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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때는 없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그녀는 홀로 쓸쓸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던 차 딸이 말했다. 한 방송사에서 할머니 역을 찾는데 한번 도전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연기라고는 해 본 적이 없는데 할 수 있을까 싶어 며칠을 망설였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용기를 내어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딸의 도움으로 오디션 영상을 만들어 방송사로 보냈다. 당연히 떨어졌을 거라 생각하며 잊어버리고 지내던 어느 날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수많은 경쟁자들 중에서 후보로 뽑힌 것이다. 최종면접에서 그녀는 당당히 출연자로 확정되었다. 오디션 영상을 만들어 보내고, 오디션을 보고, 출연자로 선정되고, 몬트리올 인근 한 세트장에서 촬영을 하는 이 전 과정을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남편이 보내준 선물이라 생각..

미셀러니 2024.03.13

K 권사

P 선배는 3월 9일(토요일) 저녁 노스욕에서 있은 연주회에 몇 사람을 태워 함께 가기로 하였다. P선배 내외는 K권사를 태우고 패신저 픽업으로 갔다. 핀치 패신저 픽업에서 기다리기로 한 다른 두 명을 픽업하기 위해서였다. 미스 커뮤니케이션이 있었는지 패신저 픽업에는 세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배는 무척 난처했다. 정원이 다섯이라 여섯 명 모두를 태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때 K권사께서 다른 일이 있다며 슬그머니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무작정 앞으로 걸어갔다. 패신저 픽업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 분이 무안해할까 봐 그렇게 하신 것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기다렸던 세 사람 중 한 명이 떠나기를 바라거나 다른 해결책을 찾으려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차에서 내린 K권사는 누군가 자신을 태우러 와달라고 부..

미셀러니 2024.03.11

아침에 시 한 편(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움직인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문학일기 2024.03.11

표지판

토론토를 출발하여 나이아가라 온 더 레이크(Niagara on the Lake)로 왔습니다. 버펄로로 향하는 길에 실커스 레스토랑(Silks Country Kitchen*)에 들러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함입니다. 오는 길은 온통 포도밭이었습니다. 온타리오주의 세인트 캐서린즈(St. Catharines)와 나이아기라 온 더 레이크는 기후가 온화하여 포도를 재배하기에 유리한 곳이지요. 와이너리에 둘러 쌓인 조용한 마을에 실커스 레스토랑이 있습니다.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자주 찾으시는 맛집입니다. 이날 아침도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으로 가득했습니다. 커피와 함께 VIRG’S BIG BREAKFAST와 2 EGG BREAKFAST로 푸짐한 이침 식사를 즐겼습니다. 서빙하시는 분들도 샹냥하고 친절하여 기분이..

미셀러니 2024.03.08

얼마나 억울했을까

텃밭을 일구겠다고 집을 마구 헤집어 놓았을때 너는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삽 끝이 밀고 들어와 몸을 댕강 잘라놓아도 하소연 한마디 못한 너는 얼마나 억울했을까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집밖으로 내 던져져 이리저리 몸을 뒤집고 있는 가여운 너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 방 안으로 한 사람이 들어와 앉는다 먼저 앉아 있던 사람이 자리를 고쳐 앉는다 그래도 방 안은 하나도 좁아지지 않는다 또 한 사람이 들어와 앉는다 먼저 앉아 있던 두 사람이 다시 자리를 고쳐 앉는다 여전히 방 안은 하나도 좁아지지 않는다 아무도 말이 없다 서로 말 없는 서로의 말을 알아듣는다 누구도 답답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한 사람이 힘이 부치는지 기우뚱 몸을 숙이자 옆에 있던 사람이 말없이 기울어지는 몸을 받아 안아주기도 한다 이윽고 날이 저물..

문학일기 2024.03.05

나이듦이 선물이 되게 하려면

1. 신체능력이 저하된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여유를 가져라. 2. 일이나 봉사활동 등 목적성이 분명한 활동을 하라. 3. 자주 웃고 관대함을 발휘하라. 4. 받은 만큼 세상에 돌려주라. 5.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새로운 것에 도전하라. 6. 나보다 먼저 죽지 않을 젊은 친구를 사귀어라. 침상에 누워 삶에 대한 회한에 잠기는 노인과, “내 삶에서 말년이 가장 행복하다” 말하는 노인의 차이는 무엇인가? 행복한 노년은 거저 오지 않는다. 건강하고 행복한 80세는 수십년 전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린 노력의 결과물이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행복의 40%는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고, 15%는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40%는 노력에 달려 있다. The gift of Aging의 저자가 인터뷰한 90대 할머니 릴리 코언..

미셀러니 2024.03.02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자매는 웃지도 않고 살아요 그 자매가 웃는 모습을 누구도 본 적이 없었답니다 어쩌다 사람을 만날 때면 눈 주변이 파르르 떨리고 안절부절못해요 사람 만나는 걸 맹수 만나는 것만큼이나 두려워하게 되었어요 이유가 뭔지 아세요? 열일곱 사춘기 때 좋아했던 교회 오빠가 ‘너는 웃을 때 입이 많이 커지네’라고 했던 말 한마디 때문이랍니다 무슨 권리로 오빠는 소녀의 웃음을 앗아가 버린 걸까요 평생 제대로 웃지도 못하게 만든 걸까요 교회 오빠는 자신이 한 여인의 삶 속에 당연히 있어야 할 웃음을 빼앗아 버렸다는 걸 알지도 못하지요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작두 되어 벨 거라고는 꿈에서라도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거예요 고립에서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이층 집을 짓고 살았으면 좋겠네 봄이면 조팝꽃 제비꽃 자목련이 피..

문학일기 2024.02.22

도미니카 자매

내 삶의 마지막 순간도 그랬으면 좋겠네 시를 읇조리며 시와 함께 몇 날을 보내고 싶네 시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별을 고하고 싶네 그럴 수 있다면 가는 길이 덜 외로우리 도미니카 자매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의 씨앗을 흩뿌리며 떠나고 싶네 꽃잎 되어 지고 싶네 아래는 박경희 도미니카님의 부고를 듣고 이해인 시인, 수녀님께서 보내주신 글(시) 2.18 병들어 베어버린 나무 한 그루 다시 보고 싶어 밤새 몸살하며 생각했지 지상의 나무 한 그루와 작별도 이리 서러운데 사랑하던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그 슬픔 감당하기 얼마나 힘든 건지! 너무 쉽게 잊으라고 말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 빨리 잊을수록 좋다고 세월이 약이라고 옆에서 자꾸 독촉하면 안 될 것 같아 사랑하는 ..

문학일기 2024.02.20

반성문

나귀를 나비라 하고 딸기를 따기라 하는 너를 보며 잘했다 장하다 우리 아기 어쩌면 이렇게 똑똑하니 똥을 싸도 아이고 우리 아기 똥 쌌구나 예쁘게 말하며 기저귀 갈아주고 똥 닦아 주는데 사 남매 물고 빨며 예쁘다 잘한다 장하다 손뼉 치며 기뻐하셨을 엄마 문고리에 손가락 쩍쩍 달라붙는 동지섣달 찬물에 손 담그고 똥기저귀 빨아 빨랫줄에 너셨을,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려고 소처럼 일 하셨던 우리 엄마 구십 이제는 엄마가 달라졌다며 이것도 안 드시면 도대체 어떻게 해요 소리를 지르지 엄마가 날 키울 때는 수백 번 잘 못 말해도 수십 번 똥을 싸도 장하다 이쁘다 하셨을 텐데 제 식구들 데리고 잘 살아보겠다며 외국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는 큰 자식 그것도 자식이라고 밤낮으로 중얼중얼 이름 부르실 우리 엄마 나에게 희망..

문학일기 2024.02.20

아침에 시 한 편(안도현, 최승자)

적게 먹고 적게 싸는 딱정벌레의 사생활에 대하여 불꽃 향기 나는 오래된 무덤의 입구인 별들에 대하여 푸르게 얼어 있는 강물의 짱짱한 하초(下그슬릴焦)에 대하여 가창오리들이 떨어뜨린 그림자에 잠시 숨어들었던 기억에 대하여 나는 어두워서 노래하지 못했네 어두운 것들은 반성도 없이 어두운 것이어서 열몇 살 때 그 집 뒤뜰에 내가 당신을 심어놓고 떠났다는 것 모르고 살았네 당신한테서 해마다 주렁주렁 물방울 아가들이 열렸다 했네 누군가 물방울에 동그렇게 새겼을 잇자국을 떠올리며 미어지는 것을 내려놓느라 한동안 아팠네 간절한 것은 통증이 있어서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 하고 나면 이 쟁반 위 사과 한 알에 세 들어 사는 곪은 자국이 당신하고 눈 맟추려는 내 눈동자인 것 같아서 혀 자르고 입술 봉하고 멀리 돌아왔네 나..

문학일기 2024.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