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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시 한 편(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자크 프레베르, 장석남)

솟구치는 말들을 한마디로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사전에서 훔쳐 일상적인 단어를 골랐다. 열심히 고민하고, 따져보고, 헤아려보지만 그 어느 것도 적절치 못하다. 가장 용감한 단어는 여전히 비겁하고, 가장 천박한 단어는 여전히 거룩하다. 가장 잔인한 단어는 지극히 자비롭고, 가장 적대적인 단어는 퍽이나 온건하다. 그 단어는 화산 같아야 한다. 격렬하게 솟구쳐 힘차게 분출되어야 한다. 무서운 신의 분노처럼 피끓는 증오처럼 나는 바란다. 그것이 하나의 단어로 표현되기를, 고문실 벽처럼 피로 흥건하게 물들고, 그 안에 각각의 무덤들이 똬리를 틀기를, 정확하게 분명하게 기술하기를, 그들이 누구였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 내가 듣는 것, 지금 내가 쓰는 것, 그것으로 충분치 않기에, 터무니없이 미..

문학일기 2024.04.04

스윗 하트

아침이면 일어나기 싫다, 옷 갈아입기 싫다, 데이케어 가기 싫다며 접시 깨는 소리로 우는 제영이 제영이가 울면 할머니 여기 마음이 아파. 며칠 전에 해 준 말 기억하고는 이제 제영이 안 울 거예요. 중얼거리며 훌쩍훌쩍 아빠와 함께 출근길 차에 오르는 제영이 두 살 반 친구들은 영어로 말하는데 저는 영어로 말하지 못해요 친구들이 하는 말 알아듣지도 못해요 집에서 한국말로만 말하거든요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놀지도 못해요 혼자서 시간을 보내요 할아버지 이게 뭐예요? 그게 뭔지 말해보렴 할아버지 저는 할아버지의 관심이 필요해요!

문학일기 2024.04.02

아침에 시 한 편(신현정)

신현정 시인의 시 몇 펀을 읽었다. 맑고 동심(童心)이 살아있는 시가 마음에 와닿는다. 신춘문예 같은 응모 전에 응모하려고 시를 부치러 갔다가 부치지 못하고 돌아오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시인과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긴 시간 고민하며 쓴 시가 심사위원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길 것 같은 생각이 왜 들지 않았겠는가. 시인이 쓴 시들은 순수하고 정겹다. 읽으면 마음이 맑아질 것 같아 더 자주 들여다보고 싶다. 시를 띄우려고 우체통까지 가서는 그냥 왔다 오후 3시 정각이 분명했지만 그냥 왔다 우체통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그냥 왔다 난 혓바닥을 넓게 해 우표를 붙였지만 그냥 왔다 논병아리로라도 부화될 것 같았지만 그냥 왔다 주소도 우편번호도 몇 번을 확인했다 그냥 왔다 그대여 나의 그대여 그 자리..

문학일기 2024.03.30

아침에 시 한 편(신현정)

이른 아침 한 떼의 참새들이 날아와서는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 날고 마당을 종종걸음치기도 하고 재잘재잘 하고 한 것이 방금 전이다 아 언제 날아들 갔나 눈 씻고 봐도 한 마리 없다 가지 저 가지가 반짝이고 울타리가 반짝이고 마당이 반짝이고 아 내가 언제부터 이런 극명(克明)을 즐기고 있었나 극명은 무엇인가. 매우 분명함이요, 깊은 속까지 샅샅이 똑똑하게 밝힘이다. 아주 뚜렷함을 본다는 것이니 시인은 이른 아침에 반짝임의, 광채의 현현(나타날顯나타날現)을 보았다는 것이겠다. 참새들이 무리를 지어 와서 가지를, 마당을 옮겨 난다. 그가 옮겨 나는 것에는 반짝임이 있다. ‘종종걸음’이나 ‘재잘재잘’이라는 시어로 표현하고 있다. 겉의 생김새나 모습 미미한 움직임, 소리에도 빛을 찾아낼 수 있다는 뜻일 테다..

문학일기 2024.03.27

리스본에서 보내온 사진

후배가 리스본에 있다며 사진을 보내왔다 사진을 보니 내가 리스본에 있는 듯 환했다 아내를 떠나보낸 슬픔을 겪었지만 회복하여 잘 사는 것이 좋았고 새로운 곳에서 행복해할 후배의 마음을 생각하며 좋았다 만약 그가 이십몇 년 전 이곳 노스 아메리카로 거처를 옮겨 오지 않았더라도 지금처럼 잘 살고 있을까 캐러비언에서 딸들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까 생각했다 아내가 살았을 때 무거운 짐만 이리저리 나르지 말고 둘이서 오붓이 여행을 떠났어도 좋았으리라 누구든 한 생애가 끝나기 전 행복한 시간을 함께 갖는 건 지구를 구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 아픈 마음 부둥켜안고 슬픔에 젖어 살거나 후회만 남을 삶 살지 말고 하고 싶은 거 하며 사는 건 지구를 구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 리스본에서 ..

문학일기 2024.03.22

아침에 시 한 편(문태준)

작약 꽃을 기다렸어요 나비와 흙과 무결한 공기와 나는 작약 꽃 옆에서 기어 돌며 누우며 관음보살이여 성모여 부르며 작약꽃 피면 그곳에 나의 큰 바다가 맑고 부드러운 전심(全心)이 소금 아끼던 작약꽃 보면 아픈 몸 곧 나을 듯이 누군가 만날 의욕도 다시 생겨날 듯이 모래에 어쩌면 그보다 일찍 믿음처럼 작약꽃 피면 (작약꽃 구근을 묻어두고 싹이 트는 것을 지켜보다가 나비며 흙이며 공기며 바람이 작약이 피기를 기다리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개화한 꽃의 세계는 바다와 같은 세계고, 정신의 경지로 보자면 전심이 있는 곳이 아닐까) 당신은 꽃봉오리 속으로 들어가세요 조심스레 내려가 가만히 앉으세요 그리고 숨을 쉬세요 부드러운 둘레와 밝은 둘레와 입체적 기쁨 속에서 (아침을 생각한다 시집의 첫번째 실린 시가 꽃이다) ..

문학일기 2024.03.22

불고기는 짰다

불고기는 짰다 간장을 너무 많이 부어버린 탓일까 음식을 만들어보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지 마트에서 사 먹거나 식당에서 픽업하여 먹기를 밥 먹듯 했는데 그 정도 맛이라도 냈으면 다행한 일이지 코닐리아 부인은 맛있다는 말만 되뇌이며 짠 불고기를 줄창 입으로 가져갔다 그동안 흘린 눈물에 간이라도 맞추려 했던 걸까 불고기와 나란히 놓인 잡채와 김치 잡채는 투명한 국수인지, 김치는 직접 만든 것인지 물었다 잡채는 투명한 국수 맞고, 김치는 시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신 것이라 했다 반년 전 남편을 떠나보낸 부인에게 위로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젊은 부부는 선물 준비하느라, 음식 만들 궁리하느라 분주했을 터였다 코닐리아 부인은 젊은 부부를 꼭 껴안으며 진한 눈물을 흘렸다

문학일기 2024.03.19

국적 상실 신고 한 날

캐나다 국적을 가지게 되었어요 왜 그랬느냐고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마음이 바뀌었어요 왜 캐나다에 살게 되었냐고요? 우주국 지구촌에 살고 싶어서요 여기는 나무 친구들이 많아요 그동안 미련이 남아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지 못했어요 태어나고 자란 조국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오늘 미루어 왔던 국적 상실 신고를 했어요 이제부터 저는 우주국 지구촌 사람이랍니다 (3/13/2024) 꽃이 진다고 아예 다 지나 꽃이 진다고 전화도 없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지는 꽃의 마음을 아는 이가 꽃이 진다고 저만 외롭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꽃 지는 저녁에는 배도 고파라

문학일기 2024.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