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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프 여행기 1

캐나다에 와서 만난 인연들이 많은 편이다. 한 분 한 분이 내게는 소중한 인연이다. 박창호 선배도 그중 한 분이다. 선배는 나와 띠동갑으로 열두 살이나 위이신데 늘 친구처럼 대해주신다. 함께 골프도 하고 노래도 한다. 선배는 대한항공 전산실에서 일하다 캐나다로 건너왔다. 은퇴하시기 전까지 항공기 부품회사에서 일하셨다.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며 조용조용 말씀하신다. 선배와 사귐을 가지면서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펼치거나 목소리를 높이는 일을 본 적이 없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높은 지위에 올랐다거나 돈이 많다거나 하는 사람들보다는 평범하게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며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하며 매너가 좋은 사람을 좋아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선배도 내가 존경하는 분 들 중 한 분..

미셀러니 2022.06.08

뭐가 미안해

주말에만 만나는 아내는 “미안해”라고 말했다. ‘담장 밖 사역’을 하러 간다고 생각하라고도 했다. 어떤 분과 아침 식사를 함께하기로 했다며 문밖을 나서던 아내가 내 얼굴을 바라보며 한 말이었다. 만나는 분은 젊은 딸을 잃은 어머니였다. 아내에게 한동안 피아노를 배웠던 제자가 그분의 따님이었다. 제자는 서른 살에 세상을 떠났다. 아내의 입장에서 보면 제자를 떠나보낸 셈이고, 엄마의 입장에서 보면 시집도 안 간 딸을 잃은 셈이다. 아내는 딸을 잃은 엄마와 만나려고 이 년여를 기다려왔다. 딸을 먼저 떠나보낸 엄마가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제자를 잃은 슬픔과 딸을 잃은 아픔, 그 슬픔과 아픔을 서로 나누며 힐링의 시간을 가지려 한 것이다. 아내는 아침 식사를 함께한 후 숲을 걸을 예정이라고 ..

호박 모종

사월 하순으로 접어들 즈음 호박씨를 심었다. 모종으로 키워 텃밭에 내다 심을 요령이었다. 작은 화분에 씨앗을 하나씩 넣고 흙으로 덮었다. 창 쪽에 가지런히 놓았다. 며칠이 지나자 흙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새싹이 머리를 내밀기 시작한 것이다. 경이롭지 않은 생명이 어디 있으랴. 작은 씨앗에 담긴 생명이 세상에 나오는 순간이 경이로웠다. 싹을 틔운 후 하루가 다르게 키를 키우는 여린 녀석들이 귀하고 대견했다. 토론토는 겨울이 길다. 텃밭에 씨를 뿌리거나 모종을 내다 심으려면 오월 중순은 지나야 한다.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땅에 바로 씨를 넣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늘 작은 화분에 씨앗을 심고 실내에서 싹이 돋아나기를 기다린다. 싹이 트고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기 위함이다. 텃밭에 내다 심으려면 열흘..

시온에게 (2022월 4월)

아빠엄마와 함께 손주 시온이가 처음으로 교회에 나왔다. 예기치 못했던 일이라 더욱 반갑고 기뻤다.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하나님께서 부족한 이에게 이렇듯 소중한, 감격의 순간을 선물로 주셨다. 훗날 시온이에게 이야기 해주고 싶어서 편지 형태로 몇 줄 적어 둔다. 사랑하는 시온아 네가 처음 교회에 나온 날 할아버지는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모른다. 유모차를 밀고 교회로 들어오는 네 아빠엄마를 보는 순간 나는 숨이 멎는 듯 기쁘고 감격스러웠다. 당시 나는 시무장로였는데 예배부를 담당하고 있어서 교회로 들어오시는 교인들을 맞으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상상도 하지 않던 일이 내 눈앞에서 펼쳐졌다. 네 아빠와 엄마가 유모차를 밀고 교회당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당연히 네가 유모차에 타고 있었지...

봉황터

작은 자랑거리가 있어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 건 어쩔 수가 없는가 보다.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다물고 주머니는 열라고 하는데 주머니는 닫히고 입만 열리니 큰일이다. 해야 할 말 하지 말아야 할 말 가려 해야 하는데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불쑥 내뱉고 후회하기 일쑤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쳐야만 했던 동화 속의 주인공처럼 입이 근질근질하여 쓸데없는 말을 떠벌이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입이 무거워 해야 할 말만 하고 주변 사람들이 찾아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지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목이 뻣뻣하여 자기주장만 하는 사람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스럽다. 어떻게 하면 더 겸손해질 수 있는 건지. 나를 내세우기보다는 주변 사람들을 세워주고 주변 사람들이 나 때문에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드는 ..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

오 년도 더 된 어느 날의 이야기이다. 어머님을 모시고 사촌 형님과 함께 식구들이 모였다. 캐나다에서 모처럼 아들 내외가 왔다고 모인 저녁 식사 자리였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중 사촌 형이 아내에게 물었다. “동생 택희가 장로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동생이 장로가 된 후 뭐 달라지거나 나아진 것이 있습니까?” 침묵이 흘렀다. 모두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나로서는 그 적막이 길게만 느껴졌다. 머뭇거리던 아내가 입을 열었다. “네 좀 나아진 것 같습니다.” 휴~~ 다행한 일이었다. 만일 아내의 입에서 부정적인 말이 나오기라도 했다면 얼마나 창피할 노릇이었겠는가. 어머님께는 물론이고 동생들과 조카들에게까지.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스스로 묻는다. ‘당신은 더 나은 사..

언어 습관

“아빠 조커(joker)라는 영화 보셨어요? 안 보셨으면 한 번 보세요. 심리학을 공부하거나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참고가 될만한 내용이 있어 아빠도 좋아하실 거예요.”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토론토에 왔다가 폭설로 뉴욕으로 돌아가는 비행기가 취소되는 바람에 하루 더 토론토에 머무르게 된 딸아이가 해준 이야기였다. 토론토에서 매주 화요일은 대부분의 영화관이 할인 혜택을 준다. 전날 내린 폭설로 곳곳에 눈이 쌓인 이런 날에는 영화 한 편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성싶다. 영화의 내용은 코미디언을 꿈꾸는 주인공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 역)이 광대 일을 하면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일을 하던 아서는 폭행을 당하게 되고, 동료 랜들은 아서에게 권총을 선물한다. 아서가 아동병원에서 총을 가지..

미셀러니 2022.04.13

2022년 만우절에

사위(Dr. Thi Ho Shin)가 일하는 병원의 간호사들이 만우절에 아래와 같은 사진(이미지 합성)과 동영상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사진 속에 있는 손주 제영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제영아, 네 안에 어떤 잠재력이 존재하는지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은 새로운 세상으로 한 걸음 내딛는 거야. 이미 알고 있는 세상에서는 이미 알고 있는 삶만이 가능할 뿐이지. 새로운 길이 두려운 것은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기 때문이야. 삶은 멀리서 감상만 하는 풍경이 아니라 풍경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가는 도전이란다." "네 친할아버지 신재억 교수님과 나, 네 아빠 엄마는 새로운 풍경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도전을 했었고, 지금도 하고 있단다."

세계는 하나 이기도 하고 낯선 곳이기도 합니다

포트 이리 팀호튼에 앉아 오렌지 페코 티를 마십니다. 홀 가득 울려 퍼지는 음악은 BTS의 다이너마이트입니다. 포트 이리는 뉴욕주 버펄로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조용한 시골입니다. 은퇴한 사람들이 많이 찾는 동네이지요. 토론토와는 다르게 주민 다수가 백인이며 나이 드신 분들이 많습니다. 커피를 사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도, 카운터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서로 친숙한 사이인 듯 반갑게 인사를 건네거나 농담을 주고받습니다. 동양인이 드문 동네라 그런지 바라보는 눈길이 때로는 낯섭니다. BTS의 다이너마이트를 당연한 듯 듣고 있는 고집스러워 보이는 백인 할아버지의 모습도 낯설어 보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키에브 외곽 마을 부차를 방문했다는 소식을 인터넷 매체를 통하여 접합니다. 부차에 주..

친구야 수고 많았다

재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딸의 출산을 돕기 위해 인디애나로 왔고 3개월 가량 머무를 예정이라고 한다. 재호는 수많은 추억을 공유하는 깨복쟁이 친구로 지난달 가톨릭 의대 교수직을 내려놓았다. 젊은 시절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평생 몸담은 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한 것이다. 65세를 전후로 친구들이 하나둘 은퇴하기 시작한다. 재호도 그중 한 명이다. 우리 모두 잘살았다고, 잘 해냈다고 칭찬해 주고 싶다. 팬데믹이 유행하기 직전인 2019년 11월 친구 내외는 학회에 참석할 겸 북미 동부를 방문하던 중 잠시 토론토 집에 들렀고 나이아가라를 함께 다녀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