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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시 한 편(이해인)

아주 오랜만에 거울 앞에 서니 마음은 아직 열일곱 살인데 얼굴엔 주름 가득한 70대의 한 수녀가 서 있네 머리를 빗질하다 보니 평생 무거운 수건 속에 감추어져 살아온 검은 머리카락도 하얗게 변해서 떨어지며 하는 말 이젠 정말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아요 기도할 시간이 길지 않아요 나도 이미 알고 있다고 깨우쳐 줘서 고맙다고 옷으며 대답한다 오늘도 이렇게 기쁘게 살아있다고 창밖에는 새들이 명랑하게 노래를 하고! 나를 부르고! 살아갈수록 나에겐 사람들이 어여쁘게 사랑으로 걸어오네 아픈 삶의 무게를 등에 지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며 걸어오는 그들의 얼굴을 때로는 선뜻 마주할 수 없어 모르는 체 숨고 싶은 순간들이 있네 늦은 봄날 무심히 지는 꽃잎 한 장의 무게로 꽃잎 한 장의 기도로 나를 잠 못들게 하는 ..

문학일기 2024.02.13

갑신년 설날

지구촌 한쪽에서 먼 하늘 아래 어머니와 철희 미경 미정 그리운 이름을 불러본다 오늘은 설날 동생과 권솔들 모여 어머님께 세배드리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드시겠지 나는 홀로 이곳 메이폴 팀호튼에 앉아 왁자지껄할 그 모습을 미리 그려본다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지도 나와 같은 마음이시겠지 한자리에 앉아 눈 마주 보며 도란도란 애잔한 마음 부둥켜안고 커피를 마신다 먼 하늘을 바라본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 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

문학일기 2024.02.09

아침에 시 한 편(기형도 이성선 최승자)

눈이 그친다. 인천집 흐린 유리창에 불이 꺼지고 낮은 지붕들 사이에 끼인 하늘은 딱딱한 널빤지처럼 떠 있다. 가늠할 수 없는 넓이로 바람은 손쉽게 더러운 담벼락을 포장하고 싸락눈들은 비명을 지르며 튀어오른다. 흠집투성이 흑백의 자막 속을 한 사내가 천천히 걷고 있다. 무슨 농구(農具)처럼 굽은 손가락들, 어디선가 빠뜨려버린 몇 병의 취기를 기억해내며 사내는 문닫힌 상회 앞에서 마지막 담배와 헤어진다. 빈 골목은 펼쳐진 담요처럼 쓸쓸한데 싸락눈 낮은 촉광 위로 길게 흔들리는 기침 소리 몇, 검게 얼어붙은 간판 밑을 지나 휘적휘적 사내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 밤, 빛과 어둠을 분간할 수 없는 꽝꽝 빛나는, 이 무서운 백야 밟을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눈길을 만들며 군용 파카 속에서 칭얼거리는 어린 아들을 업..

문학일기 2024.02.09

설날 아침

때때옷 갈아입고 새 신발 신고 아버지 동생 함께 집을 나설 때 콧김이 새벽 공기 가르고 찬바람 옷 속으로 훅치고 들어오지만 기쁨이 한가득 싱글벙글 삐뚤빼뚤 과수원길 지나 고샅길 접어들면 할머니 계시는 큰집 “우리 신희 어서 와라.” 큰절로 세배하고 할머니 앞에 앉으면 ‘새해에도 건강하고 무럭무럭 잘 커라.’ 덕담해 주시던 할머니 할머니 기도 덕에 이렇듯 잘 자라 할아버지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사람을 사랑할수록 할 말은 적어지고 오랜 세월 시를 쓸수록 쓸 말은 적어지고 많은 말 남긴 것을 부끄러워하다가 마침내는 가장 단순한 침묵이 되어 이 세상을 떠나는가 보다 긴 기다림 끝의 자유를 얻게 되나 보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 마법의 성에 온 지 수십 년이 지났어요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는 사랑의 마법에 아..

문학일기 2024.02.07

내 마음

동터오는 해를 기다리다가도 막상 해가 떠서 눈이 부시면 언제 그랬냐는 듯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고 사랑한다 말하다가도 괜한 한마디에 금세 토라져 눈길을 피하는 내 마음은 비람에 흔들리는 저 작은 나뭇잎 산아래 붓꽃 한 자루 피어있다 한밤에 촛불 앞에 내가 앉아 있다 밖에서 돌아오면 나는 세상을 향해 이런 얼굴로 핀다 등잔 앞에서 하늘의 목소리를 듣는다 누가 하늘까지 아픈 지상의 일을 시로 옮겨 새벽 눈동자를 젖게 하는가 너무나 무거운 허공 산과 신이 눈뜨는 밤 핏물처럼 젖물처럼 내 육신을 적시며 뿌려지는 별의 무리 죽음의 눈동자보다 골짜기 깊나 한 강물이 내려 눕고 흔들리는 등잔 뒤에 빈 산이 젖고 있다 나귀의 귀속에 우물이 있네 우물 안에 배꽃이 눈을 뜨네 마음에 숨은 당신 찾아가는 길 나이 먹어도 나 ..

문학일기 2024.02.07

숨바꼭질

외딴집은 사과나무로 둘러싸여 있었고 인적이 드문 곳이었어. 우린 거기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놀았지. 흙벽으로 만든 창고 문에 기대어 눈을 가리고 열을 세었어, 하나 둘 셋 넷…. 열을 세는 동안 너는 숨을 곳을 찾아 몸을 숨겼지. 장독 뒤에도 숨고, 정지간 옆 장작더미 사이에도 숨고, 뒷간 모서리틈에도 숨었지. 너를 발견하고 창고 문으로 달려가 손바닥을 갖다 대면 너는 잡힌 게 억울하여 고개를 떨구며 안타까워했지. 걱정은 없었던 것 같아. 이제 우리는 나이가 들었고 욕심과 걱정과 주름이 늘었지. 정작 찾아야 할 것은 찾지 못한 채. 새해엔 서두르지 않게 하소서 가장 맑은 눈동자로 당신의 가슴에서 물을 긷게 하소서 기도하는 나무가 되어 새로운 몸짓의 새가 되어 높이 비상하여 영원을 노래하는 악기가 되게 하소..

문학일기 2024.02.05

착하게 살아라

아들아 착하게 살아라 세상은 착하게 사는 거란다 어머니 착하게만 살아서 어떻게 해요 그러면 사람들은 늘 짓밟으려고만 할 걸요 그렇게 말씀드리면 말없이 듣고만 계시던 어머니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다시 생각해 보니 어머님 말씀이 옳아요 어떻게든 이겨보려고 이를 가는 게 서운하게 한 사람들에게 되값아 주려고 하는 게 부질없는 거라는 걸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착하게 살고 져 주면서 사는 게 잘 사는 거라는 당신 말씀 백 번 천 번 옳아요

문학일기 2024.02.04

위로의 노래

*에스까밀료의 붉은 망토가 현관 앞 꽃병 위에 걸쳐 있다 호레 호레~ 환성(歡聲)이 요란하다 괜한 일로 의기소침해진 마음을 위로하는 응원가인가 *오페라 카르멘에 나오는 투우사 이름 https://youtu.be/CoV2YOjFowY?si=zIM67K_T_aH1rfBp 담장 위에 호박고지 가을볕 좋다 짜 랑 짜 랑 소리 날듯 가을볕 좋다 주인 잠시 집 비우고 외출한 사이 집 지키는 호박고지 새하얀 속살 눈부신 그 속살에 축복있으라 봄날 길 없이 온 너는 갈 곳 없어 더 화안하다 몸 찾은 곳이 달뜨는 쪽 아니다 저 깊은 가지 허공에 피어 허공을 물들이는 너 목숨 저물면 거기 그냥 사그러져라 잠들 때 꽃은 가장 상기되는 시간 향기도 슬픔도 너의 것이 아니다 무심히 내게 던진 그늘에 그분 피가 붉게 섞여 있다 ..

문학일기 2024.02.02

함께 밥 먹을 수 있느냐고 묻는 너

한창 예쁘게 자랄 때 함께 밥 먹는 그 평범한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한 일이 목에 가시처럼 걸려있어 네가 밥 먹자고 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곤 해 사실은 밥을 먹지 않아도 너와 너의 가족만 생각하면 든든하고 배가 부른데 네가 내 딸로 태어난 것만으로도 온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은데 늘 조심스럽게 마음을 읽고 챙겨주는 너 함께 밥 먹을 수 있느냐고 묻는 너 그런 네가 있어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구나 네가 온다고 하니 며칠 전부터 마음이 먼저 저만치 마중 나가있다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별아, 어찌하랴 이 세상 무엇을 쳐다보리 흔들리며 흔들리며 걸어가던 거리 엉망으로 술에 취해 쓰러지던 골목에서 바라보면 너 눈물 같은..

문학일기 2024.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