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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위어 가는 집

낯선 타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수많은 밤들이 지나가고 어린 새들은 새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갔다 긴 세월 비바람에 여위어만가는 집 움푹 들어간 두 눈이 퀭하다 못 가본 세상 많고 많은데 멀리 떠날 수 있는 날들이 얼마나 될까 제 발로 걸어 돌아다닐 수 있는 날은 또 얼마나 될까 유럽과 캐러비언과 동남아와 한 주간 두 주간 한 달 두 달 몇 번이나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문학일기 2024.01.21

아침에 시 한 편(백석, 김종삼, 도종환)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츠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메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아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

문학일기 2024.01.19

선물

붉은 기운 하늘 물들이더니 떠오르는 해 반가워라 부신 눈으로 동녘 하늘 바라보네 새해맞이 해돋이 보려고 새벽부터 메이폴 팀호튼에서 기다렸나 보다 행운은 늘 이런 식으로 찾아왔지 세상에 태어난 것도 아내를 만난 것도 딸들을 안은 것도 손주를 만난 것도 영하 16도 추운 겨울 쌓인 눈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 눈더미 사이로 붉은 태양 솟구쳐 오르네 온 우주를 껴안은 듯한 이 황홀감

문학일기 2024.01.17

마일스톤

낯선 곳으로 향하던 시선(視線)이 머문 자리에서 요람 속 리온이 보며 마일스톤*에 다시 이름을 새기네 작은 나무 한 그루 잎 돋고 가지 뻗어 쉴 그늘 내어 주듯 제영이 시온이 제준이 리온이... 나무마다 몸집 불리고 열매 맺어 세상을 이롭게 할 숲이 되리 숲이 되리 숲을 이루리 - 육십육 세 생일에 마일스톤에서 * Milestone: 표지석, 이정표-여행시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돌에 목적지까지의 남은 거리와 방향을 새겨놓은 표지석을 의미한다. 또는 한 인생, 역사 등이나 수치상으로 중대시점, 획기적인 사건을 뜻하기도 한다.

문학일기 2024.01.16

눈 치우는 새벽

쌓인 눈이 비를 머금어 돌덩이가 되었네 곧 많은 비가 내린다고 하니 더 무거워질 테지 눈은 가볍지만 빗물이 더해지면 무거워지듯이 작은 죄라도 생각 없이 짓다 보면 더 큰 죄를 지어도 별 느낌이 없어지겠지 꼭두새벽에도 제설차가 다니며 길 위에 쌓인 눈을 밀고 가네 입구를 가로막은 산더미는 어떻게 치우나 물끄러미 바라보던 차 그것까지 치워주고 가네 곤히 잠든 영혼들을 위해 저렇듯 수고를 하고 있네 나를 위해 이 새벽에도 기도하고 응원하며 돕는 손길이 있겠지 한 삽 한 삽 퍼 올려 눈을 치우니 한 시간이 후딱 지나갔네 온몸을 타고 흐르는 땀 훔친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잠자리에 드네

문학일기 2024.01.13

엄마아빠의 말과 사랑

벤 카슨은 몸은 하나인데 머리 뒤쪽이 붙은 샴쌍둥이를 분리하는 수술로 유명한 신경외과 의사이다. 어머니의 격려와 도움으로 어린 시절 문제아에서 세계적인 뇌수술 전문의가 되고 트럼프 행정부에서 장관(United States Secretary of Housing and Urban Development)으로 일하기도 했다. 벤은 흑인으로 가난한 가정의 싱글맘 손에서 자랐다. 공부는 꼴찌에 가까웠고 성적표엔 F가 수두룩했다. 친구들은 물론 선생님까지도 놀려댔지만 자신은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나는 바보야 아무것도 잘하는 게 없어”라고 말하곤 했다. 벤의 엄마는 “너는 절대로 바보가 아니다. 너는 무슨 일이든 마음만 먹으면 할 수가 있어”라고 독려한다. 청소하러 다니는 집주인의 서재에 꽂힌 책들을 보고 큰 감동을..

미셀러니 2024.01.11

꾀병과 셀레브레이션(덜 움츠리고 덜 비난하고 더 많이 셀레브레이션하자)

연말 그러니까 12월 31일 오후부터 몸이 으스스하고 아프기 시작했다. 목이 뜨끔뜨끔하고 이곳저곳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왔다. 2023년 마지막 날 주일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오후 내내 쉬었다. 헬스클럽도 오후 1시에 문을 닫는다고 예고해 주었으니 잘 된 일이었다. 저녁에는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딸 네 가족을 피어슨 공항에서 픽업하여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보통 때 같으면 무리해서라도 송구영신 예배에 참석할 터였지만 쉬기로 했다. 대개 이런 유의 몸살감기는 하루이틀 쉬면 정상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달랐다. 일주일이 되도록 불편함이 계속되었다. 콧물이 나고 코맹맹이 소리를 하고 특정 부위를 바늘로 쑤시는 듯한 아픔도 멈추지 않았다. 누워서 앓자니 꼴사나울 일이고 아무렇지도 않은 ..

미셀러니 2024.01.06

길(道)

숲은 여윈 가지로 가득했다 지난밤 내린 눈이 낙엽을 덮어 눈밭이 되었다 숲 속으로 난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눈 밟는 소리가 찬 공기를 갈랐다 아이젠에 끼인 눈이 절뚝이며 걷게 했다 시린 바람이 볼에 와닿았다 걷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걸을까 말까 망설였는데 걷기로 한 게 옳은 결정이었다 올 한 해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바르게 판단하고 결정하기를... 걷는 도중 아내가 힘들어했다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해 그럴 것으로 생각했다 망막에 렌즈를 삽입한 영향도 있었을 터였다 어쩌면 삶은 날마다 걷는 일 일지도 모른다 갑진년 한해도 묵묵히 걸을 것이다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뚜벅뚜벅 걸으며 미련과 후회를 남기지 않으리라 새해 첫날 숲으로 난 길은 설렘이 있는 선물이었다

문학일기 2024.01.03

누가 나무를 돌보지? Who will look after my tree?

데릴은 사람들에게 친절할 것과 일상의 소중함을 알려주었다.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감각을 민감하게 갈고닦으며 유지해야 함도 일깨워 주었다. 그것이 자연이든, 사물이든, 관계든. 데릴과 내가 서로 알고 지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고작해야 이 년 반이나 될까. 대릴은 포트 이리에 살던 큰딸 가족의 이웃이었다. 그는 마치 내 옆집에 사는 이웃이라도 되는 양 가깝게 느껴졌다. 독일계 캐나다인인 그에게 서먹함이란 없었고 오히려 오랜 친구처럼 여겨졌다. 언젠가 딸아이는 옆집에 백인 내외분이 사시는데 따뜻하게 대해 준다며 웃었다. 한국 드라마며 영화를 보라며 자주 추천해 주신다고 했다. *파머즈 마켓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빵과 쿠키를 팔고 계셨다며 재미있어했다. 정원에서 키운 보랏빛 라벤더 꽃을 잘라 꽃다발을 만들어..

수필·시 2023.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