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1655

아버지의 전쟁사

아버지는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했던 6.25의 경험을 자주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전쟁 이야기는 실화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먼 나라 이야기로 들렸다. 어제 일처럼 느껴졌을 생생한 경험을 토대로 말씀하셨지만 철없던 자녀들은 그저 제삼자에 불과했고 열 번도 더 들었을 이야기에 지겨워만 했다. 지금은 아버님의 그 이야기가 다시 그립다. 15년 전 여행을 다녀온 후 썼던 글 한 편 올려둔다. 아버지와 함께 한 처음이자 마지막 장사해수욕장 여행이었다. 열아홉 나이에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한 젊은이는 일주일간의 짧은 훈련을 받았다. 교육을 받던 중 총기오발 사고로 죽어나가는 동료 학도병을 보면서 전장이 어떤 곳일지 짐작할 수 있었다. 훈련을 마친 후 북한군으로부터 노획한 총과 배낭 등 장비와 인민군복을 지급받았다. 적의 후방..

미셀러니 2023.08.08

묵은 우정

함께 할 친구가 있다는 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도움을 요청하면 열일 제쳐두고 달려와 기꺼이 손을 내미는 친구, 고민을 털어놓으면 자신의 일처럼 귀담아들으며 공감해 주는 친구, 삶의 무게를 견뎌내느라 연락을 못하고 지낼 때에도 우정과 믿음을 손톱만큼도 의심하지 않을 수 있는 친구, 나답지 않은 실수로 힘들어할 때 그만한 이유가 있으려니 하고 믿어주는 친구, 언제나 기댈 어깨를 내어주며 내 편이 되어주는 친구, 그런 친구가 있으니 얼마나 든든한가! 함께 노래하며 화음을 맞추었고, 주말이면 테니스를 쳤다. 때로는 공을 차며 놀기도 했던 우리, 서울과 토론토에서 함께 하는 동안 강산은 네 번이나 변하였지만 우정은 세월이 갈수록 더 돈독해진다. 그래서인지 그가 있는 곳이면 고향처럼 여겨지고 살맛 나는 세상이 ..

미셀러니 2023.08.04

텃밭 정경

버펄로에서 한동안 지내다 돌아온 아내가 텃밭에서 수확에 한창이다. 올해는 고추가 풍년이라며 고추를 따더니 부추를 자른다. 호박은 미리 따서 쟁여두었다. 내일 카페에서 자원봉사로 일하는 이웃과 나누기 위함이란다. 그리 넓지 않은 텃밭이지만 풍성하게 내어주니 고맙기만 하다. 나는 과연 가슴을 활짝 열고 내어주며 사는지 스스로 물어본다. 간장종지 만한 마음 그릇으로 이것저것 따지기만 하고 내어줄 줄 모르는 사람은 아닐는지. 품이 넓고 너그러운, 누구나 와서 기댈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리 넓지 않은 텃밭이 품고 또 품어 내어 주고 내어주는 것처럼.

미셀러니 2023.07.30

제준과 감사한 나날

2023년 7월 18일 손주 제준이 태어났다. 내게 주신 세 번째 기적이자 고귀한 선물! 산모와 아기 모두 건강하여 감사하다. 큰딸과 사위 그리고 제준이 병원에 있을 2박 3일 동안 아내와 나는 큰 손주 제영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버펄로 하늘은 유난히 파랬고 흰구름이 두둥실 떠다녔다. 제준이 집으로 온 날 제영은 많이 울었다. 엄마 아빠와 떨어져 있었던 시간으로 인하여 서러웠을 것이고 처음 대하는 동생의 존재가 낯설었을 것이다. 둘째 가족은 밴쿠버에서 있은 친구 결혼식에 참석한 후 하와이로 가서 며칠 지내고 있다. 곧 태어날 아기를 기대하며 보내는 베이비문이라고 한다. 올해도 텃밭 농사는 그럭저럭 잘되어 어제오늘 애호박 열여섯 개를 땄다. 내게 이런 날들이 올 줄로 기대는 했..

미셀러니 2023.07.22

영혼의 돌봄

‘내 영혼이 잘됨 같이’라는 주제로 영성수련회를 가졌다. 강사는 맥매스터대학에서 영성신학을 전공하였으며 ‘기도의 영성’이라는 제목의 책을 쓴 신태성 목사로 2023년 3월 11일 토요일 10시부터 3시까지 본한인교회 E.M. Chapel에서 진행되었다. 되새김질 위하여 올려둔다. 기도의 영성을 쓴 계기: 기도에 관한 책이 너무 영적이었다. 너무 어려웠다. 너무 기술적이었다. 예를 들면 5분 안에 축복받는 기도 등 그래서 기도의 영성이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질문1. 기도생활은 쉬운가 어려운가? 기도생활이 막히면 은혜 생활이 막힌다. 기도생활이 어려운 이유는? 영적인 생활이 오래될수록 기도생활이 어렵다. 하나님의 기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성화에 대한 기대라고 하기도 한다. 딸이 리듬체조를 잘했다. 온타리..

테너 박인수 선생

테너 박인수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나는 박 선생님의 목소리를 무척 좋아했다. 호방한 그의 성격 또한 참 좋았다. 1977년 나는 오페라 카르멘을 공연하는 무대에 합창 단원으로 함께 선 적이 있다.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연주를 할 때 무대 뒤 서늘하고 퀴퀴하던 공기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돈호세 역은 테너 김진원 선생님이, 미카엘라 역은 박인수 선생님의 부인인 안희복 씨가 맡았다. 당신의 아내가 주역을 맡아서였는지 선생님의 얼굴을 가끔 뵐 수 있었다. 막 스무 살을 넘겼을 나이라 그랬는지 선생님이 멋있어 보였다. 이후 서울대 교수로 가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반가워 하기도 했다. 박인수 선생님뿐 아니라, 테너 홍춘선 선생님, 바리톤 이인영 선생님, 베이스 오현명 선생님도 돌아가셨다. 한때 성악 레슨을 받으며..

미셀러니 2023.03.06

삶으로 보여주는 이정표

내가 이상숙 권사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팔 년 전 출석하는 교회의 담임 목사님로부터였다. 사실은 이상숙 권사님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 아니라 그분의 아들 황요셉 선교사에 대해 들었다. 황 선교사는 야오족 선교를 위해 본 한인교회가 후원하던 파송 선교사였다. 중국의 광둥성에서 소수민족인 야오족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을 십수 년째 하고 있었다. 황 선교사는 자그마한 키에 얼핏 보기에 약해 보였으나 사실은 매우 단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개인적인 욕심을 내려놓고 낯선 곳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은 대단한 각오와 내려놓음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불편함을 감내하는 정도가 아니라 신변의 위협을 감수해야 하고 아내와 자녀를 포함한 가족의 희생까지도 담보해야 가능할 ..

눈 내린 풍경

1974년 2월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눈이 많지 않던 대구에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계성학교 교정에서 눈 내리는 걸 보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수업시간이었지만 급우들은 약속이나 한 듯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때마침 점심시간이 되었다. 급우들은 교실 밖으로 우르르 몰려나갔다. 교정 곳곳에 흩어져 눈 덮인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에 바빴다. 설국으로 변한 오십 계단 주변은 가히 장관이었다. 탄성을 지르던 것도 잠시, 점심시간이 지나자 눈은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따뜻한 기온 탓에 신기루처럼 사라져 갔다. 당시 오십 계단 주변과 교정 모습은 기억 한편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지금도 눈이 내리면 괜스레 기분이 좋다. 아침에 일어나 밤새 내린 눈을 바라보는 건 기쁨을 넘어 경이로움이다. 햇빛에 반사되는 눈밭..

상처입은 치유자

작가는 동짓달만 되면 우울해진다고 썼다. 위로 딸만 넷인 가정에서 다섯 번째 딸로 태어난 작가는 자신의 탄생 이야기를 작품 속에 담았다. 작가의 모친은 오매불망 아들을 바랐는데 딸이 나왔으니 허탈하기가 이를 데 없었던 모양이다. 모친은 당시의 허탈했던 이야기를 딸에게 들려주곤 했었나 보다. 기쁨보다는 걱정과 염려, 안타까움으로 가득했었던 그날의 이야기가 작가를 힘들게 하지 않았을까. 동짓달의 분노, 동짓달의 쓸쓸함, 동짓달의 푸르스름한 기운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이 동짓달이 되어야 했다고, 동짓달 추위보다 더 당당해져야 했다고 썼다. 이제는 슬프지 않다고, 받아들일 여유가 생겼다고 고백하는 작가가 고맙고 자랑스럽다. 자신의 아픈 기억을 통해 독자에게 위로를 주고자 하는 마음 씀씀이 존경스럽다. 아픈 기억을..

무엇이 우리를 자라게 하는가

어릴 적 아랫목에는 콩나물시루가 놓여있었다. 할머니는 아침저녁으로 검은 천을 열고 물을 뿌려주었다. 시루 아래 고여있는 물을 퍼 콩나물에 뿌려주면 어느새 콩나물은 쭉쭉 자라 있었다. 격려와 칭찬은 콩나물시루의 물과 같다. 신달자 시인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시인의 어머니는 시인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그래도 니는 될 끼다”라고 말해주시며 믿어주셨다. 그 말이 지금의 시인을 있게 만들었다고 했다. 역경을 딛고 악착같이 노력하는 사람이 된 건 '니는 될 끼다'라고 하는 엄마의 기대와 염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말씀 한마디가 딸을 시인으로, 교수로,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들었고, 언제나 노력하는 사람이 되게 했다. 어느 병원 로비에는 이런 글이 걸려 있다고 한다. “개에 물려 다친 사람은 반나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