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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시 한 편(신현정)

이른 아침 한 떼의 참새들이 날아와서는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 날고 마당을 종종걸음치기도 하고 재잘재잘 하고 한 것이 방금 전이다 아 언제 날아들 갔나 눈 씻고 봐도 한 마리 없다 가지 저 가지가 반짝이고 울타리가 반짝이고 마당이 반짝이고 아 내가 언제부터 이런 극명(克明)을 즐기고 있었나 극명은 무엇인가. 매우 분명함이요, 깊은 속까지 샅샅이 똑똑하게 밝힘이다. 아주 뚜렷함을 본다는 것이니 시인은 이른 아침에 반짝임의, 광채의 현현(나타날顯나타날現)을 보았다는 것이겠다. 참새들이 무리를 지어 와서 가지를, 마당을 옮겨 난다. 그가 옮겨 나는 것에는 반짝임이 있다. ‘종종걸음’이나 ‘재잘재잘’이라는 시어로 표현하고 있다. 겉의 생김새나 모습 미미한 움직임, 소리에도 빛을 찾아낼 수 있다는 뜻일 테다..

문학일기 2024.03.27

리스본에서 보내온 사진

후배가 리스본에 있다며 사진을 보내왔다 사진을 보니 내가 리스본에 있는 듯 환했다 아내를 떠나보낸 슬픔을 겪었지만 회복하여 잘 사는 것이 좋았고 새로운 곳에서 행복해할 후배의 마음을 생각하며 좋았다 만약 그가 이십몇 년 전 이곳 노스 아메리카로 거처를 옮겨 오지 않았더라도 지금처럼 잘 살고 있을까 캐러비언에서 딸들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까 생각했다 아내가 살았을 때 무거운 짐만 이리저리 나르지 말고 둘이서 오붓이 여행을 떠났어도 좋았으리라 누구든 한 생애가 끝나기 전 행복한 시간을 함께 갖는 건 지구를 구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 아픈 마음 부둥켜안고 슬픔에 젖어 살거나 후회만 남을 삶 살지 말고 하고 싶은 거 하며 사는 건 지구를 구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 리스본에서 ..

문학일기 2024.03.22

아침에 시 한 편(문태준)

작약 꽃을 기다렸어요 나비와 흙과 무결한 공기와 나는 작약 꽃 옆에서 기어 돌며 누우며 관음보살이여 성모여 부르며 작약꽃 피면 그곳에 나의 큰 바다가 맑고 부드러운 전심(全心)이 소금 아끼던 작약꽃 보면 아픈 몸 곧 나을 듯이 누군가 만날 의욕도 다시 생겨날 듯이 모래에 어쩌면 그보다 일찍 믿음처럼 작약꽃 피면 (작약꽃 구근을 묻어두고 싹이 트는 것을 지켜보다가 나비며 흙이며 공기며 바람이 작약이 피기를 기다리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개화한 꽃의 세계는 바다와 같은 세계고, 정신의 경지로 보자면 전심이 있는 곳이 아닐까) 당신은 꽃봉오리 속으로 들어가세요 조심스레 내려가 가만히 앉으세요 그리고 숨을 쉬세요 부드러운 둘레와 밝은 둘레와 입체적 기쁨 속에서 (아침을 생각한다 시집의 첫번째 실린 시가 꽃이다) ..

문학일기 2024.03.22

불고기는 짰다

불고기는 짰다 간장을 너무 많이 부어버린 탓일까 음식을 만들어보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지 마트에서 사 먹거나 식당에서 픽업하여 먹기를 밥 먹듯 했는데 그 정도 맛이라도 냈으면 다행한 일이지 코닐리아 부인은 맛있다는 말만 되뇌이며 짠 불고기를 줄창 입으로 가져갔다 그동안 흘린 눈물에 간이라도 맞추려 했던 걸까 불고기와 나란히 놓인 잡채와 김치 잡채는 투명한 국수인지, 김치는 직접 만든 것인지 물었다 잡채는 투명한 국수 맞고, 김치는 시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신 것이라 했다 반년 전 남편을 떠나보낸 부인에게 위로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젊은 부부는 선물 준비하느라, 음식 만들 궁리하느라 분주했을 터였다 코닐리아 부인은 젊은 부부를 꼭 껴안으며 진한 눈물을 흘렸다

문학일기 2024.03.19

국적 상실 신고 한 날

캐나다 국적을 가지게 되었어요 왜 그랬느냐고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마음이 바뀌었어요 왜 캐나다에 살게 되었냐고요? 우주국 지구촌에 살고 싶어서요 여기는 나무 친구들이 많아요 그동안 미련이 남아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지 못했어요 태어나고 자란 조국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오늘 미루어 왔던 국적 상실 신고를 했어요 이제부터 저는 우주국 지구촌 사람이랍니다 (3/13/2024) 꽃이 진다고 아예 다 지나 꽃이 진다고 전화도 없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지는 꽃의 마음을 아는 이가 꽃이 진다고 저만 외롭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꽃 지는 저녁에는 배도 고파라

문학일기 2024.03.14

늦은 때는 없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그녀는 홀로 쓸쓸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던 차 딸이 말했다. 한 방송사에서 할머니 역을 찾는데 한번 도전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연기라고는 해 본 적이 없는데 할 수 있을까 싶어 며칠을 망설였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용기를 내어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딸의 도움으로 오디션 영상을 만들어 방송사로 보냈다. 당연히 떨어졌을 거라 생각하며 잊어버리고 지내던 어느 날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수많은 경쟁자들 중에서 후보로 뽑힌 것이다. 최종면접에서 그녀는 당당히 출연자로 확정되었다. 오디션 영상을 만들어 보내고, 오디션을 보고, 출연자로 선정되고, 몬트리올 인근 한 세트장에서 촬영을 하는 이 전 과정을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남편이 보내준 선물이라 생각..

미셀러니 2024.03.13

K 권사

P 선배는 3월 9일(토요일) 저녁 노스욕에서 있은 연주회에 몇 사람을 태워 함께 가기로 하였다. P선배 내외는 K권사를 태우고 패신저 픽업으로 갔다. 핀치 패신저 픽업에서 기다리기로 한 다른 두 명을 픽업하기 위해서였다. 미스 커뮤니케이션이 있었는지 패신저 픽업에는 세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배는 무척 난처했다. 정원이 다섯이라 여섯 명 모두를 태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때 K권사께서 다른 일이 있다며 슬그머니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무작정 앞으로 걸어갔다. 패신저 픽업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 분이 무안해할까 봐 그렇게 하신 것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기다렸던 세 사람 중 한 명이 떠나기를 바라거나 다른 해결책을 찾으려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차에서 내린 K권사는 누군가 자신을 태우러 와달라고 부..

미셀러니 2024.03.11

아침에 시 한 편(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움직인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문학일기 2024.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