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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시 한 편(나희덕)

이런 얘기를 들었어. 엄마가 깜박 잠이 든 사이 아기는 어떻게 올라갔는지 난간 위에서 놀고 있었대. 난간 밖은 허공이었지. 잠에서 깨어난 엄마는 난간의 아기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이름을 부르려 해도 입이 떨이지지 않았어. 아가,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엄마는 숨을 죽이며 아기에게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어. 그리고는 온몸의 힘을 모아 아기를 끌어안았어. 그런데 아기를 향해 내뻗은 두 손에 잡힌 것은 허공 한줌뿐이었지. 순간 엄마는 숨이 그만 멎어버렸다. 다행히도 아기는 난간 이쪽으로 굴러 떨어졌지. 아기가 울자 죽은 엄마는 꿈에서 깬 듯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달렸어. 아기를 살여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는 울음을 그치고 잠이 들었어. 죽은 엄마는 아기를 ..

문학일기 2024.04.16

모를 일이다

살면서 선물과 같이 그저 주어지는 것이 있다 젊은 시절 외국에 나가 공부하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꿈과 같이 공부할 기회가 주어졌다 캐나다에 와서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누가 외국에 산다고 하면 그건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캐나다에 살면서 일주일에 한두 번 미국 국경을 건너 다닌다 한때는 나이아가라 폭포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였다 누군가 다녀왔다는 이야기에 귀가 쫑긋해진 적도 있었다 지금은 나이아가라 폭포를 내 집 드나들 듯한다 사람이 살면서 어떤 일이 일어날 줄은 모를 일이다 꿈을 가지고 꿈을 좇다 보면 어느 날 그 꿈이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말 모를 일이다

문학일기 2024.04.14

시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예술의 세계는 느낌의 세계가 아닐까? 학생들에게 시를 읽고 느낌을 써보라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안목이 있어야 한다. 시를 보는 눈이 없으면 많은 시를 써도 향상이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이 안목이다. 그 수준에서 작품을 시작한다. 안목이 없으면 자기가 잘 쓰는지 못쓰는지 모른다. 심사를 할 수가 없다. 심사에는 척도가 있다. 보는 눈이 있어야 심사를 할 수 있다. 심사를 하면서 난처한 경우도 있다. 안목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생기는가? 안목은 읽기와 관련이 있다. 쓰기 전에 읽어야 한다. 이런 것이 좋은 작품이구나라는 걸 알게 되면 공부가 끝난다. 안목이 안 생기면 백 편을 쓰고 오 년 십 년을 써도 향상이 없이 그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다. 시의 재료는 언어인데 언어가 공짜이다. 시를 많이 읽어야 안..

문학일기 2024.04.14

아침에 시 한 편(정우영, 장석남, 한재범, 남길순)

저이는 어찌 저리 환할까 기웃거리다가, 드디어 비결을 찾았어요. 날마다 맑은 햇살 푸지게 담아 드시더군요. 설거지한 그릇 널어 바짝 말리고는, 마당에 그득히 쏟아지는 햇살 듬뿍 듬뿍 받는 거에요. 햅쌀보다 맛나고 다디단 햇살들을요. 봄에는 봄 햇살, 여름에는 여름 햇살, 가을 겨울에는 갈겨울 햇살, 그릇에 넘치겠지요. 구름 그림자 놀다가고 바람은 자고 가고 꽃 냄새, 더엄 냄새는 쉬었다 가겠지요 이보다 영양가 높은 곡식 달리 더 있을까요. 아무리 비우고 비워도 또 고봉으로 쌓아지요. 위봉산 넘어온 저 햇살들, 자연의 찬란한 햅쌀들. 함께 사는 소양이하고만 먹기 아까워서 여기저기 기별합니다. 냥이야 제비야 집 나간 모란아, 밥 먹으러 와. 내가 햅살밥 지었단다. 큰 그림자와 작은 그림자가 나란히 뜀박질 중..

문학일기 2024.04.14

저 좀 도와주세요

아스팔트 위에 지렁이가 여럿 쓰러져있다 비가 온다고 좋아서 땅 위로 기어 올라왔다가 길을 잘못 들어 아스팔트 위에서 숨이 멎어 버린 것이다 얼어붙은 땅 밑에 웅크리며 살다가 봄이 와서 좋다고 비가 와서 좋다고 소리 지르며 땅 위로 올라왔는데 살만한 세상이 드디어 왔다며 환호성 치다가 눈 깜박하는 사이에 길을 잘못 들어 아스팔트 위에서 그만 질식해 버렸다 살아보려고 몸을 최대한 길게 늘어뜨려 밀고 또 밀어보았지만 아스팔트란 놈은 흙처럼 부드럽지 못하고 딱딱하기만 했다 힘을 다 빼버린 탓인지 아스팔트 위에 길게 늘어져 널브러져 있다 잠시만요 저 좀 도와주세요

문학일기 2024.04.13

벧세메스로 향하는 소

송아지 울음소리 귓전을 맴돌고 폭격으로 무너진 콘크리트 잔해처럼 등가죽을 짓누르는 멍에의 무게 언덕길 넘고 골짝길 지나 마침내 다다른 벧세메스 등짐 내려놓은 후 숨 한 번 못 고른 채 타들어가는 살점 두고 온 어린것 설핏 떠올린 후 핏발 선 두 눈 부릅뜨고 스러져 간 벧세메스 소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가! 그렁그렁한 눈망울에 비친 당신 모습

문학일기 2024.04.05

아침에 시 한 편(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자크 프레베르, 장석남)

솟구치는 말들을 한마디로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사전에서 훔쳐 일상적인 단어를 골랐다. 열심히 고민하고, 따져보고, 헤아려보지만 그 어느 것도 적절치 못하다. 가장 용감한 단어는 여전히 비겁하고, 가장 천박한 단어는 여전히 거룩하다. 가장 잔인한 단어는 지극히 자비롭고, 가장 적대적인 단어는 퍽이나 온건하다. 그 단어는 화산 같아야 한다. 격렬하게 솟구쳐 힘차게 분출되어야 한다. 무서운 신의 분노처럼 피끓는 증오처럼 나는 바란다. 그것이 하나의 단어로 표현되기를, 고문실 벽처럼 피로 흥건하게 물들고, 그 안에 각각의 무덤들이 똬리를 틀기를, 정확하게 분명하게 기술하기를, 그들이 누구였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 내가 듣는 것, 지금 내가 쓰는 것, 그것으로 충분치 않기에, 터무니없이 미..

문학일기 2024.04.04

스윗 하트

아침이면 일어나기 싫다, 옷 갈아입기 싫다, 데이케어 가기 싫다며 접시 깨는 소리로 우는 제영이 제영이가 울면 할머니 여기 마음이 아파. 며칠 전에 해 준 말 기억하고는 이제 제영이 안 울 거예요. 중얼거리며 훌쩍훌쩍 아빠와 함께 출근길 차에 오르는 제영이 두 살 반 친구들은 영어로 말하는데 저는 영어로 말하지 못해요 친구들이 하는 말 알아듣지도 못해요 집에서 한국말로만 말하거든요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놀지도 못해요 혼자서 시간을 보내요 할아버지 이게 뭐예요? 그게 뭔지 말해보렴 할아버지 저는 할아버지의 관심이 필요해요!

문학일기 2024.04.02

아침에 시 한 편(신현정)

신현정 시인의 시 몇 펀을 읽었다. 맑고 동심(童心)이 살아있는 시가 마음에 와닿는다. 신춘문예 같은 응모 전에 응모하려고 시를 부치러 갔다가 부치지 못하고 돌아오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시인과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긴 시간 고민하며 쓴 시가 심사위원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길 것 같은 생각이 왜 들지 않았겠는가. 시인이 쓴 시들은 순수하고 정겹다. 읽으면 마음이 맑아질 것 같아 더 자주 들여다보고 싶다. 시를 띄우려고 우체통까지 가서는 그냥 왔다 오후 3시 정각이 분명했지만 그냥 왔다 우체통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그냥 왔다 난 혓바닥을 넓게 해 우표를 붙였지만 그냥 왔다 논병아리로라도 부화될 것 같았지만 그냥 왔다 주소도 우편번호도 몇 번을 확인했다 그냥 왔다 그대여 나의 그대여 그 자리..

문학일기 2024.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