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crifice·시니어

Get a life!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04. 7. 26. 16:51
       언제부터인가 혼자서 하는 일에 익숙해 졌다. 빨래하는 일, 이부자리 개는 일, 와이셔츠 다리는 일 등. 다만 집에서 밥 해먹는 일은 하지 않는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계속 그렇게 하다 보면 너무 구차해 질 것 같아서. 

 

40대 중반의 나이에 혼자 산다는 것. 남들은 다 힘들 거라고 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 만은 않다. 혼자 살기에 자유롭고 편한 게 더 많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많다. 나와 대화하는 시간이 다른 사람에 비해 배는 될 것이다. 사색할 여유가 있으므로 철학적이 된다. 늘 배우려는 자세를 가지니 육체와 정신이 조금씩이나마 발전하는 느낌이다. 새로운 것을 알려고 하는 욕심 또한 더 생긴다. 격물치지의 마음이다.

 

남을 위한 배려로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 자고 싶으면 자고 일어나고 싶으면 일어나고, 영화구경을 가고 싶으면 가고 말고 싶으면 말고, 운동을 하고 싶으면 하고, 여행을 하고 싶을 땐 그냥 훌쩍 떠나면 된다. 가족이 있다면 그렇게는 못하리라. 약간의 외로움을 가슴에 담은 채 혼자 마시는 커피향도 좋다.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렇듯 나는 혼자서 사는 삶에 익숙해 졌다.

 

어제 오후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하늘을 보니 구름이 많이 끼어있긴 하나 구름사이로 간간이 햇살이 비친다. 순간적으로 이불을 말려야겠다 싶다. 지난 초봄 잠시 말린 적이 있으나 이후 한번도 볕에 내놓지 않았으니 장마에 많이 눅눅해 졌을 것이다. 집에 도착하지 마자 이불을 옥상에 내다 널었다. 늦은 오후라 해도 해질녘까지는 제법 시간이 있다.    

 

누워서 쉬느니 산책이나 하자고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관악산행 버스에 올랐다. 막 서울대 입구 정류장(제대로 된 관악산입구가 이곳에도 있다)에 내리려는데 서울 경기지방은 오후 늦게부터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가 나온다. 요즈음 일기예보는 늘 정확 했는데 하늘을 보니 좀 전까지 비쳤던 햇살은 간데 없고 먼 하늘에서 검은 구름이 몰려온다. 금방이라도 비가 뿌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그냥 돌아갈까 하고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자주 오는 것도 아니고 가뭄에 콩 나듯 오는 산인데 되돌아 가기도 아쉽다. 하필 오늘 같은 날 이불을 말리겠다고 부지런을 떨게 뭐람.’ 

 

산은 언제나 사람을 빨아들이는 듯한 강렬한 유혹이 있다. 나무뿌리 냄새, 풀 냄새, 비에 젖은 땅 내음, 오전에 온 비에 늘어난 물, 눈 앞에 보이는 산등성, 정말 오르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 애라 모르겠다 기왕 왔으니 오르고 보자.

 

집을 나서기 전까지는 늘 망설여 지지만 산 입구에만 들어서면 언제나 잘 왔구나 여겨진다. 땅은 촉촉이 젖어있고, 길 양 옆 나무들은 물을 듬뿍 빨아들여 싱싱하기만 하다. 계곡엔 물이 넘쳐 흐르고, 물놀이 나온 개구쟁이들은 신발도 벗지 않은 채 깊은 웅덩이로 풍덩풍덩 다이빙을 한다. 한편에서는 아이들이 계곡 물에 튜브를 타고,  어른 들은 삼삼오오 먹느라, 오수를 즐기느라 정신이 없다.

 

 인공호수를 지나 조성중인 자연체험학습장을 거쳐 계곡으로 발길을 옮겼다. 늦은 오후라 인적이 뜸하다. 혼자서 오르기에 제격(안성맞춤)이다. 등산로 양 옆 빽빽한 나무는 푸르름을 더하고, 비에 젖은 돌에서 조차 생기가 느껴진다.

 

산은 세상살이에 시달린 몸과 마음을 끌어당겨 가까이 하지 않으면 몸살이 나게 하는 야릇한 매력을 지녔다. 마약이 그렇다고 했던가? 어쩌면 산은 마약보다 더한 매력이 있다. 예쁜 빛깔의 산새가 환영인사를 하고, 다람쥐는 두발을 나란히 곧추 세워 눈을 마주치더니 냅다 숲속으로 달라뺀다. 찌르레기, 뻐꾸기, 참새, 까마귀 울음에다, 물 흐르는 소리까지 자연의 소리가 귀를 즐겁게 한다. 국기봉 정상에 다다를 즈음 산을 내려오던 여인의 입에서 아무래도 비가 내릴 것 같아라는 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유유자적했다. 사색과 메모를 반복하며.

 

'비가 올 것 같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하늘을 쳐다보니 먹구름이 가득 드리웠다. 이를 어쩌지, 이 곳은 정상인데아무리 빨리 내려가도 40분은 걸리고 버스로 집에까지 가자면 1시간은 잡아야 하는데...’, 하나밖에 없는 요와 이불을 다 젖게 할 수은 없지 않은가7년 동안이나 잠자리를 제공해 준 소중한 것을.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앞뒤 돌아보지 않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뛰다 보니 길을 잘못 들어 안양쪽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국기봉으로 다시 기어올랐다. 언젠가 서두르다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내려와 낭패를 본일이 없었다면 정 반대 방향인 안양으로 내려 갔을 것이다. 잠시 헤맨 끝에 서울대 쪽 하산 길을 찾아 단숨에 뛰어 내렸다.

 

쉭쉭소리를 내며 달리니 사람들이 놀라서 길을 비켜 준다. 제발 비만 내리지 말아라. 하늘 한번 쳐다보고 냅다 달리고, 다시 하늘 한번 쳐다보고 냅다 달렸다. '기껏 산에 와서 좋은 생각, 좋은 구경 다 놓쳐 버리고 까짓 이불하나 때문에 이렇게 뛰고 달리나'싶어 꼴이 우습기도 하다. 까짓 이불하나 새로 사면 되지 이렇게 달릴 것 까지 있나! 하지만 정든 이불을 비에 젖게 할 수는 없다.

 

한참을 뛰고 달려 남겨 놓은 거리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튀어나온 돌부리에 걸려 '쿠당탕' 앞으로 나뒹굴었다. 반사신경으로 오른 손이 땅을 집지 않았다면 얼굴을 다 갈아 부쳤을 것이다. 엉겁결에 오른 손으로 속도를 죽인 후 왼쪽으로 나동그라졌다. 고등학교 유도시간에 배운 낙법이 제법 쓸모가 있었다. 잠시 멍하니 앉았다 손바닥을 표보니 검붉은 피가 흐른다. 흙과 함께 짓이겨진 왼팔과 정강이에도 피가 비친다.

 

이불 생각도 나고, 부끄럽기도 하고, 에그그! 정신을 차린 후 흐르는 계곡물에 다친 부위를 씻어내니 쓰리고 아프다. 아! 이게 무슨 헤프닝이람, 차라리 이불쯤 비에 젖게 하지.' 스스로 미련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20-30대도 아닌데 민첩함만 믿고 뛰고 달린 것이 후회스럽다. 나이가 40대 중반이면 포기할 건 포기하고, 즐길 건 즐기면 되는 것을!

 

 우리 인생도 이와 다를 게 없겠구나 싶다. 작은 아집 때문에, 실없는 욕심 때문에, 누리고 즐기고 나누어야 할 소중한 것은 보지도 느끼지도 못한다. 본다 한들, 느낀다 한들 누리지도, 즐기지도 못한다. 정말 소중한 것은 잊고 소중하지 않은 것에 시간과 정열을 쏟아 붓는다. 인생을 다 허비해 버린 뒤에야 후회 하곤 한다.

 

집에 돌아오니 손과 발에 찰과상을 입은 건 고사하고 발목까지 시큰시큰 하다. 뼈만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까짓 이불이 뭐길래산을 내려와 집에 도착 할 때까지도 비는 내리지 않았다. 뭘 그렇게 서두르나 서두르긴, 서둘러 될 일도 아닌 것을! 'GET A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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