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 15

나이아가라에서

저렇게 쏟아져 내리다가 언젠가 바닥을 드러내는 건 아닐까 내 안에 사랑의 강물도 굽이쳐 흘러 천둥소리로 쏟아져 내렸으면 좋겠네 흐르고 흘러도 마를 날 없었으면 참 좋겠네 세월이 흐를수록 자녀들 특히 손주들과 함께 하는 기쁨이 커져만 간다. 자녀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해도 좋고 함께 하는 시간이 소중하기만 하다. 언젠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후손들이 행복하고 보람 있게 살아가리라는 믿음의 증거를 확인하기에 더욱 그러하리라. 천둥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폭포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도 좋고 장엄하게 떨어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는 것도 좋다. 수선화와 튤립을 바라보는 것도 좋고, 흐르는 물소리 새소리를 듣는 것도 좋다. 나이아가라에서 사랑하는 아내, 사위와 딸들, 손주들과 함께 한 시간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

미셀러니 2024.04.30

아침에 시 한 편(이정록, 이설아, 신두호, 황영기)

까치설날 아침입니다. 전화기 너머 당신의 젖은 눈빛과 당신의 떨리는 손을 만나러 갑니다. 일곱시간 만에 도착한 고향, 바깥마당에 차를 대자마자 화가 치미네요. 하느님, 이 모자란 놈을 다스려주십시오, 제가 선물한 점퍼로 마당가 수도 펌프를 감싼 아버지에게 인사보다 먼저 핀잔이 튀어나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내가 사준 내복을 새끼 낳은 어미 개에게 깔아준 어머니에게, 어머니는 개만도 못해요? 악다구니 쓰지 않게 해주십시오. 파리 목숨이 뭐 중요하다고 손주 밥그릇 씻는 수세미로 파리채 피딱지를 닦아요? 눈 치켜뜨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버지가 목욕탕에서 옷 벗다 쓰러졌잖아요. 어미니, 꼭 목욕탕에서 벗어야겠어요? 구서렁거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마트에 지천이에요. 먼젓번 추석에 가져간 것도 남았어요. 입방정 떨..

문학일기 2024.04.21

아침에 시 한 편(박신규, 리산, 박철)

수억년 전에 소멸한 별 하나 광속으로 빛나는 순간이 우리의 시간이라는, 은하계 음반을 미끄러져온 유성의 가쁜 숨소리가 우리의 음악이라는, 당신이 웃을 때만 꽃이 피고 싹이 돋고 당신이 우는 바람에 꽃이지고 낙과가 울고 때로 그 낙과의 힘이 중력을 지속시킨다는, 하여 우리의 호흡이 이 행성의 질서라는 그런 오만한 고백은 없다네 바람에 떠는 풀잎보다 그 풀잎 아래 애벌레의 곤한 잠보다 더 소소한 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기 위해, 주름진 치마와 해진 속옷의 아름다움 쳐진 어깨의 애잔함을 만지기 위해, 수십년뒤 어느 십일월에도 순한 바람이 불고 첫눈이 내려서 잠시 창을 열어 눈발을 들이는데 어린 새 한마리 들어와 다시 날려 보내주었다고 그 여린 날갯짓으로 하루가 온통 환해졌다고 가만가만 들려주고 잠드는 그 하찮고..

문학일기 2024.04.21

아침에 시 한 편(이시영, 박성우, 안미옥)

아파트의 낡은 계단과 계단 사이에 쳐진 거미줄 하나 외진 곳에서도 이어지는 누군가의 필생 날이 맑고 하늘이 높아 빨래를 해 널었다 바쁠 일이 없어 찔레꽃 냄새를 맡으며 걸었다 텃밭 상추를 뜯어 노모가 싸준 된장에 싸 먹었다 구절초밭 풀을 매다가 오동나무 아래 들어 쉬었다 종연이양반이 염소에게 먹일 풀을 베어가고 있었다 사람은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궁금해 사람들이 자신의 끔찍함을 어떻게 견디는지 자기만 알고 있는 죄의 목록을 어떻게 지우는지 하루의 절반을 자고 일어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흰색에 흰색을 덧칠 누가 더 두꺼운 흰색을 갖게 될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은 어떻게 울까 나는 멈춰서 나쁜 꿈만 꾼다 어제 만난 사람을 그대로 만나고 어제 했던 말을 그대로 다시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징그럽..

문학일기 2024.04.18

아침에 시 한 편(이대흠)

사무쳐 잊히지 않는 이름이 있다면 목련이라 해야겠다 애써 지우려 하면 오히려 음각으로 새겨지는 그 이름을 연꽃으로 모시지 않으면 어떻게 견딜 수 있으랴 한때 내 그리움은 겨울 목련처럼 앙상하였으나 치통처럼 저리 다시 꽃 돋는 것이니 그 이름이 하 맑아 그대로 둘 수가 없으면 그 사람은 그냥 푸른 하늘로 놓아두고 맺히는 내 마음만 꽃받침이 되어야지 목련꽃 송이마다 마음을 달아두고 하늘빛 같은 그 사람을 꽃자리에 앉혀야지 그리움이 아니었다면 어찌 꽃이 폈겠냐고 그리 오래 허공으로 계시면 내가 어찌 꽃이 폈겠냐고 그리 오래 허공으로 계시면 내가 어찌 꽃으로 울지 않겠냐고 흔들어도 봐야지 또 바람에 쓸쓸히 질 것이라고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이라고 이 여윈 숲 그늘에 꽃 피어날 때의 꽃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작은 ..

문학일기 2024.04.17

아침에 시 한 편(나희덕)

이런 얘기를 들었어. 엄마가 깜박 잠이 든 사이 아기는 어떻게 올라갔는지 난간 위에서 놀고 있었대. 난간 밖은 허공이었지. 잠에서 깨어난 엄마는 난간의 아기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이름을 부르려 해도 입이 떨이지지 않았어. 아가,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엄마는 숨을 죽이며 아기에게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어. 그리고는 온몸의 힘을 모아 아기를 끌어안았어. 그런데 아기를 향해 내뻗은 두 손에 잡힌 것은 허공 한줌뿐이었지. 순간 엄마는 숨이 그만 멎어버렸다. 다행히도 아기는 난간 이쪽으로 굴러 떨어졌지. 아기가 울자 죽은 엄마는 꿈에서 깬 듯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달렸어. 아기를 살여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는 울음을 그치고 잠이 들었어. 죽은 엄마는 아기를 ..

문학일기 2024.04.16

모를 일이다

살면서 선물과 같이 그저 주어지는 것이 있다 젊은 시절 외국에 나가 공부하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꿈과 같이 공부할 기회가 주어졌다 캐나다에 와서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누가 외국에 산다고 하면 그건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캐나다에 살면서 일주일에 한두 번 미국 국경을 건너 다닌다 한때는 나이아가라 폭포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였다 누군가 다녀왔다는 이야기에 귀가 쫑긋해진 적도 있었다 지금은 나이아가라 폭포를 내 집 드나들 듯한다 사람이 살면서 어떤 일이 일어날 줄은 모를 일이다 꿈을 가지고 꿈을 좇다 보면 어느 날 그 꿈이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말 모를 일이다

문학일기 2024.04.14

시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예술의 세계는 느낌의 세계가 아닐까? 학생들에게 시를 읽고 느낌을 써보라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안목이 있어야 한다. 시를 보는 눈이 없으면 많은 시를 써도 향상이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이 안목이다. 그 수준에서 작품을 시작한다. 안목이 없으면 자기가 잘 쓰는지 못쓰는지 모른다. 심사를 할 수가 없다. 심사에는 척도가 있다. 보는 눈이 있어야 심사를 할 수 있다. 심사를 하면서 난처한 경우도 있다. 안목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생기는가? 안목은 읽기와 관련이 있다. 쓰기 전에 읽어야 한다. 이런 것이 좋은 작품이구나라는 걸 알게 되면 공부가 끝난다. 안목이 안 생기면 백 편을 쓰고 오 년 십 년을 써도 향상이 없이 그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다. 시의 재료는 언어인데 언어가 공짜이다. 시를 많이 읽어야 안..

문학일기 2024.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