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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와 토끼(이산하) 외

또 카니리아가 노래를 멈추고 졸았다. 광부들이 갱 밖으로 탈출했다. 사장은 일의 능률이 떨어진다고 새의 목을 비틀어 입갱금지 조치를 내렸다. 광부들이 유독가스에 중독돼 쓰러져갔다. 전쟁 때 잠수함 속의 토끼가 죽자 선장의 명령으로 토끼 역할을 대신한 ’ 25시’의 작가 게오르규 병사가 떠올랐다. 누가 병든 새와 토끼를 넣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일찍 숨을 멈추었을 수도 있다. 지키는 자는 누가 지키나. 그 지키는 자는 또 누가 지키나. 이제는 먼저 아픈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낡은 것은 갔지만 새로운 것이 오지 않는 그 순간이 위기다. 아직 튼튼한 새와 토끼는 도착하지 않았다.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었습니다 모든 꽃은 자신이 정말 죽는 줄로 안답니다 꽃씨는 꽃에서 땅으로 떨어져 자신이 다른 꽃..

미셀러니 2024.07.11

정지의 힘(백무산) 외

둥둥 걷어붙이고 아부지 논 가운데로 비료를 뿌리며 들어가시네 물 댄 논에 어룽거리는 찔레꽃 무더기 속으로 아부지 솨아 쇠르르 비료를 흩으며 들어가시네 소금쟁이 앞서가며 둥그러미를 그리는 고드래미논 가운데로 아부지 찔레꽃잎 뜬 논 가운데 한가마니 쏟아진 별 거기서 자꾸 충그리고 해찰하지 말고 땅개비 개구리 고만 잡고 어여 둥둥 걷어붙이고 들어오라고 아부지 부르시네 네가 온다는 날 마음이 편치 않다 아무래도 네가 얼른 와줘야겠다 바람도 없는데 호수가 일렁이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린다 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 세상을 멈추는 힘..

미셀러니 2024.07.09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다들 미안하다고 하더라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다들 미안하다고 하더라”/황인찬 공원에 떨어져 있던 사랑의 시체를 나뭇가지로 말았는데 너무 가벼웠다 어쩌자고 사랑은 여기서 죽나 땅에 묻을 수는 없다 개나 고양이가 파헤쳐버릴 테니까 그냥 날아가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날 꿈에는 내가 두고 온 죽은 사랑이 우리 집 앞에 찾아왔다 죽은 사랑은 집 앞을 서성이다 떠나갔다 사랑해, 그런 말을 들으면 책임을 내게 미루는 것 같고 사랑하라, 그런 말은 그저 무책임한데 이런 시에선 시체가 간데온데없이 사라져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다음 날 공원에 다시 가보면 사랑의 시체가 두 눈을 뜨고 움직이고 있다 사랑은 서로 오갈 수 있는 완전한 통행이면 좋겠지만, 다수의 사랑은 ‘일방통행’입니다. 마치 강물이 위에서 아래로, 바뀜이 ..

미셀러니 2024.06.25

마지막에 대하여(이정훈 외)

당신 아버지의 젊은 날 모습이 지금의 나와 꼭 닮았다는 말을 들었다 잔돌을 발로 차거나 비자나무 열매를 주워 들며 답을 미루어도 숲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나는 한참 먼 이야기 이를테면 수년에 한 번씩 미라가 되어가는 이의 시체를 관에서 꺼내 새 옷을 갈아입힌다는 어느 해안가 마을사람들을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서늘한 바람이 무안해진 우리 곁으로 들었다 돌아 나갔다 어깨를 두르고 있던 옷을 툭툭 털어 입으며 당신을 보았고 그제야 당신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으로 맞이하지 않아도 좋았을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마지막, 소리를 내면 지금도 목울대에 등자 같은 게 솟아오른다 아버지만 해도 그렇지, 건빵 한 봉지가 다였다니 나는 밤나무 꼭대기의 저녁 햇살이 성 엘모의 빛이었다고 기억한다 폭풍 속 배의 마스트에..

미셀러니 2024.06.17

아침에 시 한 편(박용재, 나희덕, 김사이)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저 향기로운 꽃들은 사랑한 만큼 산다. 저 아름다운 목소리의 새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숲을 온통 싱그러움으로 만드는 나무들은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이글거리는 붉은 태양을 사랑한 만큼 산다. 외로움에 젖은 낮달을 사랑한 만큼 산다. 밤하늘의 별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홀로 저문 길을 아스라이 걸어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나그네를 사랑한 만큼 산다. 예기치 않은 운명에 몸부림치는 생애를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그 무언가를 사랑한 부피와 넓이와 깊이만큼 산다. 그만큼이 인생이다. 심장의 노래를 들어보실래요? 이 가방에는 두근거리는 심장이 들어있어요 건기의 심장과 우기의 심장 아침의 심장과 저녁의 심장 두근거리는 것들은 ..

문학일기 2024.05.14

어머니와 아들

누운 듯 비스듬히 앉아 떨리는 손으로 커피잔을 드시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늙수그레한 아들 아들과 눈 맞추며 몸짓으로 말씀하시는 어머니 두 손 맞잡고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아장아장 걸음 옮기신다 뒷걸음치는 아들과 따르시는 어머니 튤립보다 고결하고 라일락 향기 보다 진한 두 사람 눈가에 이슬 고인다 어버이날을 하루 앞둔 2024년, 토론토의 한 이탈리언 식당에서 잘 자라 우리 엄마 할미꽃처럼 당신이 잠재우던 아들 품에 안겨 장독 위에 내리던 함박눈처럼 잘 자라 우리 엄마 산 그림자처럼 산 그림자 속에 잠든 산새들처럼 이 아들이 엄마 뒤를 따라갈 때까지 잘 자라 우리 엄마 아기처럼 엄마 품에 안겨 자던 예쁜 아기의 저절로 벗겨진 꽃신발처럼

문학일기 2024.05.08

잊지 못할 선생님(고승만,이순섭)

본 시니어 대학에서 강의해 온 지도 10년이 넘었다. 그동안 적지 않은 분들과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참가자들은 글을 쓰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고 차분히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글쓰기를 처음 접하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는데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글의 내용이 좋아졌고 읽기와 쓰기의 재미를 알아가시는 듯하였다. 안타깝게도 팬데믹 기간에는 수업을 진행할 수 없었다. 3~4년 공백 기간 중 함께했던 몇 분이 세상을 떠났다. 특별히 고승만 선생님이 잊히지 않는다. 팬데믹 기간 중이라 문병도, 문상도 제대로 할 수 없어 아쉽고 서운했다. 고승만 선생님은 글쓰기 반을 처음 만들고 수업을 시작할 때부터 함께 하신 분인데 외롭고 쓸쓸하게 세상을 떠나셨다는 생각을 하면 안타깝다. 할아버지는 내게 한소(閑..

미셀러니 2024.05.03

나이아가라에서

저렇게 쏟아져 내리다가 언젠가 바닥을 드러내는 건 아닐까내 안에 사랑의 강물도 굽이쳐 흘러천둥소리로 쏟아져 내렸으면 좋겠네흐르고 흘러도 마를 날 없었으면 참 좋겠네세월이 흐를수록 자녀들 특히 손주들과 함께 하는 기쁨이 커져만 간다. 자녀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해도 좋고 함께 하는 시간이 소중하기만 하다. 언젠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후손들이 행복하고 보람 있게 살아가리라는 믿음의 증거를 확인하기에 더욱 그러하리라.천둥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폭포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도 좋고 장엄하게 떨어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는 것도 좋다. 수선화와 튤립을 바라보는 것도 좋고, 흐르는 물소리 새소리를 듣는 것도 좋다. 나이아가라에서 사랑하는 아내, 사위와 딸들, 손주들과 함께 한 시간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을 향기로..

수필·시 2024.04.30

아침에 시 한 편(이정록, 이설아, 신두호, 황영기)

까치설날 아침입니다. 전화기 너머 당신의 젖은 눈빛과 당신의 떨리는 손을 만나러 갑니다. 일곱시간 만에 도착한 고향, 바깥마당에 차를 대자마자 화가 치미네요. 하느님, 이 모자란 놈을 다스려주십시오, 제가 선물한 점퍼로 마당가 수도 펌프를 감싼 아버지에게 인사보다 먼저 핀잔이 튀어나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내가 사준 내복을 새끼 낳은 어미 개에게 깔아준 어머니에게, 어머니는 개만도 못해요? 악다구니 쓰지 않게 해주십시오. 파리 목숨이 뭐 중요하다고 손주 밥그릇 씻는 수세미로 파리채 피딱지를 닦아요? 눈 치켜뜨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버지가 목욕탕에서 옷 벗다 쓰러졌잖아요. 어미니, 꼭 목욕탕에서 벗어야겠어요? 구서렁거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마트에 지천이에요. 먼젓번 추석에 가져간 것도 남았어요. 입방정 떨..

문학일기 2024.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