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과 감격이 있는 나날 88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걷기

삶에 있어 정말 소중한 시간이 어떤 시간일지 생각해본다. 어쩌면 걷고 있는 순간이 바로 그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걷는 시간이라면 더욱더. 쨍한 햇빛이 나무 사이로 파고드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 하늘로 쭉쭉 뻗은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 자신의 몸통보다 큰 옹이를 가진 나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생각해 보는 것 그리고 그 옹이가 내 삶에서는 어떤 것이었나를 생각해 보는 것, 아픔을 이기고 높이 자라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은 키 큰 나무를 바라보는 것, 숲을 걸으며 바라보고 느끼며 생각하는 지금, 이 순간이 내게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요 선물이 아닐까. 사나흘 걷지 못했던 오크 리지즈 트레일을 다시 걸었다. 숲에서는 맑은 날의 느낌이 다르고 흐린 날의 느낌이 ..

눈 치우기

눈 많이 온 날. 차고 앞에 쌓인 눈을 퍼냈다. 삼십 분이나 걸렸을까. 이제는 차가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웃집은 스노우 블로어라는 기계가 있어 기계로 눈을 치운다. 하지만 나는 늘 삽으로 퍼낸다. 이력이 나서 이십 센티 정도 쌓인 눈을 치우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다. 눈을 치운 후 집 안으로 들어와 벽난로에 불을 지폈다. 난로 옆 가까이 의자를 붙이고 앉았다. 눈이 오거나 흐린 날이면 커피 향이 그만이다.

나무가 말을 걸어와

눈이 부슬부슬 내리네. 이월 들어 눈이 자주 내려. 이틀 걸러 한 번씩 내리는 것 같아. 그래도 싫지는 않아. 왜 그런지 알아? 숲이 기다리기 때문이지. 숲에 눈이 소복소복 쌓여가는 모습을 상상해봐. 다람쥐도 잽싸게 나무에 올라 가지에 쌓인 눈을 털어대. 사는 게 참 재미있어. 숲속을 걷기 때문이지. 눈이 펄펄 내리는 나무 사이를 걷는다고 생각해봐. 신나지 않아? 나무도 겨울엔 외로울 텐데 친구가 되어주는 거지. 엊그저께는 걷는데 유난히 나무가 자주 말을 걸어왔어. 한 나무는 자신의 몸집만큼이나 큰 옹이를 내보이며 사연을 들어달래. 또 다른 나무는 밑동은 붙어있고 한 몸통에서 두 그루의 나무가 생겼어. 자신들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하더군. 몸통이 반쯤 남은 나무는 애벌레를 몸속에 키우고 있는데 딱..

아울이와 포춘 쿠키

큰아이가 아기를 가졌다는 소식을 들은 지도 오 개월이 지났다. 아직 엄마 뱃속에 있는 아기가 아들인지 딸인지 알지 못한다. 아는 사람은 둘째딸 밖에 없다. 오늘은 태중에 있는 아기(태명: 아울이)의 성별을 발표하기로 한 날이다. 한국에 계신 사돈 내외도 영상으로 함께 하여 손자일지 손녀일지를 듣게 될 예정이다. 병원에서 의사가 자녀의 성별을 알려주면 부모가 먼저 알고 시댁과 친정에 아들일지 딸일지를 알려드리는 것이 상례이나 이곳 캐나다에서는 특별한 세레머니를 하기도 한다. 병원에서는 성별을 알리는 서류를 전해주었는데 이것을 둘째 딸만 열어보아 알고 있다. 평범하게 지나갈 수 있는 일이지만 태어날 아기를 위해 함께 축복하고 셀레브레이션 할 생각을 하니 설렌다. 큰아이의 태중에 있는 아기 이름(태명)은 ‘아..

눈밭을 걸으며

발목까지 잠기는 눈길을 걸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며 다져놓았어야 걷기가 편할 터인데 그렇지 못했다. 발자국을 내디딜 때마다 미끄러졌고 발목까지 눈이 올라왔다. 조심조심 눈밭을 걸으며 언덕을 오르내렸다. 어젯밤 눈이 이십 센티가량 내렸고 험한 날씨 때문인지 다녀간 사람이 적은 듯했다. 스스로 길을 내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내가 낸 발자국으로 인하여 뒤에 오는 사람은 걷기가 다소 편해질 것이다. 남들이 다져놓은 길만 다녔는데 오늘은 내가 길을 내며 걷고 있었다. 세찬 바람이 매섭게 부는 날이면 나이 든 나무도 힘에 겨운 듯 뿌지직 뿌지직 신음을 내며 버틴다.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에 들려오는 나무 울음. 온타리오의 겨울이 깊다.

딱따구리를 만난 날

나무 몸통에 매달려 구멍을 내는 딱따구리를 만났다. 먼 거리에서 가지를 쪼아대는 모습을 본 적은 있지만, 지척에서 만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새빨간 고깔모자를 쓴듯하였고 검은색 몸통에 하얀색이 간간이 섞여 있어 생김새가 수려했다. 산비둘기보다는 컸고 까치만 하였다. 십 미터 앞이나 되었을까. 걸음을 멈추고 열심히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당신이 서 있는 것쯤이야 안중에도 없다는 듯 방아를 찧었다. 머리를 뒤로 젖혔다가 힘껏 내리찍으며 부리로 썩은 나무를 쪼아댔다. 온몸에 힘을 가하여 머리를 흔들다 보니 가냘픈 다리로까지 힘이 전해지고 있었다. 저러다 뇌진탕이라도 걸리면 어떡하나 싶을 정도였다. 열심히 앞뒤로 머리를 흔들며 나무껍질을 벗겨내는 모습이 신비스럽기까지 하였다. 숲속 이곳저곳에서 나무 쪼아..

감사 일기

감사일기를 쓰고 있다. 하루 세 가지 감사한 것들을 적어나가는 것이다. 처음에는 뭐 거창한 감사 거리가 없을까 생각하며 적었었는데 이제는 사소한 감사거리를 찾게 된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참 행복임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쏟아지는 햇빛,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 쌓여있는 흰 눈, 아내와 함께 거니는 겨울 숲의 정취 이런 것들에 감사하게 된다. 감사일기를 쓰기 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들이 감사일기를 쓰면서부터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에는 2021년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부분에 당선된 김진환 씨의 시 길찾기를 읽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쳤고 낯선 혼란스러운 상황 가운데서 누군가의 도움으로 버스에서 내려 길을 확인하며 가야 할 길을 찾는 모습을 그리고 ..

역사 소설 '여명과 혁명 그리고 운명'

정진호 교수는 서울대학교 재료공학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MIT에서 공부했다. 연변과학기술대학과 평양과학기술대학에서 오랜 기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두 대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동안 교수로서 누릴 수 있는 명예나 경제적인 이익은 내려놓아야 했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교수들은 대부분 자원봉사자로 학생들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나는 정진호 교수의 이런 희생과 열정에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토론토 본 한인교회에서 진행된 ‘통일 비전 교실’이라는 강좌를 들은 후에는 정 교수가 더 가깝게 느껴졌다. 10주간 진행된 강의 중 내가 들어갔던 강의는 단 두 차례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시간에 배운 내용만으로도 제법 많은 것을 깨우칠 수 있었다. 강의를 들으며 느낀 점은 나 자신이 한국 근현대사에 대해 너무..

오크리지즈 트레일(Oak Ridges Trail)

2월 들어 첫 번째로 맞는 주일입니다. 온라인으로 주일 예배와 소그룹(촌) 모임을 마치고 트레킹 코스를 걷기로 하였습니다. 파란 하늘이 보이고 환한 햇볕이 눈 쌓인 대지 위로 내려앉습니다. 영하 십 도의 추위지만 검은 마스크가 얼굴을 감싸주어 그다지 춥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여유 있게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평소 만 걸음 내외를 걸었다면 오늘은 그 두 배를 걸을 작정입니다.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정겹습니다. 어릴 적 눈싸움을 하며 뛰놀았던 생각이 납니다. 태어나고 자란 곳은 드물게 눈이 내렸습니다. 곱던 눈은 하루도 못 가 녹아버리곤 하였지요. 이곳 온타리오의 트레킹 코스엔 12월부터 4월까지는 눈이 쌓여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능선을 따라 걸을 때면 칼바람이 뺨을 때립..

성영을 생각하며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 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이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힘없이 내뱉으며 고통스러워하시는 그분 목소리. 십자가 십자가 날마다 말하고 노래 부르지만 정작 그분이 당하신 그 고통을 제대로 상상이나 해보았을지.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다’는 시인의 절절함이 내게는 없다.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절실함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성영을 생각하며 고뇌에 찬 기..