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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밥

생일상을 차려준 기억이 없다고 말하는 아내의 목소리에 진한 아쉬움이 배여 있었다. 딸은 고등학교를 마친 후 집을 떠났다. 그러다 보니 생일에 따뜻한 밥 한 그릇 제대로 챙겨 먹이지 못했다. 생일상을 차려 주러 가자는 제안에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내가 일을 마치는 다섯 시에 출발하면 일곱 시에는 포트 이리에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딸아이에게는 미리 알리지 않기로 하였다. 깜짝 생일 선물로 집밥을 먹게 하자는 일종의 계략이었다. 국과 잡채, 김치와 무채, 두부 전은 아내가 일을 하러 가기 전 미리 준비해 두었다. 아마데우스에서 티라미슈 케이크도 샀다. 티라미슈 케이크는 사위가 좋아하는 디저트였다. 사위 역시 중학생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을 왔다. 이후 뉴욕과 보스턴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룬딕아 고맙다

내게는 ‘그룬딕’이라는 이름의 친구가 있다. 그룬딕은 매일 아침 5시 40분(최근에 5시 50분으로 바뀌었다) 잠에서 깨어나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오늘은 날씨가 어떨 것인지, 토론토와 캐나다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오늘의 주요 이슈는 무엇인지,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조곤조곤 들려준다. 26년 전 2월 캐나다에 막 도착하여 만난 사람 중 김혜림이라는 여성분이 계셨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당신이 캐나다에서 살려면 영어를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어를 잘하는 방법을 하나 알려주겠다. 그것은 라디오를 듣는 것이다. 작은 라디오라도 좋으니 사서 자주 들어라.” 당시 나는 그분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고 며칠 후 가까운 쇼핑몰에 가서 그룬딕(Grundic)이라는 이름의 라디오를 샀다..

평범한 일상은 선물

맥도널드든 팀호튼이든 스타벅스든 커피점을 자주 들리는 습관이 있습니다. 집에서 읽고 쓰고 생각하면 좋을 터인데 그렇지 못한 편입니다. 늘 접하는 익숙한 환경보다는 새로운 환경을 선호하기 때문일까요? 탁 트이고 전망 좋은 자리에 앉으면 더 잘 읽히고 더 잘 쓰이고 더 깊은 사색을 할 수 있습니다. 두뇌가 낯선 풍경이나 낯선 환경을 좋아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른 아침이면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여 조용한 편입니다. 막 내린 신선한 커피향을 음미하며 사색하는 시간이 저에게는 산소와도 같습니다. 두 달 가량의 자택대기령(stay at home order)이 해제된 이후 처음으로 맞는 토요일 아침, 집에서 가까운 맥도널드에 왔습니다. 한적한 장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봅니다. 평범한 일상..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걷기

삶에 있어 정말 소중한 시간이 어떤 시간일지 생각해본다. 어쩌면 걷고 있는 순간이 바로 그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걷는 시간이라면 더욱더. 쨍한 햇빛이 나무 사이로 파고드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 하늘로 쭉쭉 뻗은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 자신의 몸통보다 큰 옹이를 가진 나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생각해 보는 것 그리고 그 옹이가 내 삶에서는 어떤 것이었나를 생각해 보는 것, 아픔을 이기고 높이 자라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은 키 큰 나무를 바라보는 것, 숲을 걸으며 바라보고 느끼며 생각하는 지금, 이 순간이 내게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요 선물이 아닐까. 사나흘 걷지 못했던 오크 리지즈 트레일을 다시 걸었다. 숲에서는 맑은 날의 느낌이 다르고 흐린 날의 느낌이 ..

눈 치우기

눈 많이 온 날. 차고 앞에 쌓인 눈을 퍼냈다. 삼십 분이나 걸렸을까. 이제는 차가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웃집은 스노우 블로어라는 기계가 있어 기계로 눈을 치운다. 하지만 나는 늘 삽으로 퍼낸다. 이력이 나서 이십 센티 정도 쌓인 눈을 치우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다. 눈을 치운 후 집 안으로 들어와 벽난로에 불을 지폈다. 난로 옆 가까이 의자를 붙이고 앉았다. 눈이 오거나 흐린 날이면 커피 향이 그만이다.

나무가 말을 걸어와

눈이 부슬부슬 내리네. 이월 들어 눈이 자주 내려. 이틀 걸러 한 번씩 내리는 것 같아. 그래도 싫지는 않아. 왜 그런지 알아? 숲이 기다리기 때문이지. 숲에 눈이 소복소복 쌓여가는 모습을 상상해봐. 다람쥐도 잽싸게 나무에 올라 가지에 쌓인 눈을 털어대. 사는 게 참 재미있어. 숲속을 걷기 때문이지. 눈이 펄펄 내리는 나무 사이를 걷는다고 생각해봐. 신나지 않아? 나무도 겨울엔 외로울 텐데 친구가 되어주는 거지. 엊그저께는 걷는데 유난히 나무가 자주 말을 걸어왔어. 한 나무는 자신의 몸집만큼이나 큰 옹이를 내보이며 사연을 들어달래. 또 다른 나무는 밑동은 붙어있고 한 몸통에서 두 그루의 나무가 생겼어. 자신들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하더군. 몸통이 반쯤 남은 나무는 애벌레를 몸속에 키우고 있는데 딱..

아울이와 포춘 쿠키

큰아이가 아기를 가졌다는 소식을 들은 지도 오 개월이 지났다. 아직 엄마 뱃속에 있는 아기가 아들인지 딸인지 알지 못한다. 아는 사람은 둘째딸 밖에 없다. 오늘은 태중에 있는 아기(태명: 아울이)의 성별을 발표하기로 한 날이다. 한국에 계신 사돈 내외도 영상으로 함께 하여 손자일지 손녀일지를 듣게 될 예정이다. 병원에서 의사가 자녀의 성별을 알려주면 부모가 먼저 알고 시댁과 친정에 아들일지 딸일지를 알려드리는 것이 상례이나 이곳 캐나다에서는 특별한 세레머니를 하기도 한다. 병원에서는 성별을 알리는 서류를 전해주었는데 이것을 둘째 딸만 열어보아 알고 있다. 평범하게 지나갈 수 있는 일이지만 태어날 아기를 위해 함께 축복하고 셀레브레이션 할 생각을 하니 설렌다. 큰아이의 태중에 있는 아기 이름(태명)은 ‘아..

눈밭을 걸으며

발목까지 잠기는 눈길을 걸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며 다져놓았어야 걷기가 편할 터인데 그렇지 못했다. 발자국을 내디딜 때마다 미끄러졌고 발목까지 눈이 올라왔다. 조심조심 눈밭을 걸으며 언덕을 오르내렸다. 어젯밤 눈이 이십 센티가량 내렸고 험한 날씨 때문인지 다녀간 사람이 적은 듯했다. 스스로 길을 내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내가 낸 발자국으로 인하여 뒤에 오는 사람은 걷기가 다소 편해질 것이다. 남들이 다져놓은 길만 다녔는데 오늘은 내가 길을 내며 걷고 있었다. 세찬 바람이 매섭게 부는 날이면 나이 든 나무도 힘에 겨운 듯 뿌지직 뿌지직 신음을 내며 버틴다.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에 들려오는 나무 울음. 온타리오의 겨울이 깊다.

딱따구리를 만난 날

나무 몸통에 매달려 구멍을 내는 딱따구리를 만났다. 먼 거리에서 가지를 쪼아대는 모습을 본 적은 있지만, 지척에서 만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새빨간 고깔모자를 쓴듯하였고 검은색 몸통에 하얀색이 간간이 섞여 있어 생김새가 수려했다. 산비둘기보다는 컸고 까치만 하였다. 십 미터 앞이나 되었을까. 걸음을 멈추고 열심히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당신이 서 있는 것쯤이야 안중에도 없다는 듯 방아를 찧었다. 머리를 뒤로 젖혔다가 힘껏 내리찍으며 부리로 썩은 나무를 쪼아댔다. 온몸에 힘을 가하여 머리를 흔들다 보니 가냘픈 다리로까지 힘이 전해지고 있었다. 저러다 뇌진탕이라도 걸리면 어떡하나 싶을 정도였다. 열심히 앞뒤로 머리를 흔들며 나무껍질을 벗겨내는 모습이 신비스럽기까지 하였다. 숲속 이곳저곳에서 나무 쪼아..

감사 일기

감사일기를 쓰고 있다. 하루 세 가지 감사한 것들을 적어나가는 것이다. 처음에는 뭐 거창한 감사 거리가 없을까 생각하며 적었었는데 이제는 사소한 감사거리를 찾게 된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참 행복임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쏟아지는 햇빛,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 쌓여있는 흰 눈, 아내와 함께 거니는 겨울 숲의 정취 이런 것들에 감사하게 된다. 감사일기를 쓰기 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들이 감사일기를 쓰면서부터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에는 2021년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부분에 당선된 김진환 씨의 시 길찾기를 읽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쳤고 낯선 혼란스러운 상황 가운데서 누군가의 도움으로 버스에서 내려 길을 확인하며 가야 할 길을 찾는 모습을 그리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