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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시 한 편(박신규, 리산, 박철)

수억년 전에 소멸한 별 하나 광속으로 빛나는 순간이 우리의 시간이라는, 은하계 음반을 미끄러져온 유성의 가쁜 숨소리가 우리의 음악이라는, 당신이 웃을 때만 꽃이 피고 싹이 돋고 당신이 우는 바람에 꽃이지고 낙과가 울고 때로 그 낙과의 힘이 중력을 지속시킨다는, 하여 우리의 호흡이 이 행성의 질서라는 그런 오만한 고백은 없다네 바람에 떠는 풀잎보다 그 풀잎 아래 애벌레의 곤한 잠보다 더 소소한 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기 위해, 주름진 치마와 해진 속옷의 아름다움 쳐진 어깨의 애잔함을 만지기 위해, 수십년뒤 어느 십일월에도 순한 바람이 불고 첫눈이 내려서 잠시 창을 열어 눈발을 들이는데 어린 새 한마리 들어와 다시 날려 보내주었다고 그 여린 날갯짓으로 하루가 온통 환해졌다고 가만가만 들려주고 잠드는 그 하찮고..

문학일기 2024.04.21

아침에 시 한 편(이시영, 박성우, 안미옥)

아파트의 낡은 계단과 계단 사이에 쳐진 거미줄 하나 외진 곳에서도 이어지는 누군가의 필생 날이 맑고 하늘이 높아 빨래를 해 널었다 바쁠 일이 없어 찔레꽃 냄새를 맡으며 걸었다 텃밭 상추를 뜯어 노모가 싸준 된장에 싸 먹었다 구절초밭 풀을 매다가 오동나무 아래 들어 쉬었다 종연이양반이 염소에게 먹일 풀을 베어가고 있었다 사람은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궁금해 사람들이 자신의 끔찍함을 어떻게 견디는지 자기만 알고 있는 죄의 목록을 어떻게 지우는지 하루의 절반을 자고 일어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흰색에 흰색을 덧칠 누가 더 두꺼운 흰색을 갖게 될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은 어떻게 울까 나는 멈춰서 나쁜 꿈만 꾼다 어제 만난 사람을 그대로 만나고 어제 했던 말을 그대로 다시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징그럽..

문학일기 2024.04.18

아침에 시 한 편(이대흠)

사무쳐 잊히지 않는 이름이 있다면 목련이라 해야겠다 애써 지우려 하면 오히려 음각으로 새겨지는 그 이름을 연꽃으로 모시지 않으면 어떻게 견딜 수 있으랴 한때 내 그리움은 겨울 목련처럼 앙상하였으나 치통처럼 저리 다시 꽃 돋는 것이니 그 이름이 하 맑아 그대로 둘 수가 없으면 그 사람은 그냥 푸른 하늘로 놓아두고 맺히는 내 마음만 꽃받침이 되어야지 목련꽃 송이마다 마음을 달아두고 하늘빛 같은 그 사람을 꽃자리에 앉혀야지 그리움이 아니었다면 어찌 꽃이 폈겠냐고 그리 오래 허공으로 계시면 내가 어찌 꽃이 폈겠냐고 그리 오래 허공으로 계시면 내가 어찌 꽃으로 울지 않겠냐고 흔들어도 봐야지 또 바람에 쓸쓸히 질 것이라고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이라고 이 여윈 숲 그늘에 꽃 피어날 때의 꽃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작은 ..

문학일기 2024.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