아직 튼튼한 새와 토끼는 도착하지 않았다.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었습니다 모든 꽃은 자신이 정말 죽는 줄로 안답니다 꽃씨는 꽃에서 땅으로 떨어져 자신이 다른 꽃..

미셀러니 2024.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