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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시 한 편(이시영, 박성우, 안미옥)

아파트의 낡은 계단과 계단 사이에 쳐진 거미줄 하나 외진 곳에서도 이어지는 누군가의 필생 날이 맑고 하늘이 높아 빨래를 해 널었다 바쁠 일이 없어 찔레꽃 냄새를 맡으며 걸었다 텃밭 상추를 뜯어 노모가 싸준 된장에 싸 먹었다 구절초밭 풀을 매다가 오동나무 아래 들어 쉬었다 종연이양반이 염소에게 먹일 풀을 베어가고 있었다 사람은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궁금해 사람들이 자신의 끔찍함을 어떻게 견디는지 자기만 알고 있는 죄의 목록을 어떻게 지우는지 하루의 절반을 자고 일어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흰색에 흰색을 덧칠 누가 더 두꺼운 흰색을 갖게 될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은 어떻게 울까 나는 멈춰서 나쁜 꿈만 꾼다 어제 만난 사람을 그대로 만나고 어제 했던 말을 그대로 다시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징그럽..

문학일기 2024.04.18

아침에 시 한 편(이대흠)

사무쳐 잊히지 않는 이름이 있다면 목련이라 해야겠다 애써 지우려 하면 오히려 음각으로 새겨지는 그 이름을 연꽃으로 모시지 않으면 어떻게 견딜 수 있으랴 한때 내 그리움은 겨울 목련처럼 앙상하였으나 치통처럼 저리 다시 꽃 돋는 것이니 그 이름이 하 맑아 그대로 둘 수가 없으면 그 사람은 그냥 푸른 하늘로 놓아두고 맺히는 내 마음만 꽃받침이 되어야지 목련꽃 송이마다 마음을 달아두고 하늘빛 같은 그 사람을 꽃자리에 앉혀야지 그리움이 아니었다면 어찌 꽃이 폈겠냐고 그리 오래 허공으로 계시면 내가 어찌 꽃이 폈겠냐고 그리 오래 허공으로 계시면 내가 어찌 꽃으로 울지 않겠냐고 흔들어도 봐야지 또 바람에 쓸쓸히 질 것이라고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이라고 이 여윈 숲 그늘에 꽃 피어날 때의 꽃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작은 ..

문학일기 2024.04.17

아침에 시 한 편(나희덕)

이런 얘기를 들었어. 엄마가 깜박 잠이 든 사이 아기는 어떻게 올라갔는지 난간 위에서 놀고 있었대. 난간 밖은 허공이었지. 잠에서 깨어난 엄마는 난간의 아기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이름을 부르려 해도 입이 떨이지지 않았어. 아가,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엄마는 숨을 죽이며 아기에게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어. 그리고는 온몸의 힘을 모아 아기를 끌어안았어. 그런데 아기를 향해 내뻗은 두 손에 잡힌 것은 허공 한줌뿐이었지. 순간 엄마는 숨이 그만 멎어버렸다. 다행히도 아기는 난간 이쪽으로 굴러 떨어졌지. 아기가 울자 죽은 엄마는 꿈에서 깬 듯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달렸어. 아기를 살여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는 울음을 그치고 잠이 들었어. 죽은 엄마는 아기를 ..

문학일기 2024.04.16

모를 일이다

살면서 선물과 같이 그저 주어지는 것이 있다 젊은 시절 외국에 나가 공부하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꿈과 같이 공부할 기회가 주어졌다 캐나다에 와서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누가 외국에 산다고 하면 그건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캐나다에 살면서 일주일에 한두 번 미국 국경을 건너 다닌다 한때는 나이아가라 폭포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였다 누군가 다녀왔다는 이야기에 귀가 쫑긋해진 적도 있었다 지금은 나이아가라 폭포를 내 집 드나들 듯한다 사람이 살면서 어떤 일이 일어날 줄은 모를 일이다 꿈을 가지고 꿈을 좇다 보면 어느 날 그 꿈이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말 모를 일이다

문학일기 2024.04.14

시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예술의 세계는 느낌의 세계가 아닐까? 학생들에게 시를 읽고 느낌을 써보라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안목이 있어야 한다. 시를 보는 눈이 없으면 많은 시를 써도 향상이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이 안목이다. 그 수준에서 작품을 시작한다. 안목이 없으면 자기가 잘 쓰는지 못쓰는지 모른다. 심사를 할 수가 없다. 심사에는 척도가 있다. 보는 눈이 있어야 심사를 할 수 있다. 심사를 하면서 난처한 경우도 있다. 안목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생기는가? 안목은 읽기와 관련이 있다. 쓰기 전에 읽어야 한다. 이런 것이 좋은 작품이구나라는 걸 알게 되면 공부가 끝난다. 안목이 안 생기면 백 편을 쓰고 오 년 십 년을 써도 향상이 없이 그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다. 시의 재료는 언어인데 언어가 공짜이다. 시를 많이 읽어야 안..

문학일기 2024.04.14

아침에 시 한 편(정우영, 장석남, 한재범, 남길순)

저이는 어찌 저리 환할까 기웃거리다가, 드디어 비결을 찾았어요. 날마다 맑은 햇살 푸지게 담아 드시더군요. 설거지한 그릇 널어 바짝 말리고는, 마당에 그득히 쏟아지는 햇살 듬뿍 듬뿍 받는 거에요. 햅쌀보다 맛나고 다디단 햇살들을요. 봄에는 봄 햇살, 여름에는 여름 햇살, 가을 겨울에는 갈겨울 햇살, 그릇에 넘치겠지요. 구름 그림자 놀다가고 바람은 자고 가고 꽃 냄새, 더엄 냄새는 쉬었다 가겠지요 이보다 영양가 높은 곡식 달리 더 있을까요. 아무리 비우고 비워도 또 고봉으로 쌓아지요. 위봉산 넘어온 저 햇살들, 자연의 찬란한 햅쌀들. 함께 사는 소양이하고만 먹기 아까워서 여기저기 기별합니다. 냥이야 제비야 집 나간 모란아, 밥 먹으러 와. 내가 햅살밥 지었단다. 큰 그림자와 작은 그림자가 나란히 뜀박질 중..

문학일기 2024.04.14

저 좀 도와주세요

아스팔트 위에 지렁이가 여럿 쓰러져있다 비가 온다고 좋아서 땅 위로 기어 올라왔다가 길을 잘못 들어 아스팔트 위에서 숨이 멎어 버린 것이다 얼어붙은 땅 밑에 웅크리며 살다가 봄이 와서 좋다고 비가 와서 좋다고 소리 지르며 땅 위로 올라왔는데 살만한 세상이 드디어 왔다며 환호성 치다가 눈 깜박하는 사이에 길을 잘못 들어 아스팔트 위에서 그만 질식해 버렸다 살아보려고 몸을 최대한 길게 늘어뜨려 밀고 또 밀어보았지만 아스팔트란 놈은 흙처럼 부드럽지 못하고 딱딱하기만 했다 힘을 다 빼버린 탓인지 아스팔트 위에 길게 늘어져 널브러져 있다 잠시만요 저 좀 도와주세요

문학일기 2024.04.13

벧세메스로 향하는 소

송아지 울음소리 귓전을 맴돌고 폭격으로 무너진 콘크리트 잔해처럼 등가죽을 짓누르는 멍에의 무게 언덕길 넘고 골짝길 지나 마침내 다다른 벧세메스 등짐 내려놓은 후 숨 한 번 못 고른 채 타들어가는 살점 두고 온 어린것 설핏 떠올린 후 핏발 선 두 눈 부릅뜨고 스러져 간 벧세메스 소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가! 그렁그렁한 눈망울에 비친 당신 모습

문학일기 2024.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