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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바꼭질

외딴집은 사과나무로 둘러싸여 있었고 인적이 드문 곳이었어. 우린 거기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놀았지. 흙벽으로 만든 창고 문에 기대어 눈을 가리고 열을 세었어, 하나 둘 셋 넷…. 열을 세는 동안 너는 숨을 곳을 찾아 몸을 숨겼지. 장독 뒤에도 숨고, 정지간 옆 장작더미 사이에도 숨고, 뒷간 모서리틈에도 숨었지. 너를 발견하고 창고 문으로 달려가 손바닥을 갖다 대면 너는 잡힌 게 억울하여 고개를 떨구며 안타까워했지. 걱정은 없었던 것 같아. 이제 우리는 나이가 들었고 욕심과 걱정과 주름이 늘었지. 정작 찾아야 할 것은 찾지 못한 채. 새해엔 서두르지 않게 하소서 가장 맑은 눈동자로 당신의 가슴에서 물을 긷게 하소서 기도하는 나무가 되어 새로운 몸짓의 새가 되어 높이 비상하여 영원을 노래하는 악기가 되게 하소..

문학일기 2024.02.05

착하게 살아라

아들아 착하게 살아라 세상은 착하게 사는 거란다 어머니 착하게만 살아서 어떻게 해요 그러면 사람들은 늘 짓밟으려고만 할 걸요 그렇게 말씀드리면 말없이 듣고만 계시던 어머니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다시 생각해 보니 어머님 말씀이 옳아요 어떻게든 이겨보려고 이를 가는 게 서운하게 한 사람들에게 되값아 주려고 하는 게 부질없는 거라는 걸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착하게 살고 져 주면서 사는 게 잘 사는 거라는 당신 말씀 백 번 천 번 옳아요

문학일기 2024.02.04

위로의 노래

*에스까밀료의 붉은 망토가 현관 앞 꽃병 위에 걸쳐 있다 호레 호레~ 환성(歡聲)이 요란하다 괜한 일로 의기소침해진 마음을 위로하는 응원가인가 *오페라 카르멘에 나오는 투우사 이름 https://youtu.be/CoV2YOjFowY?si=zIM67K_T_aH1rfBp 담장 위에 호박고지 가을볕 좋다 짜 랑 짜 랑 소리 날듯 가을볕 좋다 주인 잠시 집 비우고 외출한 사이 집 지키는 호박고지 새하얀 속살 눈부신 그 속살에 축복있으라 봄날 길 없이 온 너는 갈 곳 없어 더 화안하다 몸 찾은 곳이 달뜨는 쪽 아니다 저 깊은 가지 허공에 피어 허공을 물들이는 너 목숨 저물면 거기 그냥 사그러져라 잠들 때 꽃은 가장 상기되는 시간 향기도 슬픔도 너의 것이 아니다 무심히 내게 던진 그늘에 그분 피가 붉게 섞여 있다 ..

문학일기 2024.02.02

함께 밥 먹을 수 있느냐고 묻는 너

한창 예쁘게 자랄 때 함께 밥 먹는 그 평범한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한 일이 목에 가시처럼 걸려있어 네가 밥 먹자고 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곤 해 사실은 밥을 먹지 않아도 너와 너의 가족만 생각하면 든든하고 배가 부른데 네가 내 딸로 태어난 것만으로도 온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은데 늘 조심스럽게 마음을 읽고 챙겨주는 너 함께 밥 먹을 수 있느냐고 묻는 너 그런 네가 있어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구나 네가 온다고 하니 며칠 전부터 마음이 먼저 저만치 마중 나가있다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별아, 어찌하랴 이 세상 무엇을 쳐다보리 흔들리며 흔들리며 걸어가던 거리 엉망으로 술에 취해 쓰러지던 골목에서 바라보면 너 눈물 같은..

문학일기 2024.02.01

적절하지 못한 말

말은 쓰레기고 똥이다 시들어 버린 꽃이다 말라가는 낙엽이다 메마른 사막이다 푹푹 빠지는 진흙탕이다 냄새나는 시궁창이다 시체가 썩는 냄새다 적절하지 못한 때 적절하지 못하게 내뱉거나 지껄이는 말은 똥이고 쓰레기고 구린내다 나무야 안녕? 너는 내가 자면서도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 알고 있지? 사람들은 내 말을 건성으로 듣는데 너는 항상 끝까지 잘 들어주고 때로는 앞질러 들어주어 정말 고마워 사랑은 잘 듣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님을 너는 매번 새롭게 깨우쳐주는구나 나도 너를 닮은 한 그루 나무가 되어 세상을 향해 두 팔 벌리고 사람들을 만날 게 사랑의 첫 마음으로 잘 듣는 사람이 될 게 바다를 바라보다가 바다를 잃어버렸습니다 바다를 거닐며 바다를 찾고 있습니다 당신이 너무 가까이 있다는 것은 당신을 잃는 것..

문학일기 2024.02.01

매화를 찾아서, 미시령 노을

구름 떼처럼 모인 사람들만 보고 돌아온다 광양 매화밭으로 매화를 보러 갔다가 매화는 덜 피어 보지 못하고. 그래도 섬진강 거슬러 올라오는 밤차는 좋아 산허리와 들판에 묻은 달빛에 취해 조는데. 차 안을 가득 메우는 짙은 매화향기 있어 둘러보니 차 안에는 반쯤 잠든 사람들뿐. 살면서 사람들이 만드는 소음과 악취가 꿈과 달빛에 섞여 때로 만개한 매화보다도 더 짙은 향내가 되기도 하는 건지. 내년 봄에도 다시 한번 매화 찾아 나섰다가 매화는 그만두고 밤차나 타고 올라올까. -신경림(1935~) 나뭇잎 하나가 아무 기척도 없이 어깨에 툭 내려앉는다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너무 가볍다 자전거를 타고 스텝퍼 위를 걷는다 소금기가 베어져 나와 등판을 적신다 그렇게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지나니 몸이 깃털처럼 가..

문학일기 2024.01.30

滿開, 사랑의 말

차창 너머로 시온이 얼굴을 바라보았다 까르르 웃었다 활짝 핀 살구꽃 꽃잎을 흩날리며 향기를 퍼트리고 있었다 시온아 너는 꽃이야 향기야 *찰滿 열開 사랑의 말 왜 맛있는지 아니? 네가 고기를 망치로 내려쳤기 때문이야 왜 해가 뜨는지 아니? 네가 거기 앉아 있었기 때문이야 아낌없이 버린다는 말은 아낌없이 사랑한다는 말이리 너에게 멀리 있다는 말은 너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는 말이리 산은 가까이 있으면서도 안 보이는 날이 많은데 너는 멀리 있으면서 매일 아프도록 눈에 밟혀 보이네 산이 물을 버리듯이 쉼없이 그대에게 그리움으로 이른다면 이제 사랑한다는 말은 없어도 되리 달 하나 가슴에 묻고 가는 시냇물처럼 저무는 들판에 소가 풀을 베어 먹는다 풀잎 끝 초승달을 베어 먹는다 물가에서 소는 놀란다 그가 먹은 달이 물..

문학일기 2024.01.29

세 치 혀

말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찌른다는 걸 알면서도 내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걸 몰랐다 아침에 아내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랬었군요 참 힘들었겠네요’라고 말했으면 좋았을 것을 나 같으면 이렇게 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잊어버렸다 그 말이 아내에게 비수가 되었나 보다 아내는 다시는 내게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잘한다고 한 말이 칼이 되어 아내를 찌른 것이다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던 말이 오히려 상처를 주고 아프게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살아오는 동안 나는 세 치 혀로 얼마나 얼마나 많은 사람을 찔렀을까 세상에 대하여 할 말이 줄어들면서 그는 차츰 자신을 줄여갔다 꽃이 떨어진 후의 꽃나무처럼 침묵으로 몸을 줄였다 하나의 빈 그릇으로 세상을 흘러갔다 빈 등잔에는 하늘의 기름만 고였다 하늘에 달이 가듯..

문학일기 2024.01.24

성숙으로 가는 길

너 때문이야 난 잘못이 없어 뭐가 문제야 네가 제대로 하는 게 뭐야 그렇군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잘못했어요 제가 실수했어요 아이 같이 까르르 웃을 것 하늘을 자주 바라볼 것 들풀과 숲을 사랑할 것 귀 기울여 들을 것 기다릴 줄 알 것 꾸준히 운동 할 것 자주 걸을 것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기꺼이 할 것 아는 만큼 느낀 만큼 배운 만큼 기어코 살아낼 것 더러운 내 발을 당신은 꽃 잎 받듯 받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흙자국을 남기지만 당신 가슴에는 꽃이 피어납니다 나는 당신을 눈물과 번뇌로 지나가고 당신은 나를 사랑으로 건넙니다 당신을 만난 후 나는 어려지는데 나를 만난 당신은 자꾸 늙어만 갑니다. 별과 별 사이 하늘과 땅 사이 노오란 장다리 꽃 밭 위로 밤에 큰 별똥 지나간다 소풍 가는 시골 초등학교 아이..

문학일기 2024.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